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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 /2011.02] 기획_ 전통 중국의 상인(2) 晉商 祁縣의 喬家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4 조회수 74

[Vol.6 /2011.02] 기획_ 전통 중국의 상인(2) 晉商 祁縣喬家


옌훙중(燕紅忠)류청후(劉成虎) _ 중국 산시대학 진상학연구소 씀

박경석 _ 인천대학교 HK교수 옮김

6. 기획.jpg


太原市 남쪽으로 100리 남짓에, 배치가 엄밀하고 설계가 정교하며 건물이 멋진 정원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정원 내 건축물은 , 천연색 장식과 금장식, 석벽과 목조 조형물, 공예의 정밀함으로 인해 북방 민간 건축사의 찬란한 보물로 칭송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국내외로 칭송이 자자한 祁縣 喬家大院이다.

 

1 _ 喬家의 출세

 

喬家의 선조는 祁縣 喬家堡의 빈곤한 농민으로, 나이 어린 고아 喬貴發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喬貴發은 어려서 東觀의 외숙부 집에 보내졌는데, 종일 외숙모의 냉대에 시달려야 했다. 이처럼 먹는 둥 마는 둥, 입는 둥 마는 둥, 남의 집에 얹혀사는 생활환경은 그를 내성적이고 부정적인 성격으로 만들었으나, 그의 속마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대접받기를 갈망하였다. 그래서 喬貴發은 항상 타인을 위해 애를 썼다. 한번은 집안 조카의 혼사가 있어 喬貴發이 아침 일찍 달려가 도왔다. 한낮 혼례를 행함에 신랑 신부가 집안 어른께 절을 올려야 하는데, 마침 喬貴發은 아랫목에서 비지땀을 줄줄 흘리면서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큰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얼떨결에 몸을 일으키니, 어떤 사람이 비웃듯 말하기를 : “이런 사람에게 예를 행하면 신분을 잃을 거야.” 喬貴發은 부끄러워 매우 난처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喬貴發은 고향을 떠나 살기로 굳게 결심하고, 西口로 가서, 薩拉齊廳合成 전당포에서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이 고되고 보수가 적었으나, 어쨌든 입에 풀칠은 했고, 순식간에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곳에서 喬貴發씨 성을 가진 다른 점원과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이들은 입에 피를 발라 의형제의 인연을 맺기도 했다.

 

당시 淸政府蒙古 주둔 의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土默特旗의 광대한 방목지에 대한 개발 금지를 해제하고, 內地 백성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게 했다. 사람이 많아졌고, 장사할 기회도 생겨났다. 包頭는 몽고-한족 무역의 집결지이자 歸化에서 서쪽 방향인 新疆으로 갈 때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역참이기 때문에, 이곳에 만리장성 이북의 신흥 상업 도시가 점차로 형성되었다.

 

약간의 돈을 모으게 되자, 두 사람은 창업의 기회를 보게 되었다. 이에 전당포 점원을 그만 둔 喬.秦 兄弟 두 사람은 식료품 가게를 열고 두부, 콩나물, , 칼국수 및 자질구레한 잡화를 팔았다. 두 사람은 열심히 장사를 했고 장사가 날로 좋아져 자금이 점차로 쌓여 갔다. 그러나 장사는 전쟁과 같아서 변화무쌍하기 마련”, 두 사람이 자신들의 성과에 만족하면서 기뻐하고 있을 때 마침 시장상황에 큰 변화가 발생했다. 경험 부족으로 두 사람은 본전까지 까먹고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타격을 입은 喬貴發은 풀이 죽어 의기소침하고 얼굴이 초췌해졌다. 짐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나 지었다. 남은 것은 이 지키고 있는 노점뿐이었다.

 

속수무책이긴 마찬가지였던 씨가 상점 문 앞자리라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있을 때, 반전의 기회가 조용히 다가왔다. 乾隆 20(1755) 만리장성 이북 지역의 곡식 농사가 풍작을 거두어 식량 가격이 크게 하락했다. 씨는 다음 해에 두부를 만들고 콩나물을 키우려고 식량 가격이 폭락한 틈을 타 대량의 저장용 黃豆를 구입해 두었는데, 뜻하지 않게 이듬해에 黃豆의 작황이 좋지 않아 가격이 폭등하였고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씨는 매우 기뻐하며 喬貴發을 고향에서 불러내, 공동으로 경영하면서 함께 큰돈을 벌 계획을 도모했다.

 

두 사람은 장사로 번 자금을 가지고 창고형 도매업(客貨棧)廣盛公을 세웠다. 두 사람의 고생스런 창업을 거쳐 장사가 날로 번창했다. 그들은 包頭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상업계의 신예로 떠올랐다. 이 때 廣盛公은 술, 기름, , 면 등을 취급하는 고유 업무를 계속 했을 뿐만 아니라, 경영 범위를 확대해 양식, 금융, (), 숙박업에도 손을 댔고, 작게는 파와 마늘부터 크게는 비단까지 구색을 모두 갖추었다.

 

또한 廣盛公은 상업 투기를 행했는데 買樹梢(밭떼기)”라고 한다. 이른바 買樹梢란 농민이 급히 돈 쓸 곳이 생겨 무르익지 않은 곡식을 저당 잡히고 상점으로부터 곡식 대금을 차용하였다가, 추수 후에 원래 정해 두었던 가격으로 곡식을 납부하는 것을 말한다. 廣盛公의 사장[掌櫃]들은 이런 투기 매매에 매우 능숙해졌고 많은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청나라 嘉慶 廣盛公은 한 차례 買樹梢매매에서 실수하여 커다란 손실을 보았고, 산더미 같은 빚을 짊어지게 되어 거의 도산하기에 이른다. 사장들에게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니었고 후회막급이었다. 다행히 廣盛公은 상업계에서 명성이 높아 주위로부터 우호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요컨대 채권자들이 부채 상환 기일을 3년 연기해 줌에 따라 가까스로 한 숨 돌리게 되었다. 廣盛公은 상하가 臥薪嘗膽 하였고 비통함 가운데 교훈을 얻었다. 3년이 지나 결산을 해 보니, 廣盛公은 부채를 모두 갚고도 많은 이익이 남았다.

 

는 이를 부흥의 기반으로 삼기 위해 廣盛公復盛公으로 개명하였다. 씨는 在中堂”, “大吉堂”, “進修堂”, “德興堂의 명의로, 씨는 餘堂의 명의로 復盛公白銀 3만량을 공동 투자하고, 이로써 사업이 다시 일어나 재운이 장구하기를 빌었다. 喬家子弟들은 조상의 가르침을 엄히 받들어, 家規를 정해 오입질과 도박, 축첩, 폭음을 금지했다. 따라서 喬家의 가업이 크게 번창했다. 그러나 씨의 子弟들은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고 도박하기를 좋아해 돈을 물 쓰듯 했고, 회사에서 지분을 조금씩 빼내어 결국에는 전부 써버렸다. 씨들이 빼낸 지분은 모두 喬家에서 인수했고, 최종적으로 씨의 지분은 1.25%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씨의 지분이 되었다.

 

復盛公喬家의 회사가 된 후, 거래가 더욱 흥성하여 包頭에서 연이어 復盛全, 復盛西商號復盛菜園 등의 회사를 증설했다. 나중에 包頭 시내에 復盛公, 復盛西, 復盛全 등 모두 19곳의 상점을 개설했고, 5백 명의 직원을 두었으며, 包頭에서 첫째가는 회사가 되었다. 復盛公의 발전과 강대함이 包頭의 형성에 끼친 영향은 지극히 심대하다. 그래서 復盛公이 먼저 있었고 包頭가 나중이다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喬家는 국내에 규모 있는 상업 부두가 발전함에 따라 復盛公 계열회사 商號[復字號]’를 기반으로 北京, 天津, 東北, 長江 유역의 각 도시에 여러 商號를 설립하였다. 徐珂?稗類?에 따르면, 씨는 모두 4~500만량의 자산을 소유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아, 淸末에 이르러 喬家는 전국 각지에 票號, 錢莊, 전당포, 쌀가게 등 200여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었고, 유동 자금이 700~1000만량 이상이었다. 여기에 각종 부동산을 더하면 자산이 수천만량에 이른다.

 

2 _ 喬家商道

 

喬家는 상업과 금융업의 경영에서 가 충돌할 때는 항상 보다 를 앞세운다는 신념을 견지했다. 喬東家와 사장[掌櫃]들은 소속 상점이 교활한 수단으로 이득을 보거나 고객을 속이는 행위를 결연히 거부했다. 이런 號規를 위반하는 경우가 발견되면 엄히 징계하여 용납하지 않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淸末 어느 해 식용유의 작황이 나빠 식용유 가격이 수직 상승했다. 喬家復盛 기름집이 包頭에서 대량의 아마인유를 山西로 가져가 팔았다. 이 일을 처리한 직원이 기회를 틈타 이익을 취하고 싶어 슬며시 검은 마수를 들이대 나쁜 물건을 좋은 물건이라고 속여 팔았다. “악행이 발각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장에게 발각되어 모든 가짜 기름을 회수하게 하고, 품질이 월등히 좋은 새 기름으로 바꾸어 주도록 했다. 그러나 부당 이익을 취하려던 직원은 해고하지 않았다. 復盛 기름집은 비록 이번 기름 시장에서의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리고 상당한 손실을 보았지만, 고객의 신뢰를 얻었고, 인근 사람은 덕을 보아 기뻐하고, 먼 곳에 있는 사람들도 흠모하여 모여들게 되었다. 喬家 復字號는 계약을 다시 맺을 수 있었고, 신용을 지킨다는 아름다운 명성이 널리 전파되어, 거액의 광고비를 절약하였다.  

 

또한 包頭에는 復字號 大鬪賣出이라는 상업 기담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밀가루 음식은 북방 사람들이 먹기 좋아하는 주식으로 평시 판매량이 매우 많다. 불량한 상인들은 저울을 속이곤 했는데, 고객 면전에서 저울을 높이 쳐들어 마치 양이 넘치는 듯 보이게 하지만 실제로는 모자란다. 백성들은 이에 대해 분통이 터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때 包頭 城內에 좋은 소식이 전해졌는데, 復字號에서 파는 밀가루는 1근을 사서 집에 가 달아보면 11량이라는 것이다. 실제 復字號1량을 더 주었다. 삽시간에 사람들이 밀가루를 사기 위해 復字號로 벌떼처럼 몰려들었고, 包頭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復字號의 충실한 고객이 되었다. “열에 하나 더 주기라는 기발한 마케팅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喬家 復字號는 어렵지 않게 包頭의 밀가루 시장을 점령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喬家는 상업 경영 중 협력 파트너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나름의 준칙을 가지고 있었다. 파트너를 선택함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고, 그 성실과 신뢰를 면밀히 관찰했다. 확정하면 업무의 범위를 확대하기보다는 시종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했다. 다른 업체와도 공존하면서 다방면으로 지원을 베풀어 동고동락했다. 이런 생각은 돈을 잃더라도 원수는 만들지 않는다.”, “돈을 관아에 바치기 보다는, 널리 사람을 사귀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낫다는 리더십에 바탕을 깔고 있다. 예컨대, 大順公 絨毛店復盛公大洋 1천량을 빚지고, 겨우 도끼 대가리 하나와 광주리 하나만을 내놓았다. 廣義恒 絨毛店復盛公5만원을 빌리고, 겨우 수 천원밖에 안하는 건물로 변제했다. 돈을 벌면서도 믿음과 명예를 지키고 情理를 중시했던 방침이 喬家가 상업계에서 입지를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復字號는 거래를 많이 하고, 실력을 키우고, 商號의 규율을 엄히 하고, 신의를 중시하는 경영 방침으로包頭를 호령했고 시장을 거의 지배했다. 包頭 商會 역시 喬家 復字號가 앞장서고 많은 사람들이 찬동하여 성립되었고, 회장 직위 또한 喬家 사장들이 번갈아가며 맡았다.

 

씨는 또한 인재를 끌어 모으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씨의 사업이 오랫동안 번창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었다. 예컨대, 祁縣 사람 閻維藩(18591949)은 원래 平遙 蔚長厚票號 福州分莊에 임직했었는데, 그 때에 福州 都司 恩壽에게 白銀을 뇌물로 주었고, 본사는 이 일을 閻維藩이 규정을 위배한 것으로 여겨, 閻維藩을 처벌하려고 했다. 머지않아 恩壽漢口 將軍으로 승진하였으나, 閻維藩은 본사의 처분이 불쾌하여 이미 사직을 결심하였다. 喬致庸은 이 소식을 듣고, 閻維藩이 잘 한 일이라고 여기고, 또한 그가 경영 인재라고 여겼다. 그래서 자기 아들 喬學儀를 특별히 보내 사직을 만류하고 大德通票號總經理로 초빙해, 운영의 전권을 부여하였다. 閻維藩은 자기를 알아 준 씨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해 경영하였고, 이는 씨의 사업에 커다란 이익을 안겨 주었다.

 

씨는 사업의 번성을 위해 官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 꾸준히 주의를 기울였다. 喬映霞는 돈을 써서 공명첩을 사는 것은 한낱 죽은 뒤 비문에 적힌 영예에 불과한 것으로 그다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돈을 써서 권력자를 사귀는 것이 상업을 경영함에 뒷배로 삼을 수 있다고 여겼다. 만약 어떤 관원이 관직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면 또 다른 새로운 관원을 사귀면 된다. 다시 말해서, 이전의 뒷배가 무너지면 새로운 뒷배를 찾으면 된다. 그러면 사업 경영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씨가 친분을 맺는 권력자는 위로는 황실의 종친에 이르고 아래로는 州府의 아전까지 망라해, 사방팔방으로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光緖 이래, 陝西·甘肅 변경의 고관이나 山西 巡撫道員도 거의 모두가 씨와 경제적으로 거래를 했다. 庚子事變이 일어나 慈禧[서태후]가 서쪽으로 도망함에 山西를 지날 때에, 씨는 관리와 친분을 맺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慈禧 行營祁縣 大德通票號의 본사 사무소에 설치하도록 했다. 또한 淸朝政에 은 40만량을 대출해 주어 도망 중에 있던 淸朝政 재정의 옹색함을 해소해 주었다. 이후 淸朝政은 당연히 복숭아를 보내면, 자두로 답례한다.”[詩經]는 우호적 입장에서, 씨의 사업을 잘 보살펴 주게 되었다. 또한 山西 巡撫 丁寶銓에게 福種琅環이라고 쓴 액자를 씨에게 하사하도록 했는데, 씨의 사업은 이런 명성과 위세를 등에 업고 날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밖에, 喬家는 매일 문 밖에 소 3마리를 매어 두어, 누구라도 쓸 곳이 있으면 끌고 가도록 했는데, 저녁때에 다시 갖다 놓기만 하면 되었다. 이웃마을 사람 중에 사람이 죽었는데도 매장할 힘이 없거나, 병이 들었으나 돈이 없어 약을 쓰지 못하거나,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설 명절을 쇠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으면, 喬家 문 앞에서 몇 마디 큰 소리로 간청하기만 해도, 일정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흉년이 들면, “在中堂에서 창고를 열어 구휼을 펼쳤고, 전염병이 돌면 치료와 방역 작업을 진행했다. 매년 이렇게 지출한 비용이 상당하였으나, 그만큼 좋은 명예를 얻었다.

 

3 _ 家族의 변천

 

喬家가 흥성하였다가 쇠락하기까지 모두 7세대를 거쳤다. 1대 창업자인 喬貴發包頭에서 시작하였고, 3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에 셋째 아들인 喬全美喬貴發의 사업 기반을 이어받았고, 包頭復盛號를 창설하였다. 喬全美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었고, 둘째 아들 喬致庸 喬家大院 “在中堂의 주인이 되었다.

 

씨의 가업이 喬在中堂의 주인 喬致庸에게 전해졌던 때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光緖 10(1884)大德通票號大德恒票號를 설립하였다. 大德通票號의 최초 자본은 6만량이었고, 중간에 12만량으로 늘렸으며, 최종적으로는 35만량까지 증가하였다. 大德恒票號의 자본은 10만량이었다. 大德通票號大德恒票號는 전국에 20여 곳의 분점을 두었다. 서쪽으로는 蘭州西安, 동쪽으로는 南京, 上海, 杭州, 북쪽으로는 張家口, 歸化, 包頭, 동북으로는 沈陽 등에 商號를 열었다.

 

喬家 4대는 자 항렬이었는데, 그 중에 喬致庸의 장남 喬岱를 사람들은 務財主라고 불렀다. 그는 총명하고 유능하였다. 사람 사귀기에도 능해, 大德通票號 北京分號에 머물면서 淸朝政의 고관대작들과 교제하기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정계 요인들과 친분을 맺었고, 심지어 京師 九門 提督 馬玉昆과는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그는 기회를 잘 포착했고 과감하게 모험을 시도하기도 해, 사업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喬岱의 뒤를 이어 喬家를 맡은 사람은 喬致庸의 셋째 아들 喬景儼이었다. 望之이고, 1859년에 태어나 1912년에 사망했다. 喬致庸의 말년, ? 20(1894) 전후에 사업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친의 후계자 수업을 충분히 받았고, 윗사람으로서의 풍모도 갖추었으며, 일처리도 매우 꼼꼼해, 家業을 유지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으나, 통이 큰 경영을 하기에는 담력과 식견이 부족하였다. 일생 동안 다른 도시에 가본 적이 없고, 家務는 경영관리체계에 의지했다. 그는 일생 큰일을 도모한 적이 없고, 단지 사람만 선량해 공익사업을 많이 벌였는데, 喬家의 고향에 돈을 지원해 水路를 파서 田地 1천여 에 농업용수를 공급했다.

 

喬家의 제5대는 자 항렬인데, 형제가 모두 11명이다. 喬映霞가 가장 손위여서 民國 初年에 사업을 주관했다. 사람이 눈치가 빠르고 영리하여 일처리 능력이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생각도 깨어 있었다. 그가 집안을 맡고 있던 기간에, 소속 商號에 대해 대대적인 구조 조정 작업을 감행하고 나쁜 습관들을 혁파하여, 사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로써 한 차례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喬家의 제6대는 자 항렬인데, 모두 20여명이다. 그 중 喬映庚에게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나이 순서대로 장남 ?(喬貴雲의 부친), 차남 喬倜, 삼남 喬仕(?의 부친)가 있었다. 그 가운데 喬倜은 일찍이 河南 鄭州 공군전투부대에서 복무한 적이 있다. 盧溝橋에서 중일전쟁이 시작된 후, 全軍이 특급비상상태에 들어가자, 공군은 계속해서 河北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喬倜이 공중전에서 일본 전투기와 함께 운명을 달리 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2세였다. 그는 부모에게 했던 언약을 지켰다. 그는 아들의 뜻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적과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 전투기와 운명을 함께 할 것입니다. 결코 나라와 조상님을 욕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맹세했었다.

 

喬家의 제7대는 바로 喬貴雲 세대(喬映庚에 속하는 자손이 모두 11명인데, 그 중에 오스트레일리아의 가 장녀임)이다. 항일전쟁 후, 喬家 사람들은 일본군에 의한 소요와 전란을 피하기 위해, 일찍이 본가를 떠나 北京上海太原江蘇雲南 등 각지에 머물거나, 혹은 국외로 나가기도 했다.

 

씨는 山西, 平遙, 太谷 3大 票號 중에 집안을 일으키기는 가장 늦었으나, 자본이 가장 크고 신해혁명 이후까지 살아남은 기간이 가장 길었던 상인 가문이었다.

 

씨 가족의 쇠퇴는 淸末淸政府戶部銀行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씨의 票號 업무는 대부분 관영은행을 지렛대로 삼았는데, 공적·사적 예금이 대폭 감소하자, 씨는 票號錢莊으로 개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해혁명 시기, 淸朝가 멸망함에 따라, 워낙에 淸王朝에 의존하고 있던 씨의 사업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씨는 包頭 復字號 영업에서 큰 손실을 보았다. 1926馮玉祥 군대가 북쪽으로 철수하면서 사용한 군수물자는 모두 包頭商號에서 나중에 상환받기로 하고 우선 지급한 것이었다. 그 물량이 엄청났는데,  復字號는 이로 인해 식량 5만석과 現洋 150만원을 손해 보았고, 元氣가 크게 상했다. 1937년 일본군이 包頭를 침공해 점령하자,  復字號의 전당포와 錢鋪는 모두 일본 꼭두각시 조직에 의해 접수되었다. 항전 후씨 상업이 복구되었으나, 헐떡대는 숨을 겨우 부지하는 정도였다. 해방 전에 이미 숨이 곧 끊어질 듯 호흡이 매우 미약했다.

 

4 _ 喬氏 家規

 

喬致庸이 살아 있을 때 기부금으로 관직을 사곤 했다. 喬致庸 본인은 명예직 지방관 후보인 二品 補用道를 지냈는데, 상으로 花翎[나라 때에 관리가 달던 장식으로 모자 뒤에 늘어뜨리는 孔雀의 꽁지를 말함 - 역주]을 써보았다. 자손들도 이와 비슷했다. 남자는 大夫에 봉해졌고, 여자는 宜人에 봉해졌다. 거의 모두가 官人이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喬家는 권력자들과 널리 친분을 맺었다. “三晉源渠貞在中堂의 조카사위이다. “華의 문장가趙鐵山在中堂의 처조카이다喬家가 받들어 추종했던 가문 중시 관념은 금융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가문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습속이나 관행이 喬家의 사회 사무를 지배하고 있었고, 동시에 상당 정도 사회의 풍속에 영향을 끼쳤다.

 

晉商大家族은 보편적으로 家規家風을 중시했다. 가풍은 한 가족의 전통이다. 가장이나 주요 구성원의 영향 아래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은연중에 스며드는 전통 습관과 생활 태도를 지칭하는데, 속칭 門風이라고도 한다喬家家規의 집행과 家風의 지속을 매우 중시하였다.

 

전통 사회에서 허다한 부잣집 자제가 극도로 사치를 하며 돈을 물 쓰듯 해 결국에는 가산을 탕진하곤 하는 경우를 교훈 삼아喬家 喬致庸 때부터 家規家法을 세우고 자제들을 엄히 단속하여 가족의 존엄을 지키도록 했다喬家家規家風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첩을 두지 않는다, 하인을 학대하지 않는다, 창녀와 놀지 않는다, 아편을 하지 않는다, 도박을 하지 않는다, 폭음을 하지 않는다. 喬家家規家風 씨 가족의 발전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동시에 주위 일대의 사회 풍속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때, 돈이 있는 사람들은 대개 3~4명의 첩을 두기 일쑤였는데 喬家 사람들은 한 명도 첩을 들이지 않았다. 喬致庸은 일생 6명의 아내를 맞이했으나 모두가 사별한 후 재혼한 경우였다. 喬映霞의 마누라 劉菊秀協和醫專의 캠퍼스 퀸이었는데, 나이 차이가 너무 커서 여자가 바람을 피웠고 결국 이혼했다. 그러나 喬映霞은 이후 다시는 아내를 들이지 않았다. 喬映?祁縣 段窯村 馬家의 규수를 아내로 맞이해, 민국 24(1935) 부부 동반으로 北平 여행을 갔다가, 아내가 도적에게 납치를 당했는데, 미처 때맞추어 구조하지 못해 그만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에 喬映는 평생토록 재혼하지 않았다.

 

喬映奎在中堂최후의 주인으로서, 집무에 명망이 있고 만사가 순조로웠다고 할 수 있으나, 한 가지 못마땅한 일이 있었다. 아내가 딸 아이 하나만을 낳고 아들을 낳지 못했던 것이었다. 당시에는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후사를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는 관념이 강했고, 喬映奎의 신분을 고려해 볼 때 첩이라도 얻어 제사를 지내 줄 후손을 보는 것이 어느 모로 보아도 순리에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家規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조카를 들여 자기의 후계자로 삼았다.

 

하인을 대하는 부분에서喬家는 항상 관용을 베풀었다. 반드시 피고용인을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혔을 뿐만 아니라, 인격을 존중해 주었다. “在中堂안의 여자 하인은 나이가 차 이미 혼인한 어멈들로만 구성했지, 아직 시집가지 않은 어린 계집종은 들이지 않았다喬家가 하인을 대하는 태도는 비교적 온화·선량했고, 임금은 비교적 후했으며, 설 명절 때는 별도로 보너스도 주었다. 또한 고기, , 연탄, 땔감 등을 보내 주기도 했다. 나이가 많아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하인들을 위해, 매년 많은 액수의 퇴직금을 지급하였다. 실수를 저질러도 喬家는 악한 말을 하지 않았고, 때리거나 욕하거나 학대하지 못하게 했다. 하인 집에 天災人禍가 발생했을 때는 항상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喬家 가족의 자제는 대부분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선생님을 초빙해 私塾을 운영했다. 우수한 학생은 太谷名賢學校天津南開中學, 大學에 보내 더 깊이 공부하게 했다. 졸업 후에는 미국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자 항렬에서만 대학에 진학한 사람이 2명이었다. 6대 형제 20명 중에 11명이 대학생이었고, 박사학위 취득자가 2, 석사가 1명이었는데, 이들은 대개 교수, 번역, 엔지니어 설계 등의 직업에 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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