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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7 /2011.03] 관행기행 _ 상하이(上海)와 안후이성(安徽省) 허페이(合肥)로의 여행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4 조회수 75

[Vol.7 /2011.03] 관행기행 _ 상하이(上海)와 안후이성(安徽省) 허페이(合肥)로의 여행

 

손승희 _ 인천대학교 HK연구교수

 

 

지난 15, 연말에 내린 눈으로 온통 설국으로 변해버린 서울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올 겨울 상하이도 무척 추웠다. 필자가 머무는 동안 최저기온 영하1-2도의 상태가 계속되었다. 습도가 높고 특별히 난방시설을 갖추지 않는 상하이 가옥의 특성상 체감온도는 더 낮게 느껴졌다. 반년 만에 다시 찾은 상하이였지만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었고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의 모습을 체감할 수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상하이는 공사 중이라고 할 만큼 시내 곳곳은 공사 천막으로 둘러져 있었고, ‘착한시민들은 공사현장을 피해 이리저리 돌아야 했다. 그런데 상하이 엑스포 개최의 영향이었는지 거리는 이미 말끔히 단장되어 있었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경쾌해 보였다. 중국의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의 도약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중국 사람들은 미국에 대해서도 당당해지고 있는 중국의 국제적 위상에 흡족해하는 듯 보였다. 전통과 현대의 단절이 빚어낸 문화의 공백은 어설픈 서구의 모방이 아니라 중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문화 콘텐츠로 채워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공기관 안내원들의 미소 띤 얼굴과 친절한 태도에서는 공공 서비스 개념이 확실히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남을 배려하는 시민의식도 성장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1 참고)


7.관행기행 1.jpg 그림1 7. 관행기행 2.jpg 그림2

 

이번 상하이 여행은 필자에게 사업단의 특별한 미션이 주어져 있었다. 사업단의 연구사업 수행을 위해 현지 도서관에서 문헌조사를 하는 것과 안후이성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을 방문하여 협력체제 구축을 타진하는 일이었다.


 

우선 상하이당안관(案館)을 방문했다. 상하이당안관은 이전에 시엔샤루(仙霞路)에 있다가 와이탄(外灘)으로 옮겨온 지 꽤 되었다. 아니 사실 시엔샤루에는 여전히 당안관이 있지만 와이탄 분관을 만들어 열람 장소로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난징동루(南京東路)에서 지하철을 내리자 깔끔하게 정돈된 차 없는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난징동루는 화려했던 민국시기의 옛 명성을 찾으려는 듯 어딘지 모를 고풍스러움과 현대적인 멋이 어우러져 활기찬 모습을 띠고 있었다. 문득 한 번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상하이당안관을 향해 반대편으로 좀 걷다보니 와이탄에 도착했다. 와이탄 앞을 가로막아 황포강의 미관을 해치던 옌안(延安) 고가도로의 내리막길이 이미 철거되어 있었다. 이는 와이탄을 아시아 第一灣으로 만들기 위한 교통종합개조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와이탄 주변을 녹화하여 아시아 최고의 아름다운 환경을 조성하고 지하통로를 건설하여 교통난을 해소하겠다는 와이탄에 대한 대수술 계획이다. 중국도 이젠 도시 미관과 녹화에 부쩍 신경을 쓰는 것 같다. 황량한 도시 상하이가 역사와 문화, 그리고 황포강의 아름다움에 푸르름까지 더해서 몇 년 후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것 같다. (그림2 참고)

 

 

상하이당안관에 들어서자 깨끗한 열람실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마다 컴퓨터가 비치되어 있고 상당히 쾌적한 환경을 갖추어 놓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황포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동방명주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열람환경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상하이당안관은 많은 자료들을 원문으로 검색하고 출력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일부 당안들은 마이크로필름화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열람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출력 역시 열람자가 스스로 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직원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서고는 그대로 시엔샤루(仙霞路)에 있고 일부는 상하이 외곽의 서산(?)에 있다고 한다. 따라서 원문 서비스가 안 되는 문건은 대출 신청을 하면 대출이 가능한데, 하루에 4차례 시간을 정해놓고 신청을 받아 문건들을 차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시엔샤루에서 와이탄까지 차가 막히지 않아도 족히 30분은 걸리는 그 길을 매일 그렇게 실어 나른다는 것이 대단한 발상처럼 보였다. 장소확보 문제 때문에 선택한 고육지책이었겠지만 중국 사람들에겐 못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3)

 

7.관행기행3.jpg 그림3

 

원문이 제공되는 경우 출력을 하고자 할 때는 컴퓨터에서 몇 쪽부터 몇 쪽을 체크하면 신청이 된다. 그러나 출력은 반드시 직원의 손을 거쳐서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신청서를 손으로 작성해서 제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또 복사 신청을 오후 늦게 할 경우 당 일 찾아갈 수 없다는 불편한 점도 있었다. 원문 제공 당안인 경우 출력은 1장당 1.5위안()을 받고 있었다. 당안관의 자료는 주로 상하이지역의 당안이 많았다. 자료는 민국시기 잡지에 발표된 논문이 있는가 하면 각종 계약문서나 상하이 정부기관과 각 단위가 주고받은 공문, 보고서 등이 있었다. 어떤 경우는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 손으로 쓴 회의일지 등이 남아 있어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상하이당안관보다는 필자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이용하게 되는 곳이 상하이도서관이다. 상하이도서관은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와 가오안루(高安路)가 만나는 곳에 있다. 근처의 헝산루(衡山路)에는 이국적인 카페와 식당들이 즐비하고, 무엇보다 헝산루는 필자가 아는 한 상하이 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수길이다. 상하이도서관에 올 때는 뜻하지 않는 그런 즐거움도 있다. 상하이도서관은 늘 활기로 가득하다. 상하이 시민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 있기 때문인 듯하다. 특별 전시회며 강연, 독자와의 만남 등 상하이 시민을 위한 프로그램이 하루가 멀다 하고 기획되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인 듯하다.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이 서초동의 한적한 마뉘꿀고개에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상하이도서관은 방학 때면 자녀를 데리고 와서 현장학습을 하는 부모들로 붐볐고 다소 소란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올해는 아직 방학을 하지 않은 탓인지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상하이도서관은 교통도 상당히 편리하다. 작년부터 지하철 10호선이 개통되어 접근도가 훨씬 좋아졌다(지하철 입구에서 나오면 바로 도서관정문이다). 필자가 처음 상하이에 왔던 1998년에는 지하철이 1호선밖에 없었는데 12년 동안 지하철이 10호선까지 개통된 것이다. 특히 10호선은 필자에게는 그야말로 황금노선이었다. 水城路(古北:구베이), 交通대학, 상하이도서관, 新天地, 老西門, 豫園, 南京東路, 同濟대학, 復旦대학, 五角場 등 필자의 상하이에서의 동선과 절묘하게 일치하고 홍차오(虹橋) 공항과 홍차오 기차역에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4)

 

7. 관행기행4.jpg 그림4

 

상하이도서관에 오면 민국시기의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근대문헌열람실을 주로 이용하게 된다. 이곳에선 민국시기 신문이나 잡지를 마이크로필름화 하는 작업이 몇 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어 많은 잡지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열람할 수 있다. 그런데 상하이도서관 근대문헌열람실은 방학이면 전국, 아니 전세계의 연구자들이 이용하는 곳이기 때문에 마이크로필름 기계가 항상 부족했다. 이번에는 춘제(春節)가 코앞에 있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많지 않아 그나마 한산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작년 여름에 왔을 때는 도서관이 개관하자마자 5분 내로 좌석이 다 차서 마치 방석게임을 하는 것 같은 진풍경이 벌어졌었다.(기계가 한 8대쯤 있는데 한 두 대는 늘 고장상태이다) 한번 자리를 놓치면 하루 종일 기다린다 해도 자리가 난다는 보장은 없었다. 좌석이 없어 마이크로필름을 열람할 수 없는 사람에겐 다음 날 좌석을 예약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9시 이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서 말이다(개관은 8시 반이다).

 

 

근대문헌열람실에는 몇 년 전부터 민국시기 잡지나 도서의 원문 서비스를 하고 있다. 그러나 검색 가능한 모든 자료가 원문 검색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략 4,50% 정도가 원문이 제공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상하이도서관은 민국시기 잡지나 도서의 원문 검색이라는 첨단 시스템을 갖추어 놓고도 출력할 때만 되면 마치 18세기쯤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직원의 얘기는 출력할 도서나 논문의 제목을 종이에 써서 제출을 하면 자신들이 출력을 해 준다는 것이다.(인건비를 챙겨야 하기 때문인 듯하다) 클릭 한번이면 해결될 문제를 한 두 편도 아닌 논문의 제목을 일일이 종이에 쓰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투덜거리며 겨우 논문 제목을 건네주었더니 머리가 허연 노직원이 컴퓨터 자판에 머리를 박고 독수리 타법으로 한 자 한 자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시간이 마냥 소요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성의 없이 갈겨쓴 필자의 글씨 때문에 자꾸 무슨 글자인지 물으러 온다. 필자가 그를 대신해서 출력을 하는 것이 백번 나았다. 논문 제목을 일일이 입력하지 않고 직원의 컴퓨터에서 검색어를 입력해주었더니 논문 목록이 한눈에 드러났다. 노직원은 그런 방법도 있었냐는 듯이 허허허웃으며 좋아라 했다. 출력비는 한 장에 1위안을 받고 있었다. (그림5)


7. 관행기행5.jpg 그림5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목록은 검색이 되지만 원문 제공이 되지 않는 자료나 도서 때문이었다. 원문검색에서 제공된 색인번호를 가지고 도서 대출을 신청했더니 시스템이 달라 그 번호로는 도서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도서 대출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색인카드를 뒤적여야 했다. 상하이도서관 전체 검색, 직원용 검색, 원문검색, 색인카드······. 상하이도서관에는 도대체 몇 개의 검색시스템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또 조건이 있었다. 검색에서 제공되는 도서의 대출은 소개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형식의 소개서인지 직원에게 자세하게 물으니 직원은 필자에게 어떤 일본 연구자가 제시했다는 소개서를 보여주었다. 살펴보니 재직을 증명한다는 내용과 어떤 연구에 어떤 자료를 조사할 것인지에 대한 간단한 연구계획서였다. 자료를 디지털화 하면서 전에 없던 절차가 하나 더 생긴 것 같다. 미처 그런 문서를 준비해가지 못한 필자는 번번이 자료대출에서 퇴자를 맞았고, 다음날은 사업단의 연구계획서를 보여주고 도서를 대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 대출 신청을 한다고 해도 자료가 필자의 손에 무사히 전해지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잡지들이 많이 손상되어 있기 때문에 대출을 해주지 않거나 대출이 되어도 복사를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상하이도서관에 유일하게 한 대 있는 마이크로필름 전용 복사기가 고장이 나서 복사가 불가능 했다는 사실이다. 처음 갔을 때 복사기가 고장 났다고 해서 2주 후에 다시 신청을 하려 했더니 여전히 고장 난 상태였다. 2주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안 고쳤냐고 볼멘소리를 했더니 2주는 고사하고 고장이 난지 두 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언제쯤 고칠거냐는 질문에 젊은 여직원은 아마 춘제 전에는 절대로 안 고칠 걸!” 이라고 했다. 천하태평 무사안일주의의 병폐를 중국인 스스로 비아냥거리고 있는 듯했다. 다 찾은 자료를 눈앞에 두고 복사도 못하고 덮어야 했던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근대문헌열람실 시스템은 2%가 아니라 한 20%쯤 부족해 보였다.

 

 

상하이도서관에는 족보 열람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에는17,000여종, 110,000의 족보가 있는데 335개 성씨의 족보가 있다고 한다. 일단 지역별로 검색을 해보았더니 江蘇, 安徽, 湖南省의 족보가 가장 많고 上海, 江西, 福建, 湖北, 廣東, 河南, 四川, 山東, 河北 등 전국적인 규모였다. 족보도 원문검색이 되기는 하는데 그 양은 20%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원문검색이 안 되는 족보는 대출 신청을 해서 볼 수 있었다. 복사비는 판본에 따라 다른데 명·청시기의 것은 1장에 5위안, 手稿本1장당 4위안, 일반적인 것은 2위안이라고 했다. 족보 한 권의 양은 많게는 2,000장 이상이기도 하고 적어도 4-50장은 넘었다. 족보열람실에서는 복사는 하지 않고 우선 이미 출판된 족보나 열람 상황을 파악하는 것에 주력했다.

 

 

또 하나 이번 여행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현지 연구기관과 협력체제 구축을 위해 안후이성 사회과학원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먼저 아는 선생님을 통해 안후이성 사회과학원에 연락을 취하고 사업단의 연구계획서 중문 간략본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직접 통화하라는 연락을 받고 안후이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과 약속 날짜를 잡았다. 하지만 춘제가 다가오는지라 필자도 차표 걱정에 중국 사람마냥 초조해졌다. 춘제에는 인터넷 예매가 되지 않기 때문에 매표소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춘제가 보름이나 남은 시점이었는데도 한 40분 정도 줄을 서서 겨우 안후이성 허페이(合肥)로 가는 열차표를 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원래 가고자 했던 시간은 이미 매진된 상태여서 한 시간 반이나 앞선 표를 구했다. 왕복 열차표를 확보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당일 아침 일찍 홍차오 기차역에 나갔다. 새로 지어진 홍차오 기차역은 홍차오 공항 옆이기 때문에 교통은 편리했다. 깔끔하게 지어진 넓은 건물에 간이 의자가 널찍하게 놓여 있었지만 사람들로 이미 꽉 차 있었다. 구석구석마다 삼삼오오 커다란 짐에 기대어 바닥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농민공(農民工)들의 모습도 보였다.

 

 

동처(動車)’라고 불리는 열차의 내부는 깨끗했다. 예전에 탔던 기차와는 분위기도 달랐다. 처음 중국에 왔을 때의 그 칙칙함과 무거움이 없었다. 사람들의 차림새는 깔끔했고 산뜻했다. 기차 안도 시끄럽지 않았다. 요즘 지하철을 타 보아도 예전 같이 남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는 시끄러운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민망할 정도로 남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들도 없다. 여전히 모여 앉아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열차는 의외로 빨랐다. 쑤저우(蘇州)를 불과 30분 만에 돌파하고 우시(無錫)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난징(南京)까지는 2시간 20분 정도 소요된 것 같다. 차창 밖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고, 준비해 간 샌드위치로 아침 요기를 하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기분은 꽤 좋았다. 3시간 반 만에 안후이성 성도 허페이에 도착했다. 눈이 제법 많이 내리고 있었고 축축한 날씨에 도로가 눈으로 살짝 덮여 있어 상당히 미끄러웠다. 역전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도로는 차로 꽉 막혀 있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역전의 풍경이었다. 역에 도착한 후 택시를 타고 한 30분 정도를 달려 안후이성 사회과학원에 도착했다.

 

 

상하이시 사회과학원 정도를 상상했던 필자는 다소 낡고 어두운 건물에 살짝 실망스러웠다.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온기하나 없는 거대한 냉장고 같은 싸늘함이 확 느껴졌다. 안후이성 사회과학원 속에는 역사연구소를 비롯한 10개의 연구소와江淮論壇잡지사,安徽史學편집부가 있었다. 역사연구소 소장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연구원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더니 역사연구소 인원 10명 중에 7명이 참석했다. 갑자기 대회의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우선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사업단 상황과 연구내용 및 핵심과제 등을 대략적으로 설명한 후 그쪽 상황에 대해 들었다. 그런 다음 자유롭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필자는 역사연구소의 인적상황, 국내외 학술활동, 소장 자료, 출판 상황 등에 대해 전반적인 질문을 했다. 그들도 한국의 중국사 연구 상황과 우리 사업단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는데 그들 나름대로 사업단을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한 절차였던 것 같다. (그림6)


7. 관행기행6.jpg

 

 

안후이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는 중국 역사 잡지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安徽史學의 발간사이다. 소속 연구자들은 주로 안후이 지역사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구체적인 분야는 종족 연구, 가족사, 기업사, 지역 인물 연구, 역사지리, 사학이론 등이라고 했다. 필자는 우리 사업단과 역사연구소의 협력 방법으로 학술 교류는 물론이고 공동연구의 기획이나 자료수집, 조사연구 용역까지 여러 가능성을 제시했고 그들도 여기에 수긍했다. 그들은 우리 사업단측에서 구체적으로 협력 방안을 제시하고 논의를 시작한다면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올해 우리 사업단이 개최하는 국제학술대회의 초청에도 흔쾌히 응해주었다. 필자는 이번 만남을 통해 사업단 연구 주제와 관련된 유용한 정보들을 들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새로운 연구자들을 알게 되어 기뻤다. 다시 연락을 하기로 하고 사회과학원을 나섰다. (그림7)

 

 7. 관행기행7.jpg

사업단 차원에서 아직은 안휘성 사회과학원과의 협력체제를 전체 사업단의 아젠다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 사업단이 이미 추진하고 있는 다른 연구기관과의 협력체제와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향후 사업단 전체 아젠다 속에서 각 연차별 주제가 세분화되고 구체화 된다면 안후이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와의 지속적인 인적교류나 협력체제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바탕으로 사업단의 연구와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목표했던 바에 한 걸음 성큼 다가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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