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 /2011.02] 논단 _ 淸末(1882-1894년) 漢城의 華商組織*
김희신 _ 인천대학교 HK연구교수
한국에서 재외중국인을 지칭하는 ‘화교’는 청말 화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전근대 화교가 국가권력과 무관했던 것과 달리 근대 화교는 국가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성장해 갔다. 한성의 화상들은 화교 사회조직 성립 초기 母國에 의해 전략적으로 관리되었다. 화상들도 국가의 정치적 전략에 적극 호응하는 방법을 통해 국가권력을 이용하였다. 이는 조선ㆍ일본ㆍ중국의 경쟁이 가장 격렬했던 한성에서 화상이 韓ㆍ日 양국 상인을 압도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던 기반이기도 했다. _ 최초의 화교조직, 中華會館 한성은 다른 개항장과는 달리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등 외국인이 잡거하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한·중 양 국민간의 분쟁과 한·중·일 상업 경쟁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었다. 한성 화상조직의 역사는 광서 10년(1884년) 4월 중화회관의 설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사실 조선 내 화상의 규모와 경제적 역량에서 크게 성장했던 것은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 이후였다. <무역장정>의 체결로 한성과 인천을 중심으로 화상의 활동이 활발해 지고 숫자도 크게 늘자 商務公署 등 행정관서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이에 근거해서 1883년 6월 이홍장은 <辦理朝鮮商務章程>을 제정하고 조선에 商務委員 파견과 商務署 설립을 추진하였다. 한편 <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체결(1884년)하여 인천에 청국조계지가 설치되었고, <貿易章程>에 이어 華商이 인천ㆍ한성을 거점으로 상업기반을 마련하는데 중요했다. 商務公署 등의 행정관서 외에도 화교 민간단체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地界章程>에 의거한 仁川租界地의 平地(整地)工事는 화교 조직체 결성의 자연스런 계기가 되었다. 總辦商務委員으로 파견된 陳樹棠이 한성ㆍ인천의 화상들 가운데서 平地 ‘監工’을 책임질 董事를 공거토록 하였고, 동사 선출 직후 중화회관 설립을 지시한 것이 그 단서였다. 회관 건물은 광서 10년(1884년) 4월 26일 公館 左側의 瓦屋을 구입하여 세웠다. 회관은 화상 조직의 발전과 회합이라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목적에서 설립된 것으로, 중화회관은 화상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최초의 민간사무소였다. 화상을 위한 공무를 의논하기 위해 회관을 세워 그 대표격인 董事를 衆商들이 공거하고, 각 幇 회원들로부터 4厘捐款을 징수하여 公費로 충당하고 있었던 점, 밑천이 매우 적었던 船戶들조차도 회관경비 마련을 위해 衆商들이 公議한 ‘회관장정’에 기꺼이 동의하였던 점 등에서 보면 자발적인 민간 조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회관의 대표격인 商董 선출이 ‘인천평지감공’의 역할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公署로부터 印信을 발급받았다는 점, 회관 건물 매입 대금의 半을 總辦 진수당이 공금에서 차입하고 있었던 점 등에서 보면 완전한 민간단체로 출발했던 것은 아니며 半官的 성격을 가진 단체로 출발하고 있다.
_ 한성 화교의 증가와 分幇 정착 초기 단계에 화상은 안정적인 기반 확충이라는 필요성에서 中華會館이라는 연합적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후 한성화상 숫자의 급속한 증가와 이해관계의 변화에 따라 광서 11년(1885년) 12월 9일 화상조직은 北幇과 南幇으로 分幇되었고 각 幇마다 董事 1人을 公擧하였다. 당시 分幇된 南幇에는 閩ㆍ廣ㆍ浙ㆍ江 등 주로 4商이 1幇을 이루었다. 그런데 南ㆍ北幇으로 分幇된 직후부터 廣商들이 南商과 언어가 불통하므로 廣幇이 별도로 董事 1人을 두어 分幇할 것을 줄곧 청하였고 광서 14년(1888년) 10월에서야 원세개로부터 비준을 받았다. 결국 한성의 화상조직은 北ㆍ南ㆍ廣幇 등 3幇으로의 分幇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청일전쟁 발발까지 3幇체제를 유지하였다. 이 과정에서 熊廷漢ㆍ諸觀光, 盧恩紹(이상 중화회관), 盧恩紹, 姜延諮, 陳廣潤(이상 북방회관), 袁憲章, 林月焦, 張傳茂(이상 남방회관), 譚以時(광방회관)가 각 幇의 董事로 활동하였다. 조선 화상의 분파 현상은 화상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매우 이른 초기 단계부터 존재했다. 일찍부터 화상들 간에는 ‘東幇’이나 ‘廣幇’, ‘浙幇’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고, 그리고 화상조직의 分幇 과정을 보더라도 조선 화교사회에서 화상들이 지역을 중심으로 商號를 구성하고, 지역별로 각 幇을 형성하는 전통적인 상인사회의 구조적 특징이 존재했다. 전통적인 조직 원칙에 근거해서 지역별로 分幇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화교들이 고향에서 멀리 떠나 새로운 조선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고자 할 때 이러한 지역 조직은 전통 중국과 비슷한 사회 환경을 제공했다. 화상조직의 分幇 과정은 화상들이 상업의 발전과 화상의 화합이라는 최초의 화상단체인 중화회관 조직의 목적에 부응하면서도, 이 조직체와 분리되어 문화적으로 좀 더 맞는 사람들과 결합하고, 자체의 공동목적을 달성하려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_ 회관의 운영구조와 기능 현존하는 <南幇會館公所章程>(1885년)을 분석하여 董事의 선출, 기금의 조달·관리, 회관과 묘지 설립 절차, 회원의 범주, 董事와 회관의 다양한 역할 기능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가능하다. 회관은 商民 회원이 자금을 모아 건물을 구입하여 공무를 처리하는 장소였다. 각 幇이 公署에서 비준을 받아 회관을 설립함과 동시에 幇의 모든 상인이 그 회원이 된다. 다른 幇에 속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선에 온 華商은 모두 1개월 기한 내에 회관에 등록하고 董事 및 大號鋪의 보증을 통해 公署에 執照 발급을 신청하여 수령하도록 했다. 借名하고 출생지나 호적을 속이는 경우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회관조직이 다른 지역 幇에 대해 강한 배타성을 지녔으며, 회원이 다른 조직에 중복해서 가입할 수도 없음을 보여준다. 초기 회관은 우선 號商이 중심이 되지만 상업에 종사하지 않는 자로 ‘手工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자’에 대한 人捐 과세도 언급하고 있다. 조선의 화상수가 많지 않았고 회관 조직의 성립 초기였기 때문에 화상조직 내에서 직업별 분화가 나타난 흔적은 아직 없다. 회관에서는 화물의 수출입 과정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불편사항에 대한 처리에서부터 공동묘지의 조성, 장례 의식 등과 관련된 자선사업, 각종 護照ㆍ執照 발급 대행과 검열, 공동의 제사의식, 기금과 4釐捐款의 징수ㆍ보관 등 다양한 활동과 업무 기능을 담당했다. 회관은 회원을 대표해서 駐朝鮮使館과 협조하여 각종 執照ㆍ護照를 발급하는 등 화상 사무를 원활히 추진하여 화교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상업 발전을 도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회관에서는 모든 회원이 필요한 비용을 분담하여 자신들만의 신에게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며 기원했다. 또 자선사업으로 貧者ㆍ弱者 등을 다양하게 구제하며, 특히 喪事에 참여하여 돕고 회원들만의 공동묘지를 세우도록 했다. 본토에서의 풍습 및 신앙이 조선에서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미쳤고, 이런 것들을 통해 그들이 동일한 집단에 속한다는 사실도 느낄 수 있었다. 이주민사회의 관행들이 이러한 <章程>으로 성문화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화교 형성의 초기에는 화교사회의 상징이 된 화교 학교의 설립 및 지원, 회원 간 분쟁과 충돌, 가정불화, 재산분쟁, 화상조직 내 公産 문제, 파벌문제 등에 관련된 내용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 적어도 1885년 회관조직은 회원들 사이의 사회관계망을 제공해서 회원들이 인간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했고, 조선사회에 적응하는 교량역할을 하고자 했음이 확인된다. 그 역할과 기능은 다양화되는 방향으로 진전될 것이 예상된다. 회관의 업무는 董事가 맡아 처리했으며 각 幇 衆商과의 연락, 자선 및 상인의 출입 검열 등 업무를 담당했다. 衆商 중에서 명망이 있고 부유한 號로 商情에 밝은 사람 중에서 公擧하도록 하였다. 매년 董事를 공거하여 公署에 허락을 청해야 하며 회관에서 董事의 연임을 원한다 해도 일단 稟을 올려 지시를 기다리도록 규정했다. 董事가 회관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필요한 기금의 모집과 관리는 자연히 董事의 책임과 조직 운영의 중요 부분이 되었다. 기금은 회원들을 상중하 세 등급으로 나누어 거두는 회비 외에도 4厘 捐款이 기본이 되었다. 적립된 기금은 동사가 각 부유한 號에게 맡겨 이자 등을 얻는 방법으로 공동 재산을 증식시켰다.
* 이 글은『中國近現代史硏究』 46집(2010)에 실린 필자의 논문 ?청말(1882~1894년) 한성 화상조직과 그 위상?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