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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0 /2011.06] 기획 _ The Story of SUN(孫)‘s Family: 인천화교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9 조회수 56

[Vol.10 /2011.06] 기획 _ The Story of SUN()‘s Family: 인천화교 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구술: 손덕준 _ 인천 중화루 사장 

채록: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연재를 시작하며

인천대학교 HK 중국관행연구사업단은 화교연구의 일환으로 화교구술채록을 진행하고 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인천화교의 대표적 인물 손덕준(孫德俊)과 그의 가족이다. 어느 일개인의 가족사가 화교 전체의 기억과 역사를 온전히 담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교 개인의 인생 궤적을 꼼꼼히 되짚어보는 것은 삶의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본 연재에서는 구술채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도록 하겠다.

 

*. 본 연재는 기본적으로 구술기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되, 지나치게 문맥이 어색한 부분은 임의로 수정을 가했다.

*. 문중에 말줄임표()가 있는 부분은 공개하기에 적절치 않은 부분이나 반복되는 내용으로, 구술대상자와 상의 하에 생략한 부분이다. 또한 지면의 한계로 인해 기본 내용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채록자 임의로 생략한 부분도 있다.

*. (???) 부분은 성명이나 상호명으로, 구술자가 한자표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추후에 조사를 해서 보충하도록 하겠다.

 

송승석(이하 송): 제가 꼭 질문하는 내용이 아니라도 말씀하시고 싶은 게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손덕준(이하 손): . 뭐 될 수 있으면 박사님이 질문해주시면 내가 좀 편하죠. 내가 생각 못한 걸.

 

: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장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외할아버님에 대한 기억부터 되짚어 봐야 할 것 같아요.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외할아버님이 여기 한국에 언제쯤 오시게 된 건가요?

 

: 우리 외할아버님은 지금 살아계시면 백 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백 한 몇 살 정도는 됐어요. 저도 아는 게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사실 제가 세 살 땐가 네 살 땐가 돌아가셨으니까. 50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얘기 듣기로는, 열일곱 여덟 살 쯤에 한국에 왔어요, 그 양반이. …그게 듣는 얘기로는 결혼을 해가지고 외할머니는 중국에다 두고, 한국하고 중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생활을 하셨는데… 그때가 일정시대예요. …옛날에는 중국에 산동성 옌타이(煙台)에 왕지아탄(王家灘)이라고 있었어요. 거기가 고향이에요.

 

(중략)

 

: 그렇죠. 그때는 다 그랬어요. 그런데 그쪽에 전염병이 돌아서 아들 딸 다 죽었어요. 중국에서 죽었어요. 그래 가지고 우리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를 한국에 데리고 온 거예요. 애들 다 죽었으니까 한국에 데리고 와서 우리 어머니 태어나시고 우리 이모님 태어나신 거예요, 그게.

 

……(중략)……

 

: 그럼, 그때 화교 분들은 대개 어떻게 한국에 들어오시게 된 거예요?

 

: 그게 제가 알기로는 한동안 있잖아요, 산동성 있잖아요. 사실 그때 당시 아마 한재(旱災)가 많았어요. 비가 안와서 가뭄. 인민들 있잖아요, 그때 사람들 생활이 상당히 먹을 것도 없고 사실 배불리 먹기도 힘들 때에요. 그래서 아마 일부는 동베이(東北)로 촹관동(闖關東)하고, 일부는 촹가오리(闖高麗)로 한국으로 오는 거야.

 

: 한국으로 오는 걸 촹가오리라고 했군요?

 

: , 그때 당시 왜냐면요. 그때 당시 중국에서 고려라고 그래요. 한국이라고 하면 그건 나중 얘기고 그때 당시 청나라 때는 촹가오리 뭐 이렇게 해서, 한국에 오는 사람은 뭐냐면 다 한국의 인천, 다 그때 당시 유일한 교통 방법은 배예요. 배타고 순풍(順風)하면 하룻밤이면 와요, 바람 맞으면서. 그래서 범선, 뭐 여객선도 있지만 범선을 타고 왔어요. 그래서 순풍하면 하루 만에 한국에 온다. , 이런 식으로… 그때 여기가 바닷가니까 이 통로를 통해서 무역하는 사람들 많이 왔어요. 또 와서 석바위나 주안 쪽에서 농사짓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중국 사람들 그때 당시는 한국 분들하고는 먹는 야채도 좀 차이가 있었어요. 중국 사람들은 샹차이(香菜)라던가 샐러리라던가 중국사람 취향에 맞는 그런 야채에서부터 뭐 옷 만드는 사람, 이발하는 사람, 농사 지어가지고 아침마다 인력거 해서 팔고. 그 진짜 그 중국 사람의 식생활이며 입는 거며 다 자체로 해결하던 그런 시대였어요. 뭐 그러다가 만보산사건이라든지 그런 걸 다 겪었죠. 우리 외할아버지도 그걸 겪었어요. 정말 고생 많이 했지요.

 

: 그럼, 외할아버님은 처음에 열일곱 여덟 살 때부터 이제 한국을 드나드셨잖아요? 그럼, 한국을 드나드시면서 어떤 일을 하신 거죠?

 

: 그…상점 점원도 있었다가 나중에는 중화루(中華樓) 지배인으로 있었어요. 우리 외할아버지, 일본 시대 때는 잘 나갔어요. 일본 말 유창하게 했으니까요. 그때 당시만 해도 일본 말을 아주 잘해서 특히, 일본 관리들이나 그런 분들하고 사이가 좋았어요. 그 양반이 그때 중국 사람들 예를 들어서 무슨 일 있으면 해결, 해결사 역할을 좀 했죠 그때 당시는. 좌우지간 화교들 많이 도와 줬어요. 화교들 일본 시대 때라, 경찰서 관공서 출입을 많이 하셨어요. 워낙 일본말 잘하고 외교를 잘했어요. 무슨 일 있으면 꼭 우리 외할아버지한테 부탁을 하고, 지금 얘기하면은 있잖아요, 쉽게 얘기하면 뭐냐면 친일파죠. 솔직히 얘기해서 그거야. 경찰서 잡혀가도 우리 외할아버지 가서 그렇게 좀 해결해주고, 꺼내주고, 좀 많이 해주고 그러던 양반이야. 자기도 그때 빈해루(賓海樓) 같은 데 구동(股東)이니깐, 장꿰이(掌櫃)이니까, 일본 손님도 유치하고, 관공서 손님도 유치하고, 나중에 그게 중화루 있잖아요. 아마 빈해루 구동 다 빼가지고 중화루 갔으니까 지배인이죠. 와이탕(外堂). 주식회사로 치면 징리(經理). 장부 같은 거 관리하는 사람.

 

: 와이탕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거예요?

 

: 와이탕은 뭐냐면요, 손님들 해결사예요. 손님 끌어 들이고 수금도 하러 다니고… 지금 그 얘기는 나도 잘 몰라요. 사실 내막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하여튼 우리 외할머니가 얘기하는 거는, 그때 외할아버지는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이다.” 그때 주변사람들이 그런 평을 많이 했대요. 호인(好人)이다, ()호인이다. 참 그 온순하시고 나 지금도 기억나는 건 동그란 안경 있잖아요, 그거 끼시고…. 자세한 건 잘 몰라요.

 

……(중략)…….

 

: 예전에 사실 인천에서 빈해루 같은 경우는 굉장히 큰 중국집이었잖아요?

 

: 박사님, 잘 아시네. 그걸 하시다가 나중에 중화루 있잖아요. 거기 와이탕(外堂) 했었어요. 와이탕이라면 지금 얘기하면 지배인 역할 쯤 됐을 거예요. 중화루는 주식회사거든요. 몇 사람이 동업해서 크게 한…

 

: 그럼, 혹시 그때 외할아버님께서 갖고 계셨던 구동 증서 같은 게 남아 있나요?

 

: 그게…없어요. 다 없어졌어요. 옛날에 화교들 그런 거 중요한지 몰랐거든. 그래서 쓰레기처럼 책이나 문서들 같은 거 트럭때기로 다 갖다버리고…지금 생각하면 참!

 

: , 그거 참 안타깝네요. 구동 얘기 좀 더 해주세요. 그 당시에는 그 정도의 중국집을 하려면 여러 사람이 이렇게 다 모여서 합작을 해서 하신 거죠?

 

: 그건 왜냐하면요. 당시는 특히 산동사람들 있잖아요. 주식회사 제도가 있었어요. 그런 습관 있어요. 여러 사람 합작해서… 그때 당시 중국 사람들은 예를 들어 옌타이 사람이면 옌타이 사람끼리 뭉쳐서 그 고향에 따라서 돈 좀 있는 사람 혼자 하기가 부족하고 아마 그래서 그런 식으로 한 거 같아요.

 

: 그러니까 주로 구동들은 같은 고향 사람들 가령, 옌타이 사람이면 옌타이 사람들끼리 모여서 중국집을 연다든지 혹은 어떤 사업이나 장사를 하신 거군요?

 

: 맞아요. 대부분 그렇게 해요. 예를 들어, 중화루는 옌타이 사람들끼리 모여서…라이장궈(???)라는 사람이 주식 40%…우리 외할아버지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뭔가 좀 있는 거 같아. 그때 당시 지배인 했으면 그냥 지배인 하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에요. 조사 좀 해보야 할 것 같은데.

 

: 그때는 요릿집 말고 무역하시는 분들도 많았지요?

 

: 당시만 해도 북경, 상해 사람들도 많았어요, 무역하신 분들. 그 산동 사람뿐만 아니라 지금은 다 역사지만 연세 많은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요, 그때가 전성기죠. 그때는 상당히 차이나타운도 번성했고 무역도 상해, 홍콩 뭐 얘기 들어보면 중국, 한국 출입하는 그런 역외선이 한 두 척이 아니었었어요. 배 무역을 하기 때문에 역외선도 있을 것이고, 왕래가 중국사람, 한국사람 그렇게 많았어요. 역사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요.

 

: 그럼, 외할아버님은 그 후로도 중화루에 쭉 계셨나요?

 

: 그 중화루 지배인 하다가 나중에 노년에 솔직히 말해서, 그 중화루도 일본 시대 지나고 나서 일본말 잘하는 사람도 필요 없고 퇴출당해서…이게 사실 전쟁 때문에 6.25전쟁 때문에 집안이 다 으스러졌죠. 그 이전에는 중한 수교가 되어 있는 상태라 왕래하는 단계라 6.25 지나고 단절됐잖아요. 문 닫히니까, 화교들 무역한 사람도 장사꾼도 다 못하는 거죠. 결론은 뭐냐, 그냥 식당 하게 되고 짜장면집 해가지고 그나마 그것도 돈 좀 번 사람이면 다 제3국으로 가버렸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은 그런 거 같아요. 6.25 지나고 나서 거 뭐 있어? 차이나타운 불바다 다됐죠. 6.25때 폭격 다 맞아가지고 그 대 무역 회사 회장, 그 유람선 회장으로 일한 사람들이 나중에 뭐했는지 알아요? 짜장면 장사했어요. 바로 그 중홍(中虹)이라고 있잖아요? 그 건물에서 그때 중국, 한국 왔다 갔다 하는 배 있잖아요, 미퉁하오(??) 라고 배 여러 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주 큰 무역회사 회장인데 나중에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아요? 짜장면 장사했어요. 그것도 혼자 손수 주방에서 그렇게 하다가 다 가셨는데…. 근데 그게 막판이 다 안 좋았어요. 6.25전쟁 끝나고 나서 중국하고 딱 이렇게 문이 닫히니까 재산 중국에 다 있죠. 여기다가 그냥 건물 사무실 쓰던 거하고 자기가 임시로 살던 그거 밖에 없잖아요, 하던 무역도 못하고 먹기 살기 위해서 식당일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갖고…대문 닫힌 지가 40년 닫혔단 말이에요. 그게 그래서 그렇게 됐기 때문에 화교들 누구나 다, 그리고 우리 아버님도 알다시피 한국 와가지고 1.4후퇴 때문에 못 돌아간 거 아니에요?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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