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 /2011.01] 논단 _ 근대 중국의 증권교역제도
류즈잉(劉志英) _ 중국 시난대학 역사문화학부 교수 씀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교수 옮김
근대 중국에는 두 종류의 증권시장이 있었는데, 하나는 外商이 중국에서 설립한 외상증권시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인 스스로가 설립한 화상증권시장이었다. 이 두 시장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체제로 운용되었으며, 그 발전 과정과 교역제도 역시 근본적으로 상이하였다. 여기에서는 증권교역제도 가운데에서도 주로 근대 중국의 화상증권시장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근대 중국에서 최초의 증권과 증권교역은 外商에 의해서 출현하게 되었다. 아편전쟁 이후 외상이 중국에서 설립한 회사, 기업이 점차 증가하면서 이들이 발행한 주식 총액도 증가하게 되자, 이에 자극을 받아 1872년 중국 최초의 주식회사인 輪船超商局이 탄생하였으며, 그 주식이 상해시장에 진입하면서 외상이 증권시장을 독점하던 상황도 종식시킬 수 있게 되었다. 증권교역의 확대에 힘입어 증권교역소도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1860년대 말 長利公司, 커셔니스미드공사(Cushuny Smith & Co.), 설리번베이스공사(Sullivan Bases & Co.) 등이 속속 설립되었으며, 1891년에는 上海股票公司가 설립되어 1904년에 上海衆業公所로 개조되었다. 이밖에도 1882년에 上海平准股票公司, 1885년에는 公平易, 信通公司, 1914년에는 上海股票商業公會 등이 설립되었다. 중화민국 시기에 들어서 증권교역소의 건립 문제는 사회 여론의 뜨거운 화젯거리가 되었다. 1914년 12월 29일, 북경정부 농상부는 <증권교역소법>을 공포하였으며, 다음해 5월 5일에는 <증권교역소법 시행세칙>을 공포하였다. 이것이 바로 중국에서 최초로 출현한 증권교역과 관련된 법안으로서, 화상증권교역소를 설립하기 위한 법률적 근거가 되었다. 법안에 근거하여 1916년부터 전국의 여러 도시에서는 증권교역소를 설립하기 위한 활발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근대 중국 증권시장이 교역소시대로 진입하였음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근대 중국인이 최초로 설립한 증권교역소는 1916년 호북성 漢口市 前花樓街에서 성립된 한구증권교역소인데, 이 교역소는 개업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업무를 중지하였다. 같은 해 상해에서 손문도 상해교역소(상해증권물품교역소의 전신)의 창립을 주장하였으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大連에서는 1918년 6월에 <증권교역소법>에 의거하여 증권교역소가 설립되었으며, 또한 북경정부의 비준을 획득한 화상증권교역소도 1918년 6월 5일에 前門外大街 11正陽門에서 영업을 시작하였다. 1928년 6월 20일 북경이 북평으로 개명된 이후, 1929년 북경증권교역소 역시 북평증권교역소로 개명되었다. 1936년 7월, 업무 범위를 확대하여 교역 물품이 추가된 이후 유가증권, 잡곡, 황금, 석탄 등이 모두 교역 대상에 포함되었으며, 행정원의 명령에 따라 다시 북평증권물품교역소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7․7사변 폭발 이후 전쟁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1939년 6월 영업을 정지하였다. 북경증권교역소의 탄생은 북경 지역에서 산업 발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며, 더욱이 민족자본주의 공상업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 출현한 것도 아니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북경정부가 상당 수량의 공채를 발행하고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한 결과로 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증권시장은 설립 초기부터 정부 및 정부가 발행한 공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비록 소량의 기업 증권이 상장되기는 하였지만 교역의 주요 품목은 역시 정부의 공채였던 것이다. 상해에서는 두 개의 증권교역소가 성립되었는데, 상해증권물품교역소와 상해화상증권교역소가 바로 그것이다. 1918년에 북경증권교역소와 上海日商取人所가 설립되자 虞洽卿 등이 이에 자극을 받아 商界와 연합하여 종합적인 교역소의 설립을 추진하여,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20년 7월 1일 상해증권물품교역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북경과 상해에서 증권교역소가 설립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다투어 교역소가 설립되었으며, 특히 상해 지역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1921년 5월에서 12월 사이에 상해에서 신설된 각종 公司가 총 243개소에 달하였는데, 이 가운데 교역소가 136개소, 신탁공사가 12개소, 은행이 32개소, 기타 公司, 廠號가 63개소에 달하였다. 寶山, 松江, 杭州, 嘉興, 寧波, 南京, 鎭江, 蘇州, 無錫, 南通, 蚌埠, 哈爾濱, 天津, 大連, 漢口, 汕頭, 廣州 등에서도 교역소가 우후죽순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1921-1922년 사이에 信交風潮의 파동을 겪은 이후에 중국에는 북경증권교역소, 상해증권물품교역소와 상해화상증권교역소 등 3개의 증권교역소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1930년대는 국민정부와 지방정부가 막대한 수량의 공채를 발행함에 따라 중경, 영파, 한구, 청도 등 수많은 지역에서 지방적 성격의 증권교역소가 속속 출현함으로써 그야말로 중국 근대 증권교역소가 가장 많이 설립된 시기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중국 근대 증권시장의 발전 상황을 잘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1929년에 반포된 <교역소법>은 동일 지역에서 동일 물품을 취급하는 교역소를 하나로 제한하였으며, 이와 함께 10년 만기 이후에 지속 여부를 공상부에 주청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와 함께 동일 지역 내에서 두 개, 혹은 두 개 이상의 동류 물품을 취급하는 교역소는 법안이 시행된 3년 이내에 합병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상해 지역 내의 상해증권물품교역소와 상해화상증권교역소는 증권 교역의 동종 영업으로 분류되었으며, <교역소법>의 규정에 의해 1933년 6월 1일 정식으로 합병되었다. 합병된 이후 상해화상증권교역소는 상장된 증권과 증권 교역을 담당하는 經紀人, 그리고 교역 행위를 관리하는 최일선의 감독기관임과 동시에, 정부 당국이 심혈을 기울여 통제하지 않을 수 없는 주요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이 증권교역소는 관리자인 동시에 피관리자의 이중적 성격과 직능을 가지고 시장의 상하를 이어주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증권교역소는 증권시장을 자율적으로 관리하는 기관이었는데, 자율 관리란 첫째, 증권 상장 관리와 상장 이후의 지속적 관리, 둘째, 증권 경기인에 대한 관리, 셋째, 교역 행위에 대한 관리를 말하는 것이다. 증권교역소는 교역시장의 최일선 관리자로서 각종 부정 교역 행위를 조사하고 감시함으로써 시장의 안정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직책을 부여받았다. 1937년 7․7사변의 발발은 8년 중일전쟁의 발발을 알렸으며, 전쟁은 화상증권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전쟁 발발 직후인 8월 11일, 상해화상증권교역소는 정부의 명령에 따라 업무를 중지하였으며, 전국 각지의 기타 교역소도 뒤이어 업무 중지에 돌입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국민정부가 중경으로 천도하게 되자 국민정부 통치구였던 대후방 지역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발맞추어 후방의 금융업 역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다시 후방 지역에 증권시장을 건립해야 할 것인가의 여부와 관련하여 수년에 걸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비록 여러 이유로 말미암아 전시 후방에 증권시장이 설립되지는 못했지만, 이와 같은 논쟁은 증권시장의 성격을 전전에 정부의 공채를 주로 취급하던 단계에서 이제는 산업 발전의 결과로 발행된 증권을 주요 품목으로 하는 단계로 증권시장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이와 동시에 윤함구였던 상해와 천진의 증권교역시장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출현하였다. 전전에 성행했던 정부 공채의 거래가 급전직하로 냉각된 반면, 20여 년간 미미했던 기업 증권의 교역은 오히려 기형적으로 발전하는 ‘황금시대’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결과 1943년 11월 8일 왕정위정부의 화상증권교역소가 증권 교역 업무를 재개하기에 이르렀다. 전시 상해, 천진의 증권시장은 실질적으로 전전의 정부 공채를 취급하던 단계에서 기업의 증권을 주요한 거래 품목으로 하는 단계로 전환되었다. 이와 같이 전시 화상증권시장에서 출현한 변화는 전후 중국 증권시장의 발전 방향을 명확히 제시해 주었다. 실제로 종전 이후 업무를 재개한 상해증권교역소와 천진증권교역소는 기업 증권을 주요한 교역 품목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결과 교역소는 명실상부하게 산업증권시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47년 9월 9일, 상해증권교역소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재개하였으나, 미국식의 궤태제도(櫃台制度)를 교역 방식으로 채택함으로 말미암아 일반 경기인이 탄력적으로 시장에 적응하여 교역을 하기는 어렵게 되었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장외 교역이 이전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여기에 경제공황과 공상업의 불경기로 인해 기업계의 대표적인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증권 역시 매력적인 상품이 될 수는 없었다. 1948년 8월 19일 金圓券 발행 이후, 상해증권교역소는 재정부의 명령에 의거하여 당분간 정부의 허가 없이 영업을 재개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1949년 2월 21일, 국민정부 재정부, 공상부는 상해증권교역소로 하여금 정식으로 영업을 재개하도록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국민정부가 군사적으로 연전연패하던 시기로서 자본의 해외 유출이 대규모로 진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증권 교역 역시 활기를 잃어 개업한 지 두 달도 안 된 5월 5일에 상해증권교역소는 영업 정지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7년 천진시정부는 증권교역소의 설립을 재차 추진하기로 하고, 행정원에 허가를 요청하였다. 천진시정부는 상해시의 사례를 거울삼아 당지 공상업 및 금융계 인사들을 파견하여 3월 6일 천진시은행공회에서 증권교역소 주비위원회 제1차 회의를 개최하였다. 5월 18일 천진증권교역소는 창립총회를 개최하였으며, 마침내 1948년 2월 정식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개업과 동시에 실제로 상장된 증권은 啓新洋灰, 欒州鑛務, 江南水泥, 東亞企業, 濟安自來水, 天津造胰, 中華百貨, 仁立實業, 丹華火柴, 壽豊麵粉, 耀華玻璃, 永興洋紙, 欒州鑛務地 등의 13종에 불과하였다. 1948년 8월 19일 국민정부가 폐제개혁을 단행하여 금원권을 발행한 이후, 천진증권교역소도 정부의 지시에 의거하여 업무를 정지한 이후 다시는 영업을 재개할 수 없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대 중국 증권시장은 지난한 역정을 겪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증권교역소는 설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신교풍조’의 파동을 겪었으며, 증권교역제도가 명실상부하게 자리매김하기 이전에 이미 정부의 공채시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부의 강력한 시장 관여는 한편으로 시장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중일전쟁으로 말미암아 화상증권시장이 큰 충격을 받기는 하였지만, 이를 계기로 전시 및 종전 이후 증권시장은 산업의 발전과 상호 조응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근대이래 증권교역제도의 발전이 비록 초보적이었고 적지 않은 결함도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분명히 주목할 만한 긍정적 발전과 성과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