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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70/2016.06]기획_華北 농촌 관행 조사 (5)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7 조회수 40

기획_華北 농촌 관행 조사 (5)

 

산파개혁을 통해본 중국 혁명, 그리고 국가와 향촌 권력 - 2

안병일 _ Saginaw Valley 주립대학


중국의 높은 산모 및 여아 사망률은 비단 공산당만이 주목한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당 집권기에(1928-1949) 하버드와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각각 교육받은 陈志潜 (C.C.Chen)과 杨崇瑞 (Marian Yang)과 같은 공공의료 전문가들도 농촌 산파개혁을 시도한 바 있다. 그들은 주로 2년 이상의 전문 의료교육을 받은 젊은 조산사(助産師)들을 시골마을로 보내 그곳의 비전문적인 산파들을 대체하는 야심찬 계획을 실행했다. 그러나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미국 록펠러재단의 재정지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실패했다.


이들의 프로그램은 30년대 당시 40만 개가 넘는 농촌 촌락에 보낼 훈련 받은 조산사의 부족 등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오히려 농촌의 보이지 않는 여성들의 권력망에 의해 거부되었다. 陈志潜은 실제로 산모인 며느리들이 조산사에게 출산을 도와달라고 아무리 부탁해도 비전문적이지만 위세를 가진 비공식적인 산파들이나 그들의 친구인 시어머니가 제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하였다. 더욱이 그는 무지한 농민들이 주로 20대인 조산사들을 출산 경험도 없는 애송이에 불과하다며 신뢰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사실 외지인에 불과했던 젊은 조산사들은 촌내 여성 사이에 존경받는 산파들을 무식하고 불결하다고 비난하였다. 이것은 견고히 만들어진 기존 권력체계를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젊은 조산사들은 당연히 그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산파개혁가들 역시 국민당 시절의 공공의료 전문가들을 괴롭혔던 위와 같은 문제들을 피해갈 수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록펠러 재단과 같은 외부의 재정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공산당의 산파개혁가들은 농촌의 신망 받는 기존 산파들과 시어머니들뿐만 아니라, 재정지원을 감당해야 할 당 중앙의 지도자들에게도 왜 산파개혁이 필요한지, 이것이 왜 철도를 놓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인지를 설득해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찾아낸 고리는 바로 “부녀해방”과 “농민 대중과의 연대”라는 중국혁명의 아젠다였다. 즉 공산당의 산파개혁가들은 농촌여성들에게 근대 위생학에 바탕을 둔 산파개혁이 “생명을 살린다는”, 숭고하지만 개개 농민에게는 별로 와 닿지 않는 구호보다는 “아들을 살리는” 기술이라고 선전하였다. 대개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집안에서 대접을 받지 못했던 농촌의 젊은 여성들 뿐 아니라 손자 보기를 간절히 원하고 며느리의 출산 전반을 감독하던 시어머니들도 이제 이 외지인들의 산파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2년제 전문대학수준의 교육을 받은 조산사를 보낼 재정도 여력도 없던 공산당의 산파개혁가들은 기존의 농촌산파들을 농한기동안에 교육시키는데 집중하였다. 필자가 입수한 산서와 하북지역에서 실시한 교육의 교안과 교과서들을 보면, 마을의 산파들은 보통 2주 동안 현 병원에서 실시되었던 교육에 참석하여 주로 문답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문답식 교육은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산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근대 위생학과 산파술이 철저히 현지화/토착화되도록 하였다. 교사들은 초기에는 녹슨 가위로 탯줄을 자르면 안 된다고 하며 파상풍 바이러스를 작은 벌레라고 설명했지만, 곧 가위에 독(毒)이 묻어있거나 가위가 풍(風)에 오염되어있을지 모른다는 현지인들의 설명방법을 채택하였다. 또 도시에서 구입해야만 하는 의료용 알코올 대신에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고량주를 사용하여 가위를 소독하라고 지도하였다. 하북에서는 한 농촌 마을에서 배운 촛불을 통한 소독법이 보급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문맹인 산파들을 위해 기본적인 조산의 원칙들은 교과서가 아니라 민요의 가락에 가사를 부쳐 외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2주의 교육이 끝나면 졸업장을 주어 산파들을 당당하게 돌려보냈다. 산서 남부의 장치(長治)지역에서는 이들을 일부러 트럭에 태워 개선장군처럼 마을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이처럼 기분 좋은 대접과 알기 쉬운 기본원칙 덕택에 그들은 향촌에 돌아간 뒤에도 “신기술”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산서 C촌 한 산파의 딸은 자신의 어머니가 1948년에 이미 산파교육을 받고 끓는 물로 가위를 소독시켜 탯줄을 잘랐었노라고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이와 같이 기존에 있던 산파를 교육시킴으로서 “외지인의 기존 권력에 대한 도전”이라는 문제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이 산파 교육에 사용하였던 교재의 삽화

  

  


동시에 공산당의 산파개혁가들은 그들의 지도자에게 이 산파교육이야말로 부녀의 지위를 높이면서도 고부 간, 남녀 간의 갈등을 피할 수 있는 묘수라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1952년 공산당이 야심찬 부녀해방 프로그램으로 제정 공포한 혼인법은 기존에 억압당하던 젊은 며느리의 이혼권과 재산권을 보장함으로써 그들의 권익을 획기적으로 보호하였지만,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이혼법”이나 “가정 파괴법”으로 격렬하게 거부당하고 조롱당하자 공산당 지도부는 결국 53년부터 혼인법 적용을 완화시켜야만 했다. 산파개혁가들에 따르면, 영아와 여성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 이 의료개혁은 특히 아들의 생명을 보호하여 젊은 며느리의 위신과 지위를 보장해 줄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와 남편도 적극적으로 환영하기 때문에 가족의 체계를 파괴하지 않고도 모든 부녀(며느리와 시어머니)를 돕는 획기적인 부녀해방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의 현지화/토착화된 산파교육이야말로, 모택동의 실천론(實踐論)에도 부합하는 아주 혁명적인 개혁전략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국민당시기의 산파교육이 서구 제국주의의 의료기술로 농민들의 삶을 도외시한 채 외부의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었다면, 자신들의 방법은 농민으로부터 배워 농민의 삶에 부합하는 아주 혁명적인 전략이라고 주장하였다.


부녀해방과 혁명 전략으로서의 산파개혁은 공산당 지도부의 지지와 승인을 받아 예산배정에서 우선권을 배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여성 혁명가들이 배워야 할 기본코스가 되었다. 실제 1950년 산서성 위생국 전체 예산의 5.47%가 산파 재교육만을 위해 배정되었고 이는 국영병원의 운영비, 의과대학 지원비 등에 버금가는 액수였다. 나아가 1063명의 산서성 부녀간부의 51%에 해당하는 552명이 1950년까지 산파교육을 마쳤다. 필자가 현지조사한 하북성 A촌의 전설적인 여자 공산당원이었던 秦樹芳도 공산혁명이 성공한 1949년부터는 마을의 부녀간부이자 산파로서 출산을 보조했었다고 한다. 秦樹芳의 경우는 현정부에 산파개혁의 혁명성을 설명하며 약품구매와 산파교육을 위한 예산배정을 요구한 것이 현 문서에 나타나 있다.


인터뷰 중인 할머니


이와 같은 공산당의 산파개혁은 중국공산혁명 초기의 아젠다들이 어떻게 다양한 이익과 갈등 속에서 조정되고 현실화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즉 공산당의 산파 개혁가들은 산모인 며느리와 그들의 시어머니, 남편, 그리고 촌락의 기존 산파들, 나아가서는 자원을 배분해야 할 공산당의 중앙 간부들 모두를 설득시켜야 하는 문제를, 부녀해방과 농민대중과의 연대라는 구도를 통해 해결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생존과 가족의 연속이라는 농민들의 욕망도 포착하여 그들의 개혁 모델에 적용하였다. 실제 1982년 시행된 중국 최초의 근대적인 인구센서스를 역산해 추정한 영아 사망율은 1940년대의 40%대에서 50년대 초반에 10%대로 급격히 감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전과 기아의 종식 등과 같은 변수와 함께 공산당의 성공적인 산파개혁도 한 몫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다음 호에서는 어떻게 이와 같은 성공이 50년대 중반의 본격적인 집산화와 문화대혁명으로 발전한 이데올로기의 과잉에 의해 훼손되고 변화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 산파개혁은 중국공산혁명의 다양한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바로미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Ahn, Buyngil. “Modernization, Revolution, and Midwifery Reforms in Twentieth-century China.” PhD diss.,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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