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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 /2011.02] 관행기행 _중관촌 역사 기행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4 조회수 94

[Vol.6 /2011.02] 관행기행 _중관촌 역사 기행

 

장호준 _ 인천대학교 HK연구교수


6. 관련기행1.jpg 그림1      6. 관련기행2.jpg  그림2

 

중관촌(中關村)”은 흔히 중국의 실리콘 밸리라 불린다. 1980년대 초반까지 중관촌은 현재의 중관촌대로(中關村大街)와 북사환로(北四還路)의 교차 지점 북동쪽 일대의 좁은 지역을 지칭하는 지명에 지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인근 지역에 과학기술을 개발/응용하는 기업들이 생겨나고 1990년대에 걸쳐 이 지역이 화북(華北)지방 정보기술(IT) 산업의 거점으로 발전함에 따라, “중관촌이라는 세 글자가 가리키는 지리적 범위는 물론 이 지명의 사회문화적 함의 또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림1 참고)


중관촌은 지리적으로, 좁게는 하이룽(海龍) 전자상가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1980년대의 전자거리(電子一條街)” 또는 1990년대의 컴퓨터거리(電腦一條街)”로 불렸던 지역을, 그리고 넓게는 창핑(昌平), 통저우(通州) 등 북경시 이외의 일부 지역까지를 아우르는 중관촌국가자주창신시범구(國家自主創新示範區)라는 경제특구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와 함께, “중국의 실리콘 밸리라는 별명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중관촌은 단순한 지명을 넘어, 중국의 신경제를 선도하는 첨단기술 산업의 대명사이자 과학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한 장밋빛 미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림2 참고)

 


중관촌의 역사는 따라서 다음과 같은 이중의 과정이 중첩되는 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a) 지명으로서의 중관촌이 가리키는 지리적 외연이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온 과정과 (b) 단순한 지명이었던 중관촌이 중국의 현대성과 세계성의 상징으로 전화하게 된 과정. 이 글에서는 전자, 즉 중관촌의 지리적 팽창의 역사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이 과정은 중관촌 지명의 변천 과정을 그 계기로 포함하고 있으므로, 먼저 이 지명의 유래를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북경의 지방사학가들은 중관촌이라는 명칭이 중관(中官; 환관)”과 관련되어 있다고 추정한다. 좁은 의미의 지명으로서의 중관촌이 위치해 있는 해전구(海澱區)에는 명대(明代)에는 사찰이, 청대(淸代)에는 황가(皇家)의 임시 거처와 정원이 축조되었는데, 특히 청대의 시설물들은 모두 환관의 내조와 관리를 필요로 하였다. 청대(淸代)에 들어서는 환관이, 특히 민간에서는, 라오공(老公)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중관이라는 명칭 역시 청조(淸朝)가 몰락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고위 환관들은 주로 토지를 녹봉(祿俸)으로 지급받았고, 이 녹지(祿地)는 대부분 현재의 해전구 일대에 집중되었다. 자손을 생산할 수 없었던 환관들이 그들의 녹지와 무덤, 사당(祠堂) 등을 사후(死後)에 관리해 줄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청대 말엽 이래 이 지역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관행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관촌 지명의 유래를 엿볼 수 있는 청대 말엽의 기록물들은 현재의 중관촌 일대를 지금과 같이 中關으로 표기하지 않고 中官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현재의 중관촌과 같은 한자로서의 中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기록물은 중화민국 수립 직후인 1912-15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당시 이 지역은 북경 서북부 지역의 상업적 중심지였던 하이뎬(海澱)과 북부의 행정 중심지였던 칭허(淸河)의 중간 길목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중화민국 건설 이후 이곳 중간 지점에 임시 군사 관문이 설치되고 운용되었다. 이 시기에 작성된 군사 관련 문서와 지도에서는 中關이라는 명칭이 다른 명칭들에 비해 더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으나, 이 시기 이후의 기록물에는 中關이외에 中官,” “鐘關,” “中灣등의 명칭들이 더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명칭들의 관계에 대한 학자들간의 견해는 서로 엇갈린다. 1912-1915년간에 이미 中關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고 나머지 명칭은 민간적 변형에 불과할 뿐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中關이라는 지명은 실제 검문소의 명칭이 아니라 근대적인 군사관할 기구가 당시 민간에서 쓰이던 中官을 인위적으로 아화(雅化)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림3 참고)


 6.관련기행3.gif 그림3  6.관련기행4.gif그림4


중관의 형성에 대한 논의 역시 일치된 견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혹자는 신중국 수립을 전후하여 이 지역에 사람들의 거주 및 왕래가 빈번해짐에 따라 그 당시 이미 표준화된 지명 中關에 자연스럽게 접미어 이 추가되었다고 보는 반면, 혹자는 이 무덤 지역이 부분적으로 농지로 사용됨에 따라 中官墳中官屯등으로도 불렸고 신중국 수립을 전후해서 촌락의 형태로 발전했으며 또한 토지개혁을 전후해서야 비로소 명칭이 표준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당시의 정부 문서를 검토해보면, 이 지역은 1949년 이후에도 몇 해 동안은 中官村, 中官墳, 中官屯, 中關屯, 鍾關(), 中關村 등 매우 비슷한 발음의 다양한 명칭으로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헌 조사와 지역 연장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 지역의 당시 정황을 추측해 볼 때, 토지개혁이 완료된 1953년 이전까지는 여러 명칭들 중에서 中官村이 상대적으로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中關村이라는 명칭이 표준으로 확립된 것은 그 직후의 일로 보인다. 또한, 어떤 글자로 씌었든, 이 지역이 민국 시기는 물론 사회주의중국 수립 이전까지 촌락의 형태를 갖추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그림4 참고)

 

1950년대 전반의 명칭 표준화에 관해서는 두 가지 일화가 존재한다. 그 중 하나는 베이징대학(北京大學) 교직원 숙소인 중관위안(中關園) 명칭의 유래와 관한 것이다. 1952년 북경시 도시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교육과 연구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들이 해전구 일대로 이전되었는데, 베이징대학은 옌칭(燕京)대학과 병합되어 현재의 위치에 공간을 배정받았다. 두 학교가 병합됨에 따라 건물 신축 부지가 부족하게 되자 베이징대학은 중국과학원 부지의 일부를 양도 받아 이 지역에 교직원 숙소를 건설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숙소를 명명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에서 당시 부총장은 지역 이름을 따라 중관위안으로 짓되, “中官이라는 단어가 새로운 시대에 학교의 새 출범에 어울리지 않으니 中關園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 숙소가 中關園으로 명명되자 자연스럽게 이 지역의 지명이 中關村으로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일화는 중국과학원(中國科學院) 지리연구소의 이전(移轉)과 관련된 것이다. 1953년 중관위안의 바로 남쪽에 지리연구소 건물이 완공되었다. 지리연구소는 이전과 함께 새로운 주소가 적힌 연구소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주문제작 해야 했는데, 당시까지도 통일된 주소 체계가 없던 터였다. 연구소 소장은 어느 날 우연히 근처 주택가 상점의 벽에 中官屯이라는 글자가 씌어있는 것을 보고 비서에게 하이뎬취 중관툰(海澱區 中官屯)”이라는 주소로 문방구를 주문하도록 지시했다 한다. 주문한 물품을 받아 본 소장은 하이뎬취 中關村으로 인쇄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내부 조사를 통해 그 연유를 확인했는데, 상하이 출신의 비서가 자신의 발음을 잘못 알아들은 데다 () 그 얼마 전에 中關이라는 글자를 본 적이 있어서 당연히 中關일 거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른바 삼반(三反)운동(반탐욕, 반낭비, 반관료주의)이 한창이던 터라 소장은 하는 수 없이 제작된 문방구를 그대로 사용하도록 지시했고, 이후에 이전해 온 중국과학원 산하의 다른 연구소들도 지리연구소의 주소에 준하여 주소를 정하게 됨에 따라 中關村이라는 지명이 고정되었다는 주장이다.

 

어떤 일화가 지명표준화의 실재 과정을 더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각각의 일화의 신빙성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현재 또는 이전에 각각 베이징대학과 중국과학원 소속이(). 어찌 되었든, 中關村으로 표준화된 중관촌은, 베이징대학에 부지를 양도한 중국과학원이 그 관할 지역을 남쪽으로 확장함에 따라 지리적으로 함께 확장되기 시작했다. 날로 증가하는 과학원 연구원과 가족들의 행정상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1961년 해전구 인민정부는 오늘날의 북사환로 부근에 중관촌 가도판사처(街道辦事處)를 설립했다. 중관촌의 행정 중심지가 그 남쪽에 생겨난 것인데, 이에 따라 중관촌의 지리적 경계 역시 처음으로 확장되었다. 단위 제도와 호구 정책의 영향으로 1980년 이전까지 대부분의 중관촌 주민들은 중국과학원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한동안 과학원의 배경을 빌어 과학원이 있는 중관촌또는 중관촌에 있는 과학원으로 불렸다 한다. 과학원의 규모가 더 확대되고 도시 정비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1980년 중관촌 가도판사처가 황좡(黃庄) 지역으로 이전되었는데, 이에 따라 중관촌은 다시 그 공식적인 행정 중심지를 이전함과 동시에 그 경계 역시 훨씬 더 남쪽으로 확장하기에 이른다.

 

1980년대 초반 도시 부문의 개혁 정책이 부분적으로 시작되면서 중관촌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당시 중국과학원 물리연구소 선임연구원이었던 천춘셴(陳春先) 박사가 미국의 실리콘 밸리의 발전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198012월 중국 최초의 민영 과학기술기업을 설립한 것을 계기로 중관촌에서도 개혁의 물꼬가 터졌다. 오늘날의 중국의 모든 언론매체와 관련 정부기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천박사의 도전 정신을 칭송하고 중관촌 제1촌민이라 칭하며 영웅적 신화화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당시의 언론과 정부 기관은 천박사의 시도에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주위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왔던 천박사를 비롯한 기업 경영진은 기업 활동에 따른 수익을 분배하는 차원에서 직원들에게 상여금을 지급한 것을 계기로 자본주의적 기업가, 부패한 간부라는 비판을 공개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대내외적 압력에 시달리던 천박사는 198211월 급기야 해당기업을 폐쇄하게 되었고 12월에는 당 중앙의 지시에 의해 인민일보 기자들이 비밀리에 천박사를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19831, 보수파와의 정쟁에서 승기를 잡은 후야오방(胡耀邦), 후치리(胡奇立) 등의 명의로 작성된 결정문이 하달되었는데, 이는 중관촌은 물론 중국 과학기술기업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천박사의 시도가 당 중앙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자, 그 해 말까지 천박사의 새로 설립한 기업을 포함하여 12개의 과학기술기업이 중관촌 지역에 생겨났다. 1984년 당중앙위원회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건설이라는 명제 하에 도시 지역에서의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1987년 정부가 사영기업이라는 범주의 기업형태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자, 중관촌 지역의 과학기술기업의 수는 더욱 급속히 증가하여 1988년 말에는 400여 개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고무된 북경시 정부는 1988년 중관촌 지역에 입주해 있는 과학기술기업을 골간으로 북경신기술산업개발시험구(이하 북경개발구)”를 설립하여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첨단 과학기술을 개발, 응용하는 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전국에 건설된 56개의 국가급 고신(高新)기술산업개발구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다.

 

북경개발구에 소속된 새로운 기업들은 대부분 중관촌로(中關村路; 현재의 北四環路) 일대를 기점으로 남쪽으로 바이이루(?; 현재의 中關村大街)를 따라 T자 형국으로 된 지역에 집중되었다. 대부분의 기업 또는 상점들이 전자 및 컴퓨터(관련) 제품을 취급했던 까닭에 이 일대는 일반시민들에 의해 중관촌 전자거리(電子一條街)”, 그리고 이후 1990년대에는 중관촌 컴퓨터거리(電腦一條街)”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중관촌이라는 세 글자가 일반 북경시민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이 별명들을 통해서였으며, 오늘날에도 또한 많은 사람들이 중관촌이라는 글자를 통해 우선적으로 연상해내는 지리적 범위는 이 중관촌전자거리 또는 컴퓨터거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북경개발구 또한 중관촌 전자거리를 골간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은 물론 언론매체들조차 이를 중관촌개발(시험)라 불렀다.

 

한편, 북경개발구가 설립되고 중관촌에 기업체가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함에 따라 중국과학원은 조직과 공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1988년에 관할지역을 현재의 북사환로 부근을 기준으로 중관촌 남구북구로 나누었다. 자연스럽게 일부 지도에는 바오푸쓰(保福寺), 다종쓰(大鐘寺), 황좡(黃庄), 란치잉(藍旗營) 등의 지명이 중관촌 남구보다 더 작은 글씨로 표기되거나 아예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게다가 1988년 인민일보에 게재된 중관촌 전자거리에 대한 특별 보도문에서 황좡에 위치한 중관촌 가도판사처로부터 남쪽으로 6k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바이스챠오(白石橋) 일대를 전자거리의 일부로 포함하고, 또한 이 지역에 입주한 기업들이 (중관촌)북경개발구에 포함됨에 따라 공식적인 중관촌의 범위는 다시 한 번 훨씬 더 남쪽으로 넓혀지게 되었다. (그림5 참고)


 6.관련기행5.gif그림5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잠시 주춤했던 중관촌의 과학기술기업 창업 열기는 1992년 이후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중관촌의 좁은 골목들은 물론, 심지어는 야채 시장 건물 내에도 “XX과학기술공사라는 간판을 건 IT 제품 취급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다양한 전자제품에 대한 대중적인 소비가 증가하고 또한 컴퓨터(PC)가 개인 소비자들에게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소위 중관촌의 과학기술기업의 기술적, 자본적 문턱 또한 현저하게 낮아졌다. IT 관련 제품의 유통량이 전국적으로 팽창함에 따라 중관촌은 또한 화북지방의 IT 유통산업의 거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기까지만 해도 중국의 국산 IT 브랜드가 많지 않았던 관계로, 중관촌은 IBM, Dell, HP, Sony 등 해외 유명 브랜드의 전시장이자 다국적 기업들의 시장 장악을 위한 각축장에 다름 아니었다. 컴퓨터 또는 IT 관련 제품, 외래어로 표기된 해외 유명 브랜드 등과 관련된 이미지가 범람함에 따라 일반 시민들 또한 중관촌을 자연스럽게 (물론, 언론매체와 정부기관의 보도와 홍보에 의해) ‘중국의 실리콘 밸리와 결부시켜 상상하기 시작했다.

 

중관촌은 실리콘 밸리와 얼마나 떨어져 있나? (中關村離硅谷多遠?)” 이는 1999년을 전후하여 한동안 중관촌과 관련된 매체 보도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던져진 질문이다. 1990년대를 거쳐 다국적 기업 브랜드의 전시장으로 전락한 중관촌의 산업기술 수준과 시장 상황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성찰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북경시 등 관련 정부기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9년 국무원의 중관촌과학기술원구(科學技術園區; 이하 과기원구) 건설 승인을 전후로, 북경시는 중관촌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재개발을 추진했다. 먼저 이전의 바이이루()를 확장하여 중관촌대가(中關村大街)를 건설하고 사환로(四環路) 건설 사업의 일환으로 이전의 중관촌로 및 주변 도로를 확장, 정비하였다. 이와 함께 해전구 정부는 중관촌대가의 좌우 100m 이내에 들어서 있던 무허가 건물들과 낡은 건물들을 2001년까지 모두 철거하였다. 또한 부족한 업무 공간을 확충하기 위해 해전구 정부의 관할 하에 있었던 중관촌의 서남쪽 지구 전체를 철거하고 중관촌 서구라는 이름의 금융 및 연구 단지를 조성했다. 2005년에 완공된 이 서구는 각양각색의 초현대식 고층 빌딩과 넓은 현대식 광장, 그리고 전통적 외양의 사당 및 기념관들이 어우러져 있는데, 이후 중관촌 현황을 소개하는 책자 및 선전 자료에서 현대화된 중관촌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부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와 함께 중관촌이라는 지명의 지리적 지시성에도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 중관촌이라는 이름이 지리적 공간을 초월하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관촌과기원구가 설립되기 몇 해 전, 북경시 정부는 중관촌에 밀집되어 있는 과학기술 산업 시설을 외곽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샹디(上地; 1991), 창핑(昌平; 1992), 펑타이(豊台; 1992)에 위성 산업 단지를 건설하고 그 지역을 북경개발구에 포함시킨 바 있다. 1999년 국무원의 승인에 의해 설립된 중관촌과기원구는 이 북경개발구를 근간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샹디, 창핑, 펑타이 단지는 중관촌 전자거리로 대표되는 이전의 중관촌 지역과 함께 당연히 중관촌과학기술원구라는 특수 행정조직의 관할 범위로 편입되었다. 이리하여 중관촌과기원구는 샹띠와 이전 중관촌 지역을 포함하는 하이뎬위안(海澱園), 다른 행정구역인 펑타이취(豊台區)에 속하는 펑타이위안(豊台園), 그리고 행정구역상으로 북경시가 아닌 창핑시(昌平市)에 속하는 창핑위안(昌平園)까지를 포괄하는 특수한 용어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중관촌과 지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지역들이 중관촌이라는 접두어를 달고 있는 특수 행정조직에 의해 하나로 묶여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중관촌이라는 단어가 점점 국내외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하게 되고 첨단기술 산업의 대명사로서의 그 상징적 기능이 제고됨에 따라, 그 명칭에 함축되어 있는 지리적 지시성과 함의가 그 단어로부터 부분적으로 유리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국무원의 승인이 하달된 몇 개월 후, 북경시 정부와 중관촌관리위원회는 챠오양취(朝陽區)의 왕징(望京)에 있는 디엔즈청(電子城)과 북경 남쪽 외곽의 이좡(亦庄)을 중관촌 과기원구에 편입시켰다. 이리하여 중관촌과기원구는 “1() 5()”으로 불리게 되었다. 2003년 말에는 북경시 중심부에 있는 더셩(德勝) 일대와 해전구의 지엔샹(建詳) 지역이 포함되면서 한 동안은 “17으로 불렸다. 얼마 후 2006년에는 스징샨(石景山), 용허(雍和), 통저우(通州), 다싱(大興) 지역이 추가로 편입되고 지엔샹 지역이 하이디엔위안으로 통합되면서 중관촌과기원구 110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중관촌과기원구는 다시 20093중관촌국가자주창신시범구(國家自主創新示範區)”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중관촌과 관련된 경제특구가 이렇게 지리적으로 팽창함에 따라, 그것이 접두어든 또는 단독 지명이든, 중관촌이라는 단어에 의해 지칭되는 지역의 면적도 함께 늘어나게 되었다. 20093월을 기준으로 이 면적은 무려 232 km²에 달하는데, 이는 서울시 전체 면적(605 km²)38%를 상회하는 것으로 현재 여의도 면적(8.5 km²)27배 이상의 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참고로, 북경 최대의 행정구인 하이디엔취(海澱區)와 뉴욕 맨하탄의 면적은 각각 426 km², 60 km²이다. (그림6 참고)


6.관련기행6.gif그림6


이제는 어디든 다 중관촌이로군.” 많은 지역 주민들과 타지에서 온 방문객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중관촌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며, 또한 어떤 사람들은 중관촌의 발전과 팽창을 얘기하면서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중관촌이라는 이름으로 지시되는 지리적 범위가 이렇게 확장됨에 따라, 북경 시민들은 중관촌이라는 단어에서 복수(複數)의 의미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중관촌이라는 단어를 듣고 북경 시민들이 떠올리는 지리적 실체로서의 중관촌은 이제 크게 다음 세 가지 형태다. 먼저, 크고 작은 전자제품 가게와 IT 업체들의 간판, 그리고 방문객들로 붐비는 (지금의 하이룽(海龍) 전자상가를 중심으로 하는) 이전의 중관촌 전자거리 주위가 그 하나이고, 다음으로는, 좁은 의미의 중관촌을 포함해서 같은 해전구에 속해 있는 상띠와 바이스챠오 일대까지를 포함하는 지역,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중관촌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중관촌창평(국가자주창신)시범구,’ ‘중관촌통저우(국가자주창신)시범구등을 포함하는 특수 산업 단지가 그 것이다.

 

관리위원회의 몇몇 간부들이 인정하듯, ‘중관촌이라는 이름을 이렇게 지리적 경계를 초월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첨단기술 산업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중관촌의 대중적 인지도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보고자 하는 의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또한 중관촌을 실리콘 밸리와 견줄 수 있는, 더 정확하게는 중국의 실리콘 밸리를 넘어서 세계 속의 중관촌이라는 독자적인 국제 브랜드로 만들어 나가고자 (國際品牌化) 하는 야망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중관촌 과기원구나 국가자주창신시범구는 확실히 일반적이고 정식적인 행정 단위가 아니다. 그러나 첨단산업 중심지로서의 중관촌이 지니는 상징적인 효과는 중관촌 그리고 자주창신시범구 등과 같은 수식어와 함께 점차 다른 지역으로 이식(移植)되어 가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전에는 중국과학원이나 전자 거리또는 컴퓨터 거리의 후광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던 중관촌이 이제는 과학원 관할구역은 물론 해전구와 북경시를 넘어서 점점 더 넓은 다른 지역까지 포괄해 가고 있는 것이다.

 

* 이 글은 필자가 20101112일 현대중국학회 주최 추계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발표문, <중국의 실리콘 밸리 만들기: 중관촌의 역사와 상징의 재구성>에서 부분적으로 발췌,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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