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알림
Information / News

열린게시판

제목 [Vol.72/2016.08] 현장&공간 _ 중국의 딸들, 그들의 부모 그리고 국가 1 _ 안병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7 조회수 53

[Vol.72/2016.08] 현장&공간 _ 중국의 딸들, 그들의 부모 그리고 국가 1 _ 안병일


지난 산파개혁에 대한 연재에서는 중국정부가 어떻게 남녀평등과 의료현대화라는 혁명과 근대화의 대의를 통해 젊은 며느리/산모에 대한 기존의 시어머니와 산파의 통제를 약화시켜나갔는지를 살펴보았다이번 호에서는 그 동안 중국의 여성해방 담론에서도 비교적 소홀하게 다루어져 왔던딸로서의 여성의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역사 속의 여성특히 딸의 지위를 한두 마디 말로 규정짓는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그러나 최소한 18-19세기 중국 농촌에서 딸은 현금화가 가능한 재산으로서의 의미도 있었던 듯하다필자가 석사논문을 준비하며 살펴보았던 사천성 파현지방의 재판 기록들이나 심지어는 20세기 초반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민국시대 사법 당안에서도 딸들은 종종 춘궁기 때 팔 수 있는 마지막 재산으로 등장하였다또 딸을 둘러싼 분쟁은 굳이 춘궁기가 아니더라도 결혼 시 그 딸의 가격을 놓고또는 그 대금을 누가 받느냐에 대한 문제가 종종 생겨나곤 했다인구증가와 정치적 혼란으로 생존의 기로에 섰던 중국의 많은 농촌 가정들에게, 부족한 식량을 먹여가며 키워도 결국 남의 집으로 시집보내는 딸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자식이면서도 동시에 시집보낼 때 한꺼번에 그 대가를 지불받을 수 있는 적금통장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다이전에 필자가 언급한대로 19세기말 약 20%의 여아가 출생과 동시에 버려지고 살해당했다는 것을 고려하면그렇게나마 살아남은 딸들은 운이 좋은 축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마저도 그들이 남녀평등이라는 혁명의 대의를 내세울 때그 해방의 대상으로 삼은 건 주로 봉건적 가부장제하에 억압받는 며느리와 아내였을 뿐딸은 여성의 삶에서 시집가기 전에 거치는 일시적인 단계로 치부하며 거의 무시했던 듯하다심지어 필자가 확인한 문서 중에는 1950년 초반 딸들이 토지혁명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토지를 자신들의 소유로 등록해달라고 요구했을 때당 지도부가 이러한 요구를 작은 이익에 집착하는 소이기주의로 매도한 경우도 있었다당이 보기에는 토지개혁으로 농촌 가정의 생활이 향상되면 자신들도 아내와 며느리로서 모든 이익을 누릴 터인데공연히 형제들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켜 남성들의 토지개혁에 대한 거부감만 갖게 한다는 것이었다

 

허나비록 중국혁명기의 여성해방 담론이 딸들에게 관심이 적었다고 해서그들의 삶이 이 중국 혁명과 정부의 자장 밖에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실제 그들의 딸로서의 이익과 존재도 이 혁명의 과정에서 다양하게 영향 받고 규정 당했다가장 작은그래서 놓치기 쉬운그러나 의미 있는 예로 딸의 상속권을 들 수 있다필자의 지도교수 중 한 분이었던 Kathryn Bernhardt의 민국시대 여성의 상속권 연구에서 나타나듯이중국 국민당 정부가 민법의 상속에 있어서 남녀평등을 기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농촌에서 이러한 법령은 거의 무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실제 중국 공산당이 제정한 혼인법에서 남녀 동등상속을 규정했음에도 거의 변하지 않은 듯했다다만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딸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보는 시각이었다앞서 언급했듯이중국의 토지개혁 당시 각 가정이 받게 된 토지와 가옥의 넓이는 각 가정의 인구와 노동력에 따라 비례했고 당연히 딸들도 그 계산에 포함되었다즉 딸들이 그들의 을 주장할 근거가 생긴 것이다실제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만약 딸들이 그들 몫의 상속분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을 때 중국 법원들은 대부분 이를 인정하였다혁명의 과실을 정부 스스로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나아가 토지가 집산화 된 이후에는 토지를 둘러싼 분쟁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몇몇 딸들은 집을 짓는데 필요한 벽돌이나 서까래심지어는 과일나무의 소유권과 상속권을 놓고 그 형제들과 법정에서 다투었다실제 1956년 중국 정부가 분석한 135건의 상속분쟁에 등장하는 108명의 자녀들 가운데 딸들이 70(65%)을 차지했던 것을 보아도 딸들의 부모 재산에 대한 시각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필자가 산서/하북지역에서 인터뷰할 때어느 누구도 그러한 이기적인’ 딸들의 존재를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다모두들 부모의 재산은 아들들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다고들 진술하였다그러나 흥미롭게도 몇몇은 형제들이 시집간 누이들에게 자발적으로 약간의 현금을 주어 그러한 요구를 미연에 방지했다고 말해주었다비록 혁명의 세례를 받은 딸들의 도전이 형제 상속의 굳건한 관행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그러한 관행에 미세한 금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다 광범위한 변화는 중국 공산당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데에서 시작되었다바로 여성노동 동원과 집단농장화였다이 두 정책은 농업생산 증가와 사회주의사회 건설에 방점을 두고 실시된 정책이었지만 딸들의 가족 내에서의 지위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즉 앞서 데릴사위부분에서 살펴본 대로 딸들이 집단농장에 나가 농업점수를 받아오고 그 노동점수가 바로 각 가정이 추수 후 받는 식량으로 변환되면서 딸들과 그들의 부모는 얼마나 그들이 집안의 경제에 도움이 되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나아가 이러한 집단농장은 집안에 갇혀 있던 딸들에게 또래 여성이나 남성들을 만날 기회를 제공했고경우에 따라서는 결혼상대자를 부모님의 의사에 반해 스스로 정하게도 해주었다만주지역에서 현장조사를 했던 Yan Yunxiang의 보고에는 심지어 부모가 정해준 남편의 접근을 막기 위해 가위를 들고 잠자리에 드는 딸의 사례가 나오기도 한다외부인이자 외국인인 필자에게 이처럼 극단적인 경우를 말해주는 촌민들은 없었지만그들도 종종 딸들이 원해서 혹은 바지런한 딸을 주변에 두고 싶어서 같은 마을에 시집보낸 사례는 적지 않았다필자가 이를 수치화/통계화 한 적은 없지만산서의 C촌에서는 인터뷰한 가족들 중 최소 셋은 그렇게 부락내로 딸들을 시집보냈다그 중 둘은 장녀였다그리고 그 둘 중에 하나가 바로 C촌의 부녀회장을 맡았었고다른 하나의 남편이 촌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필자가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친정부모의 지지도 그들의 성공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안병일1.jpg

 

                

이와 같이 결코 일반화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중국 혁명은 생존의 맥락에 갇혀있던 대다수 농민의 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주었던 것 같다물론 대부분의 딸들은 여전히 형제들만이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갖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또 많은 딸들이 부모님이 정해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그러나 용기 있고 강단 있던 또 다른 다수에게는 분명히 새로운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華北 농촌 관행 조사 7】

 

안병일 _ Saginaw Valley State University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difang.kaiwind.com/chengdu/dfmssy/201507/17/t20150717_2636966.shtml

 

0 comments
작성자 패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