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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8 /2011.04] 기획 _ 전통 중국의 상인(3) 晉商 祁縣의 渠家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4 조회수 93

[Vol.8 /2011.04] 기획 _ 전통 중국의 상인(3) 晉商 祁縣渠家

 

옌훙중(燕紅忠)류청후(劉成虎)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교수 옮김


 

8. 기획1.jpg

진상의 발전사를 들여다 보면 뛰어난 족적을 남긴 100여 개의 상업 가문이 흥망성쇠를 겪었는데, 그 중에서도 치현(祁縣) 성내의 취가(渠家)는 매우 출중한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취가 가문은 치현의  가운데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한 호상거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진상 중에서도 자손대대로 상업에 종사하여 역사가 가장 오래된 상업 명문가의 하나이다. (그림1)

 

 

1 _ 취가 집안의 흥기

 

취가의 본적은 산서성 상탕(上黨) 창즈현(長治縣)에 위치한 취촌(渠村)으로서, 치현 취가의 선조인 취지(渠濟)는 촌에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행상하는 봇짐장수였다. 원말·명초 시기에, 중이(忠義), 중신(忠信)이라 이름 지은 두 아들을 데리고 늘상 창즈현과 치현 사이를 오가며 장사하였다. 상탕 지역에서 나는 루마(潞麻)*와 배 등 이 지역 특산물을 지고 치현으로 가서 판매한 이후, 다시 치현에서 무명천(粗布)과 대추 등을 구입하여 이를 상탕 창즈현으로 가져다 파는 등 적은 밑천을 가지고 장사하여 남긴 이윤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두 지역 사이를 오가며 장사하면서 세월이 꽤 흐르는 사이에 수중에 돈이 제법 모이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치현의 생활환경이 창즈현보다 낫다고 여긴 취지는 명조 홍무(洪武) 2(1369)에 온 집안을 이끌고 치현으로 이사하여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게 되었다. 명이 멸망하고 청조가 흥기하는 동안 집안에 자손이 매우 번성하여 다복하였다. 취가 14대손 취통하이(渠同海)(1723-1789)에 이르러, 상업이 크게 융성하여 치현 성내뿐만 아니라 바오터우(包頭)**에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바오터우에서 10에 이르는 토지를 구입하여 창위안허우(長源厚)를 열고 채소밭을 직접 일구면서 곡식과 차를 거래하였으며, 금융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함으로써 취가 집안의 상거래가 상당한 규모를 갖추는데 중요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취가 상업 가문을 말할 때에도 사실상 치현 성내의 취통하이를 하나의 지파로 간주한다. 취통하이는 창위안허우 상점의 탄생을 기념하여 창위안(長源)은 진촨(晋川)에서 시작되어 만세까지 영화를 계속 누린다(長源本晋川, 榮華萬世年)”의 열 자()16대손 이하 후손(世系)의 항렬자 순서로 정하였다.

 

 

2 _ 취가 상업의 흥성

 

취통하이는 세 아들을 두어 장남을 취판(渠藩), 차남을 취펀(渠汾), 삼자를 취잉황(渠映璜)이라 이름 지었다. 세 아들 가운데 셋째 아들인 취잉황(1758-1832)이 부친의 사업을 물려받아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창위안촨(長源川), 창순촨(長順川)의 양대 찻집(茶庄)을 증설하여 전문적으로 차를 거래하였다. 후난성(湖南省)과 후베이성(湖北省)에서 차를 구입하여 바오터우와 서북지역에서 위탁 판매하였으며, 멀리는 내몽고와 러시아에까지 차를 판매하였다. 취가가 후난성, 후베이성에서 취급한 차는 품종이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품질도 뛰어나 차 수출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취가는 차 무역을 통해 거액의 재물을 끌어 모아 거상 가문으로 발전하였다. 취가의 전설에 따르면, 취잉황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모아둔 은이 무려 120만 량에 이르렀으며, 그의 두 아들인 창파(長發)와 창잉(長瀛)에게 각각 은 60만 량씩을 나누어 물려주었는데, 이것은 취가의 상업이 장족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중요한 밑천이 되었다고 한다.

 

취잉황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창파, 둘째가 창싱(長興), 셋째가 창잉, 넷째가 창공(長公)이었다. 이 가운데 창싱과 창공이 일찍 세상을 떠나, 창파와 창잉이 가업을 이어 취가의 상업을 한층 발전시켰다.

 

취창파(渠長發)(1787-1865)는 자가 사오우(紹武)로서, 부업을 계승하여 30여 년에 걸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상업을 크게 확장하고, 재산도 무려 백은(白銀) 100여 만 량으로 증가시켰으며, 거대한 저택도 짓기 시작하였다. 치현 성내 동다졔(東大街)에 부지를 매입하여 벽돌집을 짓고 기와를 얹은 다음, 계속해서 규모를 확대해 나가 건물과 건물이 끝없이 이어지는 저택을 만들어 나갔다. 더욱이 그 후손들도 줄기차게 상점, 가게들을 매입하거나 신축하여 그야말로 기현 성내에서 취가는 어마어마한 저택을 조성하였다. 이와 같이 엄청난 규모의 저택으로 말미암아 후대 사람들은 취가 일족이 사는 곳을 취반청’(渠半城)이라 불렀다. 취창파는 59세가 되어서야 느지막이 첫째 아들 취위안간(渠源?)을 낳았다. (그림2)


8.기획2.jpg 그림2 8. 기획3.jpg 그림3

 

취창잉(1794-1863)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백은 60만량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상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는 창위안촨 茶庄을 이어받아 수많은 상업도시에 차 도매점(茶庄), 소금 도매점(鹽店), 양곡 도매점(糧行), 비단가게(絲綢店), 금융업(錢庄), 전당포 등 무려 40-50개에 이르는 상점을 개설하였으며, 몸소 창쟝(長江) 유역으로 가 식염을 판매하였다. 식염업을 경영하면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여 당시 진상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호로 성장하였다. 취창잉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위안차오(源潮), 차남이 위안정(源湞)이었다.

 

17대손 위안’()자 항렬 시대가 되면서 자의 글자 뜻에 걸맞게 재부가 크게 쌓이고 장사도 날로 번창하여 바야흐로 취가의 상업은 황금시대로 접어들었다. 취가의 위안자 항렬에 속한 형제들은 모두 선조의 업을 계승하여 재산을 크게 불려 나갔다. 그리하여 독자, 합자경영의 산진위안(三晋源), 창성촨(長盛川), 바이촨통(百川通), 춘이공(存義公) 등 유명한 표호(票號)뿐만 아니라 더욱이 차 도매점, 소금 도매점, 전포(錢鋪), 전당포, 비단(綢緞), 약재(藥材) 등을 취급하는 상점만도 무려 백 여 개에 달하였다. 전국에 걸쳐 개설된 상점과 금융업 분점 및 지점이 백여 개에 이르렀으며, 지배인도 무려 천 명에 달하였다. 취가의 금융자본과 상업자본은 상호 긴밀히 결합되고 어우러져 양쪽 모두에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으며, 이를 통해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를 조성하였다. 취가는 당시 치현의 취, (), 챠오(), () 4대 부호 가운데에서도 첫 번째로 손꼽히는 대족이었으며, 또한 산시성(山西省)8대 상업자본가 가운데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일족이었다. (그림3)

 

 

쉬커(徐珂)는 자신의 저작인 淸稗類?에서 산시에는 부호가 많다라고 하면서, 그 사례로서 치현의 취가가 보유한 자산이 백은 300-400만 량에 달한다고 하는데, 실제 재산은 이보다 훨씬 많다고 지적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취위안정은 살아생전 산진위안 표호의 지하에 은을 저장하기 위한 땅굴을 파 두었는데, 그의 사후 후손들이 이 은 저장고에서 300만 량에 달하는 백은을 찾아냈다고 한다.

 

취가는 수백 년 동안 상업을 영위하면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위에 우뚝 섰으며, 진상 가운데 자손들이 연면히 상업 활동에 종사하여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상업 명문가의 하나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이러한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엄격한 상업 관리제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본점과 분점 사이의 소통 방식과 제도적 장치를 들 수 있다. 본점의 사업 지시와 지점 측의 문의, 확인 등이 모두 일련번호와 날짜를 기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편지를 쓸 경우에는 보안을 위해 암호나 기호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중대한 기밀을 전할 때에는 담당 지배인을 직접 파견하여 구두로 전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정기적 혹은 부정기적으로 상점을 조사하여 업무 상황을 점검하였다. 둘째, 모든 상점의 관련 직원에 대한 내규를 마련해 두었다는 점이다. 상점 내의 직원은 누구라도 작업장에 가족을 대동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계집질이나 도박, 그리고 아편의 흡음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내부 규약은 매우 엄격하여 누구라도 예외 없이 준수해야만 했다.

 

다음으로 인재를 중시하고, 그 사람의 장기에 맞게 적재적소에 기용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취가는 특히 사람을 쓰는 데 매우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소개를 통해서 고용하든 혹은 직접 고용하든,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않았다. 일단 고용한 다음에는 공로금(頂身股)***을 지급하는 등 많은 혜택을 부여하였으며, 돈은 일률적으로 지배인에게 전달한 이후 이에 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단지 결산시에 보고만 하도록 하였다. 경영에 큰 손해가 났을지라도 지배인을 문책하거나 파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위로하고 돈을 주어 사기를 진작하였다. 지배인들은 모두 시장에서 실력 있는 사람들로 충원되었으며, 이들로 하여금 함께 일할 가게의 직원들을 책임지고 선발하도록 하였다. 강한 장수 밑에 약한 병사가 없듯이 취가 상점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인재들로 채워졌다. 예를 들면, 쑤이위안(綏遠)에 있는 창위촨(長裕川) 차 도매점의 분점에는 직원이 6명에 불과하였는데, 즉 지배인 한 사람과 구매를 담당하는 두 사람, 그리고 회계 한 사람, 점내 업무를 보는 한 사람, 서기 한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다른 분점들도 대부분 직원이 5-6명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매우 효율적인 경영 방법을 고안해 냈다. 즉 시장 가격을 관찰하여 시세를 가늠하고, 인력, 물자, 시간 등에서 경제성을 추구함으로써 장사에서 많은 이윤을 남겼다. 항상 다른 사람보다 한 발짝 먼저 착수하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이라도 타당성이 있으면 과감하게 뛰어들었으며, 다른 사람이 막 하기 시작한 일은 더욱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 진전시켰고, 다른 사람이 많은 품을 들여 하는 일이라면 같은 일을 하더라도 더욱 높은 효율성을 추구하였다. 이밖에도 매사에 항상 성심성의를 다하였다. 품질을 보증하였으며, 신용을 가장 중시하였다. 고객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으며, 대량으로 구매하든 소량으로 구매하든 상관없이 성심성의껏 응대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사람에 따라 대응책을 달리하였다. 봄에 외상을 주고 가을에 대금을 회수하였으며, 소수점 이하의 우수리는 받지 않아 손님을 끌어 모았다. 또한 특별한 정보나 경영전략 등을 수시로 주고받았다. (그림4)


 8. 기획4.jpg 그림4

 

마지막으로, 취가는 자제들의 교육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일정한 기반을 닦은 후에는 자제들을 배양하여 과거를 통해 관계로 진출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이를 통해 상인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변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업 활동으로 쌓아 올린 과거의 영화를 확고히 다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말에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화가 전래되어 들어오자, 취가는 수학, 화학, 물리 등의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들 학문이 매우 실용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방면에 뛰어난 스승을 초빙하여 자제들을 가르치도록 함으로써 이들이 장래 더욱 큰 발전을 성취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였다. 이러한 결과 설령 변변치 못한 후손이 태어나더라도 집안을 다스리는 나름대로의 법도를 연면히 유지해 왔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수백 년에 걸쳐 취가의 번영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진상이 몰락해 가던 당시 제슈후가(介休侯家)나 타이구차오가(太谷曹家) 등의 못난 자손들로 말미암아 집안 전체가 몰락에 이르게 된 사실과 비교한다면 취가의 후손들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큰 공로를 세웠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비교적 명성이 있는 사람으로는 저명한 작가인 취촨짠(渠川瓚), 베이징항공·우주대학(北京航空航天大學) 컴퓨터학과 교수인 취촨루(渠川?), 베이징대학(北京大學) 의학원 우생학주임인 취촨옌(渠川琰), 중국인민해방군 군사의학연구원 부연구원 취촨링(渠川玲), 톈진대학(天津大學) 화학과 부교수 취촨진(渠川瑾) 등을 들 수 있다.

 

취가 사람들은 대대로 주택의 건축을 매우 중시하여, 가장 흥성했을 당시에는 기현 성내에 이들의 저택과 정원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를 渠半城이라 불렀으며, 현재까지도 여전히 정원 한 곳과 창위촨 차 도매점(茶庄)을 잘 보존하고 있어, 유명한 진상박물관의 하나가 되었다.

 

 


3 _ 왕부자(旺財主) - 취위안전(渠源禎)

 

취위안전(1842-1920)의 자는 파쥬(筏舟), 호는 롱촨(龍川)이고, 소시적 이름이 왕얼’(旺兒)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왕부자’(旺財主)라 불렀다. 취위안전은 취가 일족 가운데 장사와 이재에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원대한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방년 22세였다. 이 때 형제들과 함께 사는 것도 생각해 보기는 하였지만, 나중에 재산 분규나 끊임없는 시비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여 형과 의논한 끝에 일찌감치 분가하여 각자 자립하여 삶을 모색하기로 결정하였다. 분가하자마자 취위안전은 자신이 맡은 상점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이후 장사에 걸출한 스스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광서(光緖) 6(1880),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외교분쟁이 발생하자, 청조는 쩡궈취안(曾國)駐防樂亭으로 임명하여 동북방을 방비하도록 하였는데, 이 때 취위안전은 막료로 초빙되어 군대에 양식을 대는 일을 전담하였다. 분쟁이 종식된 이후 장기 휴가를 청하여 치현으로 돌아온 이후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상업에만 전념하였다.

 

 

취위안전은 상업이재에 관해서 만큼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철두철미한 스타일로서, 결코 모험을 하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예를 들면, 동치(同治) 연간에 그는 한 집안 사람들과 백은 30만 량을 모집하여 핑야오성(平遙城) 안의 난다졔(南大街)에서 바이촨통(百川通) 표호(票號)를 창설하였다. 머지않아 만주족 사람(旗人)들이 3000만 량이나 되는 거금을 맡기면서 은량만 보관해 준다면 이자는 필요 없다고 전하였다. 이에 힘입어 바이촨통 표호는 어마어마한 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다. 결산할 때마다 주주에 대한 이익 배당이 1만여 량에 달하였으며, 취위안전에게도 매번 10만여 량이나 되는 거금이 배당되었다. 이익 배당금이 가장 많았던 광서 28(1902)의 경우, 주주 한 명에 대한 배당이 무려 2만 량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이익 배당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취위안전이 과감하게 모든 투자금을 일거에 회수하자 상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큰 소동이 벌어졌다. 내로라하는 사람들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였으나, 정작 그는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가 되어서야 그는 그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즉 그는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슬픈 일이 생길 수 있고, 나쁜 것이 끝에 달하면 좋은 일이 올 수도 있다고 하면서, 흥한 것도 반드시 쇠락할 때가 있는 것이니, 장사에도 이득이 있으면 손해도 나기 마련이라고 말하였다. 바이촨통이 맡아 둔 자금은 만주족 사람들의 것인데, 이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니 시간이 흐르다 보면 생떼를 쓰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돈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가 바로 발을 빼야할 시기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정도로 멈추어야지 그때까지 쌓아둔 이윤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큰 손해를 입고 쇠락할 때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과연 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촨통의 장사가 나날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치현에서는 지금까지도 왕부자는 장사가 언제 쇠락할지 헤아리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라는 노래 구절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림5)


 8. 기획5.jpg 그림5

 

취위안전은 형제들과 함께 여러 성에서 전통적인 상점들을 경영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동치 연간에는 30만 량의 현은을 밑천으로 하여 독자적으로 산진위안 표호(票號)를 설립하였으며, 아울러 베이징, 톈진, 상하이(上海), 한커우(漢口), 총칭(重慶) 등의 지역에서도 11개에 달하는 분점 및 지점을 열었다. 가장 번창할 때에는 영업 총액이 무려 600-700만 량에 달하였으며, 주주당 이익의 배당이 6000여 량에 달하였다.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표호가 줄을 이어 도산할 때에도, 오로지 이 표호 만큼은 다더헝(大德恒), 다더통(大德通)과 더불어 1934년까지 영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산진위안 표호(票號)는 영업과 재정상태가 견실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결코 무리하게 경영을 확장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부채를 지지 않고 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기현 사람들은 본전이 어마어마한 다더통, 산진위안의 화얼펑’(畵兒棚), 잘 먹는 춘이공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이 말 속에는 치현의 대표적인 세 표호가 가진 각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챠오씨가 중탕(中堂)에서 경영하고 있던 다더통 표호는 막대한 자본을 가졌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장사를 잘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취가가 다른 사람들과 자본을 함께 투자하여 세운 춘이공 표호는 매사에 격식을 많이 따졌으며, 경영자의 손이 커 직원들에 대한 대우가 좋기로 유명하였다. 산진위안의 화얼펑은 젊은 점원들이 모두 위풍당당하게 잘 생겨 마치 그림 속에 나오는 출중한 미소년과 같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만청 말년에, 전통적인 경영방식을 통해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았으며, 장사에는 도가 텄다던 취위안전도 대청제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자 자신의 저택과 산진위안의 뜰 안에 각각 구덩이를 하나씩 파서 엄청난 재산을 위안바오(元寶)****로 바꾸어 그 안에 묻어 두었다. 백은을 묻어두는 것은 봉건시대에 자본을 보존하던 전통적인 방식으로서, 스스로를 지키고자 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청조가 무너지고 군벌들 사이에 혼전이 끊이지 않으면서 전국에 널리 퍼져있던 산시의 표호, 전장(錢庄)들이 줄을 이어 도산할 때에도, 취위안전이 집 안에 묻어 둔 백은 덕분에 취가의 상업과 표호는 무너지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의 아들 취번챠오(渠本翹)가 이 자금을 근대공업에 투자하고, 열강으로부터 광산을 회수하고 철도를 부설하였으며, 근대적인 신식학교를 창설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취위안전은 천성이 매우 괴팍하였으며, 매사에 지나치게 엄격한 나머지 너그러움이라곤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특히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집 문밖으로 쫓겨나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었다고 하며, 셋째 딸은 34세가 될 때까지 시집을 못 가게 했다고 한다. 그는 하루 종일 집안에 깊이 틀어박혀 나오지 않아 전혀 사교성이 없었으며, 사람들과 왕래가 드물어 툭하면 면전에서 사람을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그를 쳐다만 봐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으며, 집안에는 하루 종일 냉랭한 기운만 흘렀다고 한다.

 

 

 

4 _ 연극광 부자(戱迷財主) - 취위안간(渠源)

 

취가는 자제들의 교육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교육을 중시하던 전통적인 상업 명문가 안에서도 본업에 힘쓰지 않았던 부자가 바로 취위안간(渠源)이었다. 취위안간(1847-1914)의 자는 쏭포(松坡)이고, 바로 취창파의 아들이다. 취창파가 느즈막히 아들을 얻어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하는 일마다 감싸고 돌아 결국 부자집 도련님으로 자라나고 말았다. 장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유희에만 탐닉하였다. 동치 4(1865) 10, 취창파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부친의 유산인 백은 100만 량을 상속받았다. 이 시기가 마침 바야흐로 표호가 발흥하던 참이라 취가 일족 가운데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회다 싶어 상업이윤을 금융자본으로 전환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러한 흐름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돈을 물 쓰듯 하면서 온종일 향락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취위안간은 오로지 유희에만 빠져 헤어나지 못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진극(晋劇)*****을 좋아했으며, 노래도 무척 잘하였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 천금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진극 사상 최초의 직업 극단인 취리위안’(娶梨園)을 운영하였다. 확실히 그는 취가 상업의 계승자로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진극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공로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림6)

 

8. 기획66.PNG


청 동치연간(1862-1874)에는 진극이 비록 초보적인 형식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발전의 여지가 더 많은 단계였으며, 희곡 연출 장면의 배치나 악기의 배열 등도 아직 틀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에 위츠(楡)가 주관하던 극단인 쓰시반’(四喜班)이 진극계에서 명성을 얻고 있기는 하였지만, 취위안간은 이 연극단에 비록 고수들이 많이 모여 있긴 하지만, 곳곳에 유치함이 만연하여 의상이나 악기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극단을 조직하여 취리위안이라 칭하고, 자신의 상점에서 일하던 회계인 왕롄칭(王聯慶)에게 책임을 맡겼다. 그는 극단을 위하는 일이라면 천금도 아끼지 않았으며, 각지에서 이름난 배우를 초빙하였으며, 무대의상은 비단으로 유명한 쑤저우(蘇州) 지역에 맞춤옷을 주문할 정도였다. 그는 취리위안 극단을 상하 두 반으로 나누어, 상반은 연극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개선하고 보다 훌륭한 연출을 위해 연구에 중점을 두도록 하였으며, 하반은 어린 배우들의 연기력을 배양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진극에서 종래 문무 장면을 나누지 않던 것을 문을 왼쪽에 무를 오른쪽에 나누어 각각 배치하도록 고쳤다. 악기는 음역과 음색의 경중에 따라, 주선율을 연주하는 악기와 반주악기로 나누어 재배치하였다. 이를 통해 연주가 배우와 한층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으며, 연출 장면도 더욱 합리적으로 순서를 조정하였다. 취리위안이 처음으로 연출한 <回荊州>는 상연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치현의 부자가 막대한 재산을 출연하여 훌륭한 극단을 운영하고 연극을 공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각 파의 대표적인 뛰어난 배우가 각지로부터 모여들어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며 장기를 겨루니, 공연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탄성을 금하지 못하였다.

 

 

취리위안 공연의 편의를 위해 취위안간은 특별히 저택 뜰 안에 20평방미터에 이르는 무대를 만들어 놓고, 그 양 옆에 있는 사랑채인 동샹(東廂)과 시샹(西廂)의 문 앞에 나무로 만든 칸막이로 장식을 해두어, 칸막이를 젖히면 사랑채에서 무대가 바로 보이도록 해 두었다. 거상이 큰돈을 내어 극단을 만들어 연극을 상연하니, 이를 보려고 구름처럼 모여든 관객들로 하루 종일 떠들썩하였다.

 

 

100여 년 전에 내로라하는 수많은 산시 배우들이 이와 같이 훌륭한 무대 위에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노력들이 세월을 거듭하면서 진극이 점차 성숙단계로 발전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저택 주인의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취리원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상연하였다. <回荊州>, <打金枝>, <忠報國>와 같이 대표적인 진극 이외에, <反裳邑>, <武家坡>, <太君辭朝> 등도 모두 손꼽히는 훌륭한 작품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훌륭한 작품이었다. 이렇게 볼 때, 취리위안은 진극이 새로운 발전 단계로 들어서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5 _ 개명 부상- 취번챠오(渠本翹)

 

취번챠오(渠本翹)는 청대 산시 상인 가운데 근대기업에 투자하여 크게 공헌한 인물로서, 세간에서는 그를 개명 부상이라고 부른다. 취번챠오(1862-1919)는 자가 추난(楚南)이고 원명은 번챠오(本橋)이다. 광서 14(1888)에 과거에서 해원(解元)에 올라 산시성 교육행정장관(學政)의 눈에 들어, 당시 교육행정장관이던 뤼루이톈(呂瑞田)이 그의 이름을 本橋에서 本翹로 고쳤다. 광서 18(1892)에 진사가 되어 내각 중서(中書)를 역임하였으며, 다시 외교부 사원(司員)의 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요코하마 영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귀국한 이후에는 산시대학(山西大學) 당감독(堂監督)으로 임명되었다. 광서 30(1904), 산시에서 애국보진광무운동(愛國保晋鑛務運動)이 거세게 전개되자, 취번챠오는 잉푸공사(英福公司)로부터 광산채굴권을 회수하기 위한 투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광산채굴권을 조속히 회수하기 위해 그는 자발적으로 산시 각 표호로부터 광권을 매입하기 위한 제1기 자금으로 은 150만 량을 모집하여 잉푸공사로 하여금 산시 핑딩(平定) 등 지역의 석탄, 철광 채굴권을 기한 내에 반환하도록 촉구하였다. 광서 33(1907) 산시바오진광업유한공사(山西保晋鑛務有限公司)가 설립되자 그는 이 회사의 총 책임자(또는 지배인)로 임명되었다. 애국보광운동이 전개될 당시 그가 보여준 헌신적인 노력으로 말미암아 청조는 그를 삼품 경당후보’(三品京唐候補)로 임명하였다. 선통(宣統) 2(1910) 취번챠오는 뎬리위안(典禮院) 직학사(直學士)에 제수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는 취학사(渠學士)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산시 정계와 상업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림7)


 8. 기획7.PNG

 

취번챠오는 산시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활동했던 민족자본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광서 28(1902), 산시성 상무국(商務局)이 진성성냥공사(晋升火柴公司)를 창설하였으나, 봉건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기풍이 지나치게 농후하였으며, 여기에서 생산된 제품의 품질도 좋지 않아 판로가 막히고 결손이 누적되었다. 광서 28(1902) 양번챠오는 5000량의 백은을 가지고 이 회사를 인수한 이후, 동향인인 챠오위팅(喬雨亭)을 동업자로 삼아 합자 형식으로 18000원에 달하는 백은을 자본으로 받아들여 이 회사를 솽푸성냥공사(雙福火柴公司)로 개조하였다. 종래의 관판공업이 이를 전기로 민족공업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게 된 것이다. 솽푸성냥공사 취, 챠오 두 사람에 대한 이익 배당으로 무려 40銀元을 지급하였다. 이후 솽푸성냥공사는 외국자본의 침입으로 인한 압박과 내전, 그리고 ?의 가치 하락 등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생산과 소비가 모두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옌시산(閻錫山)의 관료자본에 의해 병탄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서 민족자본 공업을 창설한 그의 공로가 퇴색될 수는 없을 것이다.

 

취번챠오는 표호의 개혁에도 일가견이 있어, 진상 표호의 개혁을 추장한 창시자 가운데 하나였다. 광서 34(1908) 광서제, 서태후가 연이어 세상을 뜨자 은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중국 금융시장에서 외국은행이 큰 파란을 일으키면서 산시 각 표호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당시 산시 웨이펑휴(蔚豊厚) 표장(票庄)의 베이징지점 지배인 리홍링(李宏齡)과 취번챠오는 개혁이라는 취지에서 의기 투합하여 함께 산시 표호를 개혁하여 산시외환은행(山西匯業銀行)을 창설하는 방안에 합의하였다. 취번챠오는 몸소 핑야오(平遙)에 있는 본점으로 가서 산시 표호를 개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본점 지배인의 안목이 모자라 도리어 리홍링 등이 이 기회를 틈타 본점 지배인을 몰아내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 한다고 무고하였다._정확한 의미를 모르겠음 그 결과 시대의 대세이며, 또한 리홍링과 취번챠오가 추진하려 했던 표호 개혁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취번챠오가 비록 장사하는 상인이기는 하나 옳은 일에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기개를 지니고 있었다. 우창봉기(武昌起義)가 발발한 이후 산시 정국에 소용돌이가 휘몰아치자 청조는 그의 명성을 빌어 산시에서의 통치의 명맥을 보존하려는 의도에서 그에게 산시 선위사(山西宣慰使)의 직책을 하사하였으나, 그는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袁世凱)가 혁명의 성과를 탈취하고 나서 역시 적극적으로 손을 뻗어 취번챠오를 끌어들이기 위해 참정(參政)의 직위를 하사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이를 고사하였다. 이후 취번챠오는 톈진에서 내내 칩거하여 외부의 일에 관여하지 않다가 그 곳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등졌다.

 

 

* 산서성에서 생산되는 대마(大麻)의 일종

 

 

**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에 있는 도시 이름

 

 

*** 결산 이후 이익금을 배당하는 것

 

 

**** ·청시기에 사용하던 화폐의 한 종류, 말굽 모양으로 되어 말굽은 이라고도 부르며, 무게가 약 50량 정도 되었음

 

 

***** 산시성의 전통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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