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알림
Information / News

열린게시판

제목 [Vol.10/2011.06] 기획 _ 전통 중국의 상인(5) 晉商 靈石縣의 王家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9 조회수 66

[Vol.10 /2011.06] 기획 _ 전통 중국의 상인(5)    晉商 靈石縣의 王家

옌훙중(燕紅忠)ㆍ류청후(劉成虎) _ 중국 산시대학 진상학연구소 씀

장호준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옮김

 

산시(山西)의 거상 호족 중에서 그 족적을 가장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는 가문은 링스현(靈石縣) 징성촌(靜升村)의 왕씨(王氏) 일가일 것이다. 진중시(晉中市)의 남단에 있는 링스현 징성촌은 산시성(山西省)의 중심인 타이위안(太原)과는 140km 떨어져 있고, 펀허(汾河)의 중류 부근에 있는 진중(晉中)과 린펀(臨汾) 두 분지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현의 동부는 타이웨산(太嶽山) 지역에 속하고, 서부는 뤼량산(呂梁山) 지역에 해당된다. 펀허(汾河)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향해 한신령(韓信嶺)을 가로질러 흐르니, 한줄기의 좁고 긴 날다람쥐 형상의 계곡을 이루고 있다

 

1 _  원대(元代)에 비로소 명당에 집을 건축하다

 

징성(靜升) 왕씨 일가는 타이위안(太原) 왕씨의 후예로 그 선조의 한 부류가 일찍이 타이위안(太原)에서 링스(靈石)로 옮겨 펀허(汾河)의 협곡에 위치한 거우잉촌(溝營村: 지금의 南關灘村)에 정착하게 되었다. ()나라 황칭(皇慶) 연간(1312~1313)에 종조(宗祖) 왕스(王實)는 거우잉촌에서 다시 징성촌(靜升村)으로 이주하여 소작을 위주로 하고, 한가할 때에는 농토를 개간하여 스스로 경작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몇 무()의 농토를 소유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경농(自耕農)이 되었다. 농작물을 심는 것 외에도 겸업으로 두부 가게를 운영하였다. 그가 만든 두부는 값에 비해 품질이 우수하였는데, 단단하면서 부드럽고 밝으면서 반들반들하며 또한 맛이 깔끔(純正)하고 향기가 맑아서, 차게 버무리거나 뜨겁게 볶아도 모두 원래의 맛을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쉽게 부서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사람됨이 그 이름과 같이 성실하여 이미 판매한 두부의 품질을 보증했을 뿐만 아니라 그 양이 조금도 모자라게 하지 않아 왕씨의 두부는 멀리까지도 그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어느 날 왕스가 두부를 팔러가는 도중에 한 노인이 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호흡이 미약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그는 곧 두부 짐을 내려놓고 그 노인을 업고 집으로 급하게 돌아오던 중에 노인을 위해 의사를 불러 약을 청하고 친히 약과 밥을 먹이며 잠시도 노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노인을 자신의 가족과 같이 보살펴서 마침내 위급한 상황을 면하게 하였다. 그 노인이 외지사람임을 알자 마음이 따뜻한 왕스는 그에게 마음 편히 자신의 집에 머물면서 몸조리를 잘해 건강이 완전히 회복한 뒤에 집으로 돌아가기를 권하였다. 노인은 그의 진심어린 마음을 받아들여 그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요양하는 기간 동안 노인은 왕스를 도와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드는 것과 같은 작은 일 외에 간혹 산책을 하면서 촌락의 경치를 구경하였다.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을 읽어 풍수지리에 안목이 있던 노인은 그 촌락 중에서 번화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며, 길가에 점포들이 줄지어 서 있고 길의 앞뒤에서 닭과 개들이 서로 짖어대는 생동감이 넘치는 장면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노인은 마음속으로 “링스현은 과연 풍수가 좋은 명당이로구나! 사람은 준걸스럽고 지역은 신령스러우니, 강남이 아닌데도 강남보다 우월하다”라 생각하고, 그의 은인을 위해 일생의 명당을 골라주겠노라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 노인은 그날부터 사방 수 십리를 다니면서 명당을 찾기 시작했다. 어느 날 노인이 ‘밍펑위안(鳴鳳原)’이라는 개활지(開闊地)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의 산수가 수려하고 맑고 시원한 들꽃 향기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음을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기뻐하였다. 그는 “이곳이 바로 내가 찾던 풍수지리의 명당이로구나!”라고 감탄하며, 눈을 감고 합장하여 푸른 하늘에 기도하고 맹세하며 소원을 빌었다. 3일 뒤에 노인은 또 촌락 서쪽에 있는 장가(張家)의 한 그루 늙은 홰나무(槐樹)의 동쪽 부근을 선정하였다. 그는 왕스에게 신신당부하여 반드시 나중에 이곳에 집을 지어 좋은 나무를 널리 심고 음덕과 복을 구하도록 하였다. 노인이 완쾌한 후 왕스의 곁을 떠난 지 몇 년 후, 수중에 돈이 조금 넉넉하게 된 왕스는 이곳에 토굴집(窯洞)을 만들고 수많은 나무들을 재배하였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이 노인의 혜안으로 인해 왕씨 집안은 나날이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왕스가 재산을 축척하면서 토굴 양측에 ‘즈화이(植槐)’와 ‘융추이(擁翠)’라는 두 개의 건물을 지었다. 자손들은 이 건물을 계속 증축하여 후대에 ‘융추이샹(擁翠巷)’라는 건물로 확장하였는데, 후대 사람들은 이를 ‘왕쟈샹(王家巷)’이라 불렀다. 현존하는 『징성촌 왕씨 원류비기 (靜升村王氏源流碑記)』에 의하면, 일찍이 명나라 톈치(天啓) 연간에 왕씨 일가는 이미 “선비들은 경사(經史)를 전수하여 영재들이 줄지어 배출되었고, 농민들은 생산이 넉넉하여 유산을 남길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로움을 향유하였으며, 장인들은 여러 기예에 통달하여 정교함이 서로 생겨나고, 상인들은 이익을 추구해 풍성하게 되어 자본이 천만을 의지하였다”고 한다. 청나라 캉시(康熙)와 쳰롱(乾隆) 연간에 왕씨 일가는 이미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하여 다른 지역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왕스의 후예들은 선조들의 창업의 어려움을 잊지 않기 위해 1940년대 말까지도 왕스가 당시에 두부를 팔던 보따리를 징성(靜升) 왕씨의 사당 안에서 봉양하였다.

 

2 _ 반란을 평정하여 상업의 기회를 얻고 관상(官商)으로 전환하다

 

명대(明代)에 수공업이 발전하고 산시성 상인들이 전성기를 구가함에 따라 농업과 독서로 전승되던 징성 왕씨 가문은 점점 상업과 관계(官界)로 진출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그 보다 일찍이 약 10세기 무렵 왕씨 일가의 일부는 면직물과 잡화 그리고 전당포를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으며 주업은 여전히 농경과 관련된 일들이었다.

 

왕씨 일가는 농경과 상업에 종사하는 동시에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8세기부터는 점점 더 많은 학자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무렵까지 왕씨 가문은 129명의 생원(生員), 211명의 감생(監生) 그리고 다수의 거인()과 진사(進士)를 배출하였다. 왕씨 일가는 또한 문묘(文廟)를 수리하고 의학(義學)을 담당하며 학관(學館)을 세우는 등의 교육 공익사업에 대해서도 대단히 중요시하였으며 아낌없이 기금을 출연하여 지역 사회의 공익에 기여하였다.

 

왕씨 일가는 6세기부터 금(), (), (), (), () 등의 5대 지파(支派)로 나뉘어 지속되다가, 쳰롱(乾隆) 54(1789)에는 그 지파의 이름을 인(), (), (), (), ()으로 변경하였다. 왕씨 일가는 11세기에 이르러 상업 자본이 크게 축적되어 점차 대자본의 거상(巨商)이 되었다. 명나라 톈치 연간 비기(碑記)의 기록에 의하면, 왕씨 일가의 “선비들은 경사(經史)를 전수하여 영재들이 줄지어 배출되었고, 농민들은 생산이 넉넉하여 유산을 남겨 풍성함을 향유하였으며, 장인들은 여러 기예에 통달하여 정교함이 서로 생겨나고, 상인들은 이익을 추구하여 풍성하게 되어 자본이 천만을 의지하였다”라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뤄보면, 당시 왕씨 일가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골고루 전면적으로 발전하였고 그 업적이 현저했고 자산이 충분하여 이미 징성촌(靜升村)을 대표하는 부호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씨 일가는 14세기부터 부분적으로 명대의 체제 안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당시 잦은 전쟁으로 인해 핑촨(平川) 지역의 뽕나무 밭 등이 심하게 파괴되고  가축(畜力)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짐에 따라, 왕스의 13세손인 왕싱왕(王興旺) 등은 이 절호의 상업적 기회를 겨냥하여 자식과 조카들을 이끌고 하북성(河北省)과 산동성(山東省) 등의 지역을 오가며 가축을 판매하였다. 이들이 의기와 신용에 의지하여 거래를 추진함에 따라 매매 규모가 더욱 팽창되고 자본 규모 역시 나날이 확장되었다.

 

왕씨 일가는 청조에 이르러서도 지속적으로 번창하였는데, 그 중 한 지류인 왕쳰서우(王謙受), 왕쳰랑(王謙讓), 왕쳰허(王謙和), 왕정쥐(王正居), 왕쳰메이(王謙美)이라는 5명의 형제들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된다. 이 형제들은 천부적인 소질과 훌륭한 가정교육을 바탕으로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과 지혜를 지니게 되었는데, 과감하고 대범하며 지혜로운 방식으로 여러 상업 조직을 합병하여 왕씨 일가의 창업사에 찬란한 한 획을 그었다. 그들 5명의 형제 중 일부는 외지에서 떠돌며 경험을 쌓았고 일부는 고향에 머물러 집을 지켰는데, 그들의 계획은 매우 웅대했으며 또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왕쳰서우와 왕쳰허는 외지의 도처를 분주하게 내왕하며 최선을 다해 소금, 양식, 견직물, 잡화, 가축 등의 품목을 거래하면서 왕씨 일가에게 커다란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왕쳰랑과 왕정쥐는 고향을 지키면서 농토를 경영하고 가업을 확장하여 안정된 방식으로 왕씨 일가의 근거지에서 경제능력을 확충하였다. 몇 년간에 걸친 이들의 각고의 분투의 결과, 왕씨 일가가 한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견실한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왕쳰서우와 왕쳰허 두 형제는 서로 정보를 교류하며 시세를 잘 판단하여 그들의 상업적 활동 범위를 진(: 산시)에서 부터 멍(: 몽고)까지, 그리고 이후에는 옌(), 자오(), 치루(齊魯) 일대까지 확장하였다. 그들은 상업적 경영 과정에서 ‘헤이다오(黑道: 부정한 방식)’와 ‘홍다오(紅道: 관에 의존하는 방식)’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막힘이 없는 원활한 방식으로 재물을 축적해나갔다.

 

여기서 말하는 ‘헤이다오’는 단순히 토비나 산적 등에 의지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장거리를 오가는 판매 상인의 경우, 외부의 열악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물론 도중에 종종 ‘헤이다오’의 방해와 약탈에 직면하게 된다. 상품 운송 도중에 이러한 약탈자의 습격을 받으면 상인들은 상업적 성공을 눈앞에 두고 극심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왕씨 일가 형제들은 장거리 운송 판매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토비들이 어떤 때에는 다만 탐관오리만을 약탈하고 또 그 중 어떤 이들은 ‘의기(義氣)’를 강조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따라 왕씨 형제들은 금전을 이용하여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이 유대를 상업에 활용한 것인데, 이는 ‘적을 변화시켜 벗으로 삼고(化敵爲友), ‘창을 변화시켜 옥백이 되게 (化幹戈爲玉帛)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러한 ‘헤이다오’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은어와 암호를 배웠고 또한 그들의 자세와 습관 등도 이해하였다. 이렇게 된 이후로는 운반·판매 중에 약탈을 당하는 일 역시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이른바 ‘홍다오’라는 것은 ‘관부(官府)’를 가리킨다. 왕쳰서우와 왕쳰허 두 형제는 관부와의 친분을 기반으로 군수 관련 정보를 손쉽게 획득할 수 있었다. 기지가 넘치는 이 두 명의 형제는 종종 이러한 정보와 좋은 조건을 이용하여 상당한 이윤을 획득하곤 하였다.

 

왕쳰서우와 왕쳰허(謙和) 두 형제 모두 사교술이 뛰어나고 언변에 능통하여 다른 사람들과 쉽게 영합하면서도 스스로를 자제할 줄 알아 널리 친구를 사귈 수 있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소문이 떠돌았다. 캉시(康熙) 12(1673)에 두 형제가 여관에 투숙했을 때 두 명의 장교를 만났다. 두 형제는 그들과 이것저것 끝없이 이야기하며 차와 술을 서로 권해 곧 뒤섞여 친숙해졌다. 두 장교는 그들의 출장이 당시 산시성(陝西省)에서 발생한 난리를 평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조만간 조정에서 산시성(陝西省)의 난을 진압할 계획인데 군마(軍馬)와 양초(糧草)가 급하게 필요해 그 두 장교가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 출장길에 나섰던 것인데, 일이 순탄하지 못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왕쳰서우는 곧바로 마오수이(毛遂: 趙나라 平原君의 식객)와 같이 스스로 자신을 추천하면서 두 형제가 나라를 위해 함께 걱정하기를 원하며 충성을 다하겠노라고 밝혔다. 두 장교는 이들 왕씨 형제의 진실함과 총명함에 희색이 만연하여 곧바로 두 형제와 함께 그 일을 상세하게 논의하였다. 이들 네 명은 서로 의기투합하였고 술을 빌어 흥취를 돋우며 밤새도록 긴 이야기를 나누고 동이 틀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헤어졌다.

 

왕씨 형제는 얼마 후 24필의 좋은 말을 핑양부(平陽府)에 헌납하여 반란평정을 지원하였다. 이로 인해 이들은 핑양즈부(平陽知府)와 보군통령(步軍統領)으로부터 표창을 받게 되었고 또한 청나라 군대를 위해 양초(糧草)와 군마(軍馬)를 조달하는 주문서를 획득하게 되어 군령에 따라 청나라 군대에게 군마(軍馬)와 양초(糧草)를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왕씨 형제는 커다란 경제적 이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인 지위도 크게 향상되었다. 이렇게 관부라는 든든한 후견인을 얻게 됨에 따라 두 형제의 사업은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과 같이 급속하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한 명은 북상하여 만리장성 이북 지역에서 말을 구매하고 다른 한 명은 남하하여 중저우(中州)에서 양식을 수집하고 대량의 기타 군수용품을 마련하였다. 가는 곳이 관청이든 촌락이든, 만나는 사람이 관원이든 일반 백성이든, 그 이후 두 형제의 상업적 왕래 길에는 전혀 막힘이 없었다. 이들은 한 장의 관인(官印)이 얼마나 커다란 효력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관부와 상인이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캉시(康熙) 15(1676)에 반군이 투항하자 조정은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공신들을 포상하였다. 여러 관리들은 두 형제가 군수물자 조달에 커다란 공헌을 한 점을 찬양하며 왕쳰서우와 왕쳰허 두 형제를 공신으로 적극 추천하였다. 이로 인해 왕씨 형제는 일순간에 베이징(京城)에서도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고 그들의 사업 또한 베이징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두 형제가 관리하는 점포들의 수가 급속히 증가했고 사무 및 판매량도 급격히 증가됨에 따라 왕씨 형제 집안은 이 지역 최고 갑부이자 명문 가문 중의 하나로 성장하게 되었다. 량두(兩渡)의 허가(何家), 쏸위()의 천가(陳家), 샤먼(夏門)의 량가(梁家)와 함께 링스(靈石)의 왕씨 집안을 포함하여 흔히 수도권의 4대 상인 명문가문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캉시 61(1722), 이미 고희의 나이에 이른 왕쳰서우는 경기(京畿)의 부유한 유지가 되어 황제가 거행하는 ‘천수연(千叟宴)’에 참가한 적도 있다. 이 자리에서 캉시제(康熙帝)는 그에게 용머리 문양이 새겨진 지팡이 하나를 하사했는데, 이 지팡이는 신기(神器)로 간주하게 되어 줄곧 왕씨 가문의 사당에서 봉양되었다. 또한 쳰롱(乾隆) 50(1785)에는 황제가 융()에 왕림하여 왕씨 가문의 왕중지(王中極)에게 ‘황괘() 1점과 ‘은패(銀牌) 1()을 하사하였다. 또한 그는 쟈칭(嘉慶) 원년(1796)에 조정에서 거행된 ‘천수연()’에도 참가하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뤄 보건대, 왕씨 일가는 청나라 조정과도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조정과의 관계가 밀접해지고 가문의 성원들이 관계에 진출함에 따라 왕씨 가문의 출세와 상업적 팽창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왕씨 일가의 사업경영에서 가장 커다란 특징은 이렇게 가문의 성원들이 상인이자 동시에 관리로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보통 왕씨 일가의 성원들은 13-15세 사이에 벼슬을 얻어 관리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한 성원이 관료로서 출세한 이후에는 날로 더 높은 벼슬길을 갈망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이로 인해 상업 활동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왕씨의 자손들은 과거 시험 이외에도 가문의 인맥을 바탕으로 관직을 계승하거나 혹은 돈을 주고 벼슬을 구매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형부(刑部)의 주사(主事)가 되었고, 어떤 이는 호부(戶部)의 랑중()이 되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지부(知府), 지주(知州), 지현(知縣) 등이 되었다. 벼슬을 돈으로 산 것은 왕쳰서우의 아들의 경우가 최초이자 대표적이다. 왕쳰서우는 그의 아들 왕멍졘(王夢簡)을 위해 2000 ()의 백은(白銀)으로 ‘주동가5(州同加五級)’이라는 벼슬을 샀으며 왕멍졘은 나중에 ‘중헌대부(中憲大夫)’으로 제수되기도 했다. 이후 왕씨 일가 중 벼슬을 수여받은 자는 모두 52명으로, 그중에 자정대부(資政大夫: 正二品) 3, 통의대부(通議大夫: 正三品) 3, 태부전경(太仆專卿: 從三品) 3, 중헌대부(中憲大夫: 正四品) 14, 소신교위(昭信校尉: 正四品) 2, 조의대부(朝議大夫: 從四品) 6, 봉정대부(奉政大夫: 正五品) 5, 봉직대부(奉直大夫: 從五品) 4, 유림랑(儒林: 正六品) 7, 수직랑(修職: 正七品) 2명이 있었다. 왕씨 일가가 지낸 가장 높은 벼슬은 18세손 왕컨런(王肯任) 2() 벼슬인데, 그는 호부(戶部) 광서사랑중(廣西司)을 지낸 후 지부가5(知府加五級)에 임용되었으며 후일에는 자정대부(資政大夫)에 제수되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거하면, 캉시, 쳰롱, 쟈칭 세 황제의 재위기간 중 왕씨 일가는 전국적으로 모두 42명의 5-2품의 관원과 101명의 사대부(士大夫)를 배출하였다. 장사와 벼슬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왕씨 일가의 경제적 부유함은 그들이 관직으로 진출하는 평탄한 길을 제공하는 자원으로 활용된 것이다.

 

3 _ 풍부한 가산을 바탕으로 선행과 의로운 일을 행하다

 

상업에서 시작하여 관계로 진출한 왕씨 일가는 가산이 날로 풍부해져 고향 사회의 친지들에 대한 선행과 의로운 일을 많이 행함으로써 지방 백성들로부터도 상당한 칭송을 받았다. 먼저, 왕씨 일가는 종족 내의 노인과 아이를 성심껏 돌보았다. 종족 내의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노약자, 병약자, 장애자들에게 일정 기간 동안 정해진 액수의 지원금을 제공하여 구제하고자 했다. 또한 종족 내의 빈민들에 대해서도 전력을 다해 도움을 제공하였으며 그들이 요구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반드시 들어주었다. 자식이 딸린 과부가 생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에도 그들의 생계를 지원하였고, 종족 내의 어떤 집안이 곤궁에 처해 있는 경우, 종족 구성원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구제해 주었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풍조와 지원 사업은 당시는 물론 이후 후대 사람들에게도 계속 회자되고 칭송되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다음으로, 왕씨 일가는 촌락의 공익사업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예를 들어, 왕스의 13대손 왕줘차이(王佐才)는 바이거우촌(柏溝村)에 의학(義學; 공익 학교)을 창설하고, 20무의 토지를 구입하여 교사들을 도왔다. 15대손 왕멍펑(王夢鵬)은 조부와 부친의 공익사업을 계승하여 의학(義學)을 더 크게 증축하고 한층 더 발전시켰다. 17대손 왕루지(王如璣)는 쳰롱 을묘년에 큰 가뭄이 들자 그의 장남 왕컨(王肯)에게 명하여 지역 사회에 수 천금을 기부하게끔 하였다. 17대손 왕루쿤(王如琨)의 일화 역시 유명하다. 왕루쿤은 쟈칭 연간에 수도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핑딩(平定)이라는 지역을 지나갈 때 ‘동톈먼(東天門)’에 석로(石路)를 건설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는 그 공사가 매주 중요한 것이라 판단하여 서슴없이 은전 1000냥을 공사 기금으로 출연하였다. 그 지역의 관리는 황제에게 이 일을 보고하니, 황제의 얼굴에 기쁨이 만연하여 ‘호선락시(好善樂施: 좋은 일을 보고 베풀기를 즐긴다)’라는 네 글자의 글귀를 하사하였다. 이외에도 왕씨 일가는 촌락 앞의 작은 하천에 네 개의 다리를 건설하였는데 그 다리는 200여 년 동안 사용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으며, 그 다리 주변에는 비각(碑刻)의 형태로 다리에 건립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왕씨 일가는 징성 일대에 세 개의 도로를 닦았는데, 그 중 가장 긴 것은 쳰롱 연간에 수리한 것으로서 그 촌락에서 산시의 동남쪽 일대에까지 상당히 먼 거리에 걸쳐 있다. 이와 함께, 왕씨 일가는 큰 도로 옆에 여관을 짓고 운영하면서 밤길을 지나는 행인들의 투숙과 관련된 걱정과 고통을 해소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편의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일반 백성들이 모두 감격하여 왕씨 일가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4 _ 건축에 정성을 들여 독특한 풍격을 만들어 내다

 

진상(晉商: 산시 상인)을 얘기할 때 반드시 함께 언급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그들의 저택이다. 진상들의 저택은 독특한 풍격, 웅대한 건축규모, 세밀한 조각 및 풍부한 문화 내용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진상이 후대에게 물려준 보배롭고 귀한 유산이자 동시에 전통 시대 진상의 풍채와 휘황찬란함을 거듭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왕씨 일가에 대해 언급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레 웅장하고 거대한 왕자(王者)와 패자(霸者)의 기운이 감도는 왕씨의 저택을 연상하게 된다. 왕씨 일가는 일반적으로 출세한 이후 곧바로 그들의 저택을 조성하였다. 대표적인 저택 중의 하나가 건축 면적이 25,000㎡나 되는 홍먼바오(紅門堡)이라는 명칭의 저택이다. 홍먼바오는 그 자체가 여러 건축물들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밀폐된 구조를 지니고 있는 종합건축물의 행태를 띠고 있다. 그 성문은 매우 높고 크며 성벽은 견고하여, 높은 곳에서 보면 하나의 ‘왕()’ 자가 그 성벽 표면에 새겨져 있는 것 같은 형상을 띠고 있으며, 또한 각 건축물들은 마치 커다란 한 마리 용의 형상을 연상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왕’ 자의 형상이란 가족의 성(), 즉 ‘왕’ 자가 성벽 비탈의 한 면에 볼록 솟아난 형태로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한 것인데, 이는 진정으로 장인 정신에 기반한 독특한 구상이라고 할 만하다. 여기에는 또한 왕씨 일가의 영원한 흥성에 대한 염원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용의 형상을 연상케 하는 건축물들의 배치 구조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촌락의 주민들에 의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해석에 따르면, 높게 솟아 있는 붉은 색의 성문은 용의 머리이고, 동서 양쪽에 지어진 두 개의 단층 건물의 머리에 있는 두 우물은 용의 눈에 해당하며, 성안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큰 길은 용의 몸통이며, 그 길 위에 있는 자갈은 용의 비닐을, 큰 길 양측으로 갈라진 작은 골목들은 용의 발톱을, 그리고 성 뒤쪽의 큰 측백나무는 용의 꼬리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 지역의 갑부인 왕씨 일가가 명문 가문이 되어 가업이 날로 번성하는 과정을 마치 거대한 용이 승천하는 것과 같은 이미지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왕씨 일가가 그 가문의 발전과 함찬 도약에의 의지를 이렇게 용 형상의 건축물 배치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왕씨 저택 중 또 다른 유명한 건축물은 가오쟈야(高家崖) 건축군()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 건축군은 왕씨 일가의 17대손 왕루총(王汝聰)과 왕루청(王汝成) 두 형제가 외지에서 상업과 관직 활동을 하면서 축적한 은전의 이자를 이용하여 건축한 것으로, 쟈칭 원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그로부터 16년 후에야 건축을 완성했다고 한다. 가오쟈야는 홍먼바오과 마찬가지로 황토층의 높은 언덕 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가오쟈야의 건축물들은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고 원() 안에 또 다른 원(), () 안에 또 다른  ()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앞쪽과 뒤쪽의 두 개의 커다란 원()의 구조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왕씨 저택의 건축은 또한 삼조(三雕) 예술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목조(木雕) 창살과 석조(石雕) 편액이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데, 이 장식품들은 이미 그 제작 과정에 문인, 사대부, 화가 등과 같은 전문가들이 개입되었으며 또한 미학적 식견을 지닌 사람의 이론적인 지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 장식예술품들은 품위와 운치가 있고, 대범하고 심오한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토속적인 풍치와 민속적 정감이 충분히 스며들어 있는 것으로 평가되면서, 풍부하고 다채로운 장식예술을 창조해온 중화민족 전통문화의 중요한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왕씨 저택에는 수많은 “길상여의”(吉祥如意: 길하고 상서로움이 뜻과 같다) 도안이 예술적으로 가공되어 건축물 위에 장식되어 있다. 각각의 목조 창문틀에는, 거주자가 굳이 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세상의 온갖 풍경을 음미할 수 있도록, 봉황이 모란을 희롱하고 까치가 매화나무에 앉아 있거나 길게 자란 대나무 그리고 크게 우뚝 솟은 소나무 등의 경치를 그려 넣어 농후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동시에 여러 산수화를 거실 안 곳곳에 배치하여 자연경관과 주인의 기거생활이 긴밀하게 연계되어 하나가 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왕씨 저택의 각 정원 입구의 문미(門楣)와 대청에는 여러 가지의 편액 예술품들이 장식되어 있다. 재질은 크게 목재, 석재, 전돌로 구분되며, 그 내용은 대부분 『易經』, 書』, 『詩經』 및 사서(史書)와 자서(子書)의 내용 중에서 취한 것으로서, 그 어느 한 글자도 내력이 없는 것이 없고 한 가지 일도 그 출처가 없는 것이 없이 모두 고색창연한 예술품이라 하겠다. 각각의 편액조각예술품들은 그 형상에서 생동감이 넘치고 그 수법이 제각기 달라 건축 예술에서의 일종의 화룡점정(龍點睛) 효과를 내고 있다. 이들 심오한 경지의 예술품들로 인해 전체 건축물에는 생동감이 넘치게 되고 거기에 거주하는 주인의 맑고 우아한 안목과 수려한 기품이 한층 배가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입하였습니다.



 

0 comments
작성자 패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