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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7 /2011.03] 논단 _ 좋은 지도자의 조건: 당태종(唐太宗)과 위징(魏徵)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4 조회수 57

[Vol.7 /2011.03] 논단 _ 좋은 지도자의 조건: 당태종(唐太宗)과 위징(魏徵)

 

안치영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좋은 지도자의 출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필부나 영웅호걸 모두가 원하는 바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좋은 지도자는 성군(聖君)이다. 성군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대체로 성세(盛世)를 연 군주라고 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가 있지만 유사 이래로 성세는 그렇게 길지 않았고, 그렇게 많은 제왕이 있었지만 성군으로 불리는 사람은 손꼽힐 정도다. 동아시아 문화에서 성군의 모범을 요순(堯舜)에서 찾고는 있지만 너무 아득하여 그 실체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림1,2 참고)

 

 논단1.1.jpg 그림1 논단1.2.jpg 그림2

 

장구한 중국사에서 성세는 문경지치(文景之治)’로 불리는 전한(前漢)의 문제(文帝), 경제(景帝) 시기, ‘정관지치(貞觀之治)’로 불리는 당나라 태종 연간, 그리고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에서 건륭제(乾隆帝)까지의 강건성세(康乾盛世)’ 정도이다. 이들 성세를 이끌었던 성군들 중 누구 하나 비범하지 않고 매력적이지 않은 인물이 없지만 당태종만큼 극적인 인물도 없을 것이다.

 

당 태종은 중국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세계 제국 당의 전성기를 연 중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이다. 그렇지만 당태종, 인간 이세민(李世民)은 천하의 패륜아였다. 제위에 오르기 위해 이세민은 현무문(玄武門)에서 태자였던 형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을 살해하고 아비를 겁박했다. 뿐만 아니라 이세민은 동생 원길의 부인을 후궁으로 들어앉히기까지 했다.* 황제가 하늘의 아들(天子)’로 범인을 규율하는 인의도덕의 구속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만하면 인의도덕이 사라진 정도가 아니라 수양제(隋煬帝)나 연산군에 뒤지지 않는 폭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륜아 이세민이 어떻게 중국 역사상의 가장 위대한 성군이 되었을까?

 

타고난 정치가로서 이세민의 자질은 패륜의 그 순간에 드러났다.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킨 명분은 건성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건성은 태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세력과 야욕을 가진 동생 진왕(秦王) 이세민을 주살해야 한다는 막료 위징의 충언을 받아들이기를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일의 발단은 위징에게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위징을 잡은 이세민은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듯 왜 형제를 이간질 시켰느냐고 질책한다. 이에 위징은 태연히 태자가 자기의 말을 들었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답한다. 그 말을 듣자 이세민은 위징이 보통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위징을 자신의 언관(諫議大夫)으로 임명한다. 이세민의 입장에서 위징은 그야말로 철천지원수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인물됨을 보고 제국을 함께 경략할 중책을 맡겼던 것이다.

 

 

어느 대통령이 인사가 만사라고 했지만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란 실로 그렇게 쉽지 않다. 좋은 정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재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비(劉備)는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고 조조(曹操)가 진궁(陳宮)을 베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은 모두 인재를 아꼈기 때문이다. 천하를 다투는 자든 세상을 다스리려는 자든 모두에게 사람을 잘 골라서 쓰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림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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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거기까지였다면 이세민은 괜찮은 황제였을지는 모르나 성군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태종은 위징은 나의 뜻에 반하여 직설적으로 간하여 내가 잘못된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를 중용한 것이다라고 했다(태종과 위징의 대화는 정관정요(貞觀政要)). 위징이 병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했을 때에도 태종은 황금이 광석일 때 거기서 어떻게 귀함을 볼 수가 있겠는가? 유능한 장인이 단련하고 가공해야만 보석이 되지 않는가. 나는 단련이 되지 않은 광석이며 그대는 유능한 장인인데 어찌 떠나려고 하는가?”며 만류하여 위징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곁에 둔다. 또한 위징의 사후 태종은 위징이 죽은 후 내가 잘못을 범해도 누구도 말하지 않는데, 내가 잘못이 없기 때문이며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모두 옳다는 말인가? 그것은 백관들이 모두 순종하면서 역린(逆鱗)을 저촉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며 한탄한다.

 

 

위징은 죽을 때까지 태종의 과오를 주저 없이 비판했고 태종은 역린을 저촉하는 그러한 비판을 용인했던 것이다. “폐하께서제가 간하도록 이끌어 감히 직언을 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찌 감히 역린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위징의 대답처럼, 태종은 자신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기꺼이 듣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충언이 귀에 거슬리고 듣기 좋은 아첨이 결국 자신을 망친다는 것을 모르는 지도자가 없지만 아첨꾼이 득세하는 것은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설사 기꺼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듣는 지도자도 껄끄러운 비판자를 오래도록 용인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물며 만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천하를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삼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항상 의구심에 가득 차 있는 하늘의 아들에게는 역린을 거스르는 비판자가 있기도 어려울뿐더러 설사 있더라도 오래도록 용납하는 일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태종에게는 위징이 있었고 위징을 평생 용납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태종이 타고난 성인군자라 귀에 거슬리는 말에도 화가 치밀지 않았기 때문이라거나 타고난 분별력을 가졌기 때문인 것은 아니었다. 태종은 위징의 사후 위징의 초상을 보고 통곡을 하고 직접 비문을 써 주었지만, 위징이 역적들의 패거리이자 자신의 이름만을 남기려고 한 자라는 모함을 듣고 비석을 부수게 했다. 위징의 비석을 부수게 했던 태종은 고구려원정 실패 후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이번 원정을 떠나지 않았을 것을”(新唐書魏徵列傳)하고 후회하며 다시 위징의 비석을 세우게 했다.

 

 

 

위징의 사후 태종이 이랬다저랬다 한 것은 모든 황제가 가진 신하에 대한 의구심과 더불어 위징의 간언에 대한 억눌려 있던 분노가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직언이 필요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지만 그것이 불편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재삼재사 인내하며 자신의 제국의 안녕을 위해 귀에 거슬리는 간언을 용인했던 것이다.


 

1990년대 중국에서 삼협댐 건설을 결정한 후 건설 책임자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삼협댐 건설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댐 건설의 비판자들이었다. 그들의 비판으로 인하여 예상될 수 있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비판이 귀에 거슬리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비판만큼이나 문제를 잘 드러내어 해결의 길을 여는 약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릇 남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려는 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우선 귀에 거슬리는 비판에 귀를 여는 인내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인내력이 자칫 패륜의 황제로 남았을 이세민을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만든 비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즘 같이 인사에 말이 많고 불통이니 소통이니 왈가왈부하는 시절에는 원수임에도 인재를 등용하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인내했던 당 태종 이세민의 지혜가 새삼스럽다. 패거리들만 자리에 앉히고 귀를 닫는 것은 결국 무엇보다도 우선 자신을 망친다는 자명한 역사의 교훈이 여전히 책 속의 이야기로만 여겨지는 듯하여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다.


 

* 이것은 수당의 지배계급인 관롱집단(關朧集團)이 전통 한인(漢人)들이 아니라 위진남북조시기 남하한 유목민족들로 유목적 습속을 계승한 것과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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