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알림
Information / News

열린게시판

제목 [Vol.5 /2011.01] 기획_ 전통 중국의 상인(1) 명청시대 상인과 회관문화(會館文化)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4 조회수 511

[Vol.5 /2011.01] 기획_ 전통 중국의 상인(1) 명청시대 상인과 회관문화(會館文化)



옌훙중(燕紅忠)·류청후(劉成虎) _ 중국 산시대학 진상학연구소 씀

허혜윤 _ 인천대학교 HK연구교수 옮김


201101001.jpg


 역사를 돌이켜 보면 고대 상인들의 열정과 감동적인 서사시적인 재화 추구의 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고향과 자식과 고별하는 슬픔을 뒤로 하고 ‘서구를 지나고(走西口), ‘남해를 건너고(下南海), ‘관동을 넘어(闖關東)’ 마음에는 “신의를 근본으로 천하 일가를 이룬다”는 새로운 생각을 품고, 전례가 없던 상업사의 기적을 이루고, 상업계의 수많은 미담을 남겼으며, 정교하고 아름다운 회관건축과 회관문화를 창조하였다.

 

회관은 중국 고대 도시의 독특한 공공 건축물로 동향인들이 타 지역에서 만든 조직적인 사회단체이다. 사당(祠堂)과 더불어 독특한 기능과 특수한 성격을 가진 중국의 고건축으로 그 구조와 예술적인 면에서 강한 지방성과 민속성을 지니고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과 사람사이는 물론이며 업종 내에서는 더더욱 교류가 필요하다. 회관은 일종의 이동식 ‘문화 공간’으로, 상인이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지역문화를 구현하고 전파할 뿐만 아니라 기술과 문화의 발전과 공유를 촉진한다. 산서(山西)의 분주(汾酒)는 회관의 발전에 따라 진상(晉商)들이 산동, 감숙, 동북 지역 등에 전하면서 오래도록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관이 포함하는 교류와 공영의 잠재력은 현대 상업조직이 마땅히 배우고 따라야 한다.

 

“회관을 건립한 것은 신의 보호를 받고 동향인들의 친목을 위해서이다.” 회관은 동향인들의 마음을 잇고 우의를 돈독히 하며 관인과 상인의 휴식과 화물운송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말과 생활방식 그리고 유사한 심리 문화로 인하여 같은 지역의 상인들이 함께 모여 논의하고, 정보를 교환하여 집단이익을 보호하였다. 또한 경사스런 날에는 함께 모여 공연과 오락을 즐겼다.

 

회관이 언제 만들어졌는가에 대하여는 확실하게 고증할 수 없지만, 유통(?)과 우혁정(于奕正)은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서 “일찍이 회관이 도시에 설립된 것을 고증해 보니 고대에는 없었고 (명대의) 가정(嘉靖)과 융경(隆慶) 연간에 시작되었다.”고 했다. 하병체(何炳?)는 『중국회관사(中國會館史)』에서 회관이 북경에 출현한 것은 좀 더 이른 시기인데, 현존하는 사료에서는 영락(永樂) 연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하여 다른 학자들 보다는 140년 정도 일찍 출현했다고 보았다. 북경 지역의 군읍(郡邑) 회관은 최초에는 동향의 벼슬아치들이 여유 시간에 모이는 곳이었는데, 점차 ‘과거시험 지원자들이 묵는 곳(試館)’으로 변화되었는데, 그곳에서는 또한 많은 동향 상인들이 왕래했다. 북경 이외의 회관은 지역성과 상업성이 더욱 농후했지만 관리들이 참가한 흔적이 역력했으며, 이후 회관의 상업성이 점점 농후해졌다. 그것은 중국고대 상업의 관상(官商) 결합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팽택익(彭澤益)은 『중국공상행회사료집(中國工商行會史料集)』에서 “회관공소의 설립은 과연 언제 시작되었는가? 현재로서는 정확한 근거를 알기 어렵지만 설립 초기에는 상업을 보호하고 공익을 모색하는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무릇 청국은 크고 동서남북의 언어가 다르고 풍속이 각각 달랐다. 게다가 예로부터 객상들은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에 타향에서 수십 년을 머물다가 돌아가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안정된 일을 하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 회관이나 공소의 보호가 없었다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회관이나 공소가 있었기 때문에 토착인들의 핍박을 벗어날 수 있었고 관리들의 압제의 걱정을 덜 수 있었는데, 회관과 공소의 이익은 실로 적지 않았다.”고 했다. 비록 회관이 언제 생겼는지를 확실하게 고증할 수는 없지만, 회관 출현의 원인과 그 역할에 대하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공통의 지역문화와 교통 불편, 그리고 관리의 압제와 토착인들의 핍박 등이 지방의 상인들로 하여금 회관을 조직하여 상업이익을 공동으로 보호하도록 했다.

 

청대에는 회관이 우후죽순처럼 발전하였는데, 북경에서 대량으로 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각지의 상업 시진(市鎭)에 회관이 있었다. 청인 동계부(董桂敷)는 『한구자양서원지략(漢口紫陽書院志略)』에서 “한진(漢鎭 즉 漢口)은 관리와 상인들이 모여드는 중심지며, 각 성의사상이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을 회관이라고도 한다.”고 하고 있다. 정풍임(鄭豊稔)이 편찬한 『용암현지(龍巖縣志)』에는 “본 읍의 행상은 전국에 걸쳐 있는데, 청 건륭(乾隆) 가경(嘉慶) 연간이래 황하의 남북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회관을 가지고 있었다. 홍수전(洪秀全)과 양수청(楊秀淸)의 난 후에는 무리들이 남양으로 발전하여 내지의 상업은 날로 쇠락하였다”고 기재하고 있다. 청대 회관의 변화양상과 상업 흥쇠의 궤적은 서로 일치한다.

 

 

1 _ 명청회관의 특징

 

전국 대도시에 분포하는 회관은 대체로 규모가 웅장하고 건물도 아름다웠다. 회관마다 각기 다른 발전의 역사를 밟아왔으며, 회관 기능의 끊임없는 변화에 따라 나날이 화려해졌다. 회관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1.1 _ 농후한 상업성

 

회관 건립 당시 상당수의 상인들이 동참하면서 회관은 자연스레 상업적 성격과 사회조직을 관리하는 성향을 띠게 됐다. 회관을 통하여 상인들은 서로 연결되어 이끌고 도우면서 종횡으로 연결되고 관통하는 지역적인 상업 집단을 형성했다.

 

당초 상인들에게 숙박과 정보를 제공하고 물건을 보관해주는 용도로 지어진 회관은 ‘향우회 상인 여관’와 흡사했다. 명인 심덕부(沈德符)는 “북경에는 각 지역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모인 사람들의 고향에 따라 회관이 생겼다. 초기에는 숙박의 용도로 쓰였고 점차 더 많은 편리를 제공하였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회관은 건립 당시 같은 고향의 상인들이 머무르고 물건을 맡겨둘 수 있는 ‘객잔(客棧)’과 같은 역할을 했던 탓에 강한 상업적 성향을 보였다.

 

이후 상업이 발전하면서 상인들은 기득권을 지키고 이미 획득한 시장과 일부 업종의 독점권을 공고히 하고자 서로 손을 잡고 상부상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전방위적인 협력과 정보 공유가 가능한 상업 조직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상인회관이다.

 

1.2 _ 현저한 지역성

 

회관은 대부분 지역과 혈연을 중심으로 건립되었다. 하지만 때때로 인접한 몇 개 지역 상인들이 힘을 모아 회관을 건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산섬회관(山陝會館)과 산섬감숙회관(山陝甘肅會館)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현저한 지역성을 회관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다. 청인 서가(徐珂)는 『청패유초(?稗類?)』에서 “숙사(宿舍)는 동향간의 우의를 도모해주는 곳으로, ‘회관(會館)’이라 칭한다.”라고 말하였다.

지역 회관은 업종별 색채를 띠기도 했다. 그래서 지역과 업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회관에서 동향이라고 무조건 같은 업종은 아니었지만 동종 업계 사람은 모두 동향이었던 것만 봐도 그렇다. 예를 들어 대부분 안료(顔料)업종에 종사했던 산서 평요(山西平遙) 상인들은 북경에 회관을 건립하고 이를 ‘안료업계 회관’이라고 명명할 정도였다. 또 하동(河東)회관은 대부분 담배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모이는 회관이었다. 이렇듯 회관은 고향과 업종이 동일한 상인들이 모인 조직이었다.

 

1.3 _ 웅장한 건축물

 

지역 회관은 상단 세력이 강해질수록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고, 회관 건축물의 규모나 웅장함은 곧 상단의 힘을 나타냈다. 그래서 회관의 점유면적이 천 무()에 달하고 회관 내 방이 백 개가 훌쩍 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회관 내에 전당과 누각이 있고, 화려한 건물, 꽃과 나무가 가득한 정원이 있는 회관도 수없이 많았다.

 

건륭 21(1756) 노택(潞澤)회관 『관제묘(關帝廟)신축비』에 이런 기록이 있다. “낙양성 밖 동남쪽의 관제묘는 노택 상인 최만진(崔萬珍)등이 건축한 것이다. 웅장한 규모와 높이 솟은 외관, 새가 높이 날아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1.4 _ 강력한 관리기능

 

과거 중농억상(重農抑商)정책을 펼치던 시기 중국 정부가 상업 활동을 제약할 수 있는 범위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에 회관은 자체적인 업계규칙을 정하고 시장행위를 정비함으로써 시장이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힘썼다. 아울러 분쟁이 발생하면 중재자 역할을 담당했고 부정 경쟁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회관은 동향 간에 친분을 쌓고 신에게 제를 올리기 위해 모이는 집결지이자 선행을 도모하고 업무를 논의하는 사무실 같은 공간이었다. 나아가 지방정부의 치안활동을 돕는 역할도 담당했다. 이처럼 ‘한 배를 탄 공동 운명체’라는 인식을 가진 지역 회관이 점차 발전하면서 지역적 한계까지 뛰어넘기도 했다. 타지 사람이나 관료에게 물질적 도움과 정신적 위안이 되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타지 사람들이 어려움을 처했을 때 앞장서서 이를 해결해주기도 했다.

 

1.5 _ 집단 소유제

 

회관 건축물은 관료나 세도가의 찬조를 받은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동향 상인들이 십시일반 모은 기부금으로 지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남 사기 산섬회관(河南?旗山陝會館)에 대해 건륭 47(1782)의 『춘추루창건비(創建春秋樓碑記)』에 ‘기부한 업체는 모두 423곳이고, 기부 금액은 은화 7916.03냥이며, 기부 업종에는 곡물, 밀가루, , 기름, 식초, 대추, 자리, , 사기 그릇, 유리, 나무, 가죽옷, 의류, 염료, 폭죽, 잡화 등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낙양(洛陽)의 산섬(山陝)회관은 전통방식에 따라 재건했는데, 2 5천 냥 정도가 들어갔다. 본 회관 중앙에 놓인 기부금 비에는 652개 업체들이 기부한 액수가 하나하나 열거되어 있다. 이처럼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모으면서 회관과 동향 상인들 간의 이익 관계는 더 두터워졌고 회관은 상인 집단 소유제 성격을 띠게 되었다.

 

 

2 _ 회관의 신

 

모든 회관마다 모시는 신()이 있는데, 각각의 특징에 따라 크게 향토신, 복록재신, 항업신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이들 간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진상 회관이 모시는 관공(關公)은 향토신과 재신의 역할을 맡았다.

 

첫째, 향토신이다. 많은 지역에서 각자의 향토신을 모시는데, 지역마다 제사를 모시는 신이 다르다. 예를 들어 안휘(安徽) 사람들은 주자(朱子)를 모시고, 복건(福建) 사람들은 임묵양(林默娘)을 천후성모로 섬기며, 강남(江南) 사람들은 준제(准提)에게 제사를 지내고 절강(浙江) 사람들은 오원(伍員)을 모신다. 산서 사람들은 같은 고향 사람인 관우(關羽)를 관성대제로 섬기는데, 전국 각지의 산서회관의 주요 향토신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진상(晉商)의 흔적에 따라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관제묘는 점차 전국 각지의 진상(晉商)을 대표하는 건축이 되었다.

 

둘째, 업종별 전문 신이다. 대부분의 회관은 상업회관의 형식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회관마다 업종에 맞는 보호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이것은 회관이 모시는 신의 체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구리, , 주석, 석탄업은 태상노군(太上老君)을 모신다. 북경 광거문(廣渠門) 내 노신암(爐神庵)의 『노신암노군전재건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상노군을 화로의 신으로 모신다는 내용은 옛 문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추측해 볼 수 있다. 어쩌면 태상노군의 집에 대대로 내려오는 연단 화로가 있어 납과 수은을 황백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또 어떤 다른 근거가 있는가? 오산우(吾山右)가 북경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주로 구리, , 주석, 석탄 등을 취급하였다. 이것은 모두 화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태상노군을 보호신으로 여겼다. “태상노군은 도교의 창시자 노자의 호()이다. ()과 홍()을 제련하고 불을 다스리는 공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철을 주조하거나 솥을 수리하는 등 불과 관련된 업종은 태상노군을 자신들의 신으로 모셨다. 벽돌이나 기와를 굽거나 토기를 만드는 업종은 태상노군 외에 토지신, 산신, 우신(牛神), 마신(馬神) 등도 모셨다. 그 이유는 땅과 산은 이들 업종의 원료를 가져다주고, 소와 말은 재료를 땅에서 파고 캐거나 운반하는 짐꾼이었기 때문이었다. 염직업은 매()와 갈() 두 신을 모셨다. 북경 전문(前門) 밖 산서(山西) 안료회관의 『선옹묘(仙翁廟)재건비』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회관의 정전(正殿)은 진무궁(?武宮)이며 좌측은 관성제군(關聖帝君:관우), 현단(玄壇), 재신이, 우측은 매와 갈 두 신이 있다.” 민간에서는 매와 갈 두 사람이 옷감에 물들이는 방법을 발명한 것으로 믿고 있어 안료회관과 염방(染坊: 염색 작업을 하던 곳) 공소에서는 매와 갈 두 신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매년 4 14일과 9 9일에 안료업종과 염직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매와 갈에게 제사를 지낸다. 또한 매갈주(梅葛酒)를 마시는 풍습이 있는데, 업종의 번영과 후대에 계속 이어져나가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진상 가운데 술 제조 관련 업종 사람들은 관제와 주선(이백, 두강, 여조)에게 제사를 지내고, 식초 제조 관련 사람들은 식초신과 수신(水神)에게, () 관련 업종 사람들은 육우(陸羽)를 모셨다.

 

셋째, 재신(財神)을 모시는 것이다. 재신은 멀리 집을 떠나 돈을 벌러 나온 상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민간에서는 재신이 조공원수(趙公元帥) 또는 조현단(趙玄壇)으로도 불리는 조공명(趙公明)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부분 회관에서 조공명을 모신다. 이밖에도 증복재신(增福財神, 복과 재물의 신)을 모시기도 하였다. 산서 임양(臨襄)회관의 『임양회관재건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협천대제, 증복재신, 현단, 화덕진군, 주선존신, 보살존신, 마왕 등의 신상(神像)을 모셨다.” 재신이 비간(比干)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데, 비간은 회관이 모시는 또 다른 재신이다. 특히 진상들이 대다수 회관에서 모시는 신은 역시 다름 아닌 관우이다. 관우는 향토신과 재신을 겸하는 신이다.

 

향토신과 업종신, 그리고 재신 외에도 회관에서는 종종 자신들을 지켜주는 또 다른 보호신을 모셨는데 대표적인 예가 불의 신, 화덕진군(火德眞君)이다. 북경의 산섬회관과 천진의 산서회관에는 금룡사대왕(金龍四大王) 상이 있으며 관제와 함께 제사를 모신다. 천진 산서회관 내의 비에 이렇게 적고 있다. “회관 안의 금룡사대왕 신상 앞에서 극단 사람들을 초청하여 하루 동안 연극을 하게 하였는데 이는 신의 가호와 평안무사를 기원하기 위함이었다.” 금룡사대왕 숭배는 중국 민간에서 비교적 늦게 흥기한 신앙으로, 수로 운반을 보호하는 독특한 역할을 하였다. 명청 시기 민간 신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산서회관의 ‘금룡사대왕행적비’는 진상들이 운하에 얼마나 의지했는지 알 수 있다.

 

신선신앙은 각 업종별로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들 신의 기원을 살펴보면, 유가, 불가, 도가 등에서 왔는데 유, , 선이 함께 합쳐진 것도 있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도 있다. 헌원, 삼황은 유가에 속하며, 매와 갈, 하신(河神), 옥황대제, 나조(羅祖) 등은 도가의 신선들이며, 관제는 유, , 선이 모두 모신다. 이밖에 이백, 두강, 장비, 채륜 등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에 속한다.

 

중농억상의 사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까닭에 중국 고대 시기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는 자신들을 엮어주고, 소비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일종의 효과적인 기제가 필요하였다. 폐쇄적인 문화배경 아래 상업조직은 사람들의 공통된 신앙을 이용해 효과적인 상회 조직을 만듦으로써 상업 발전과 전체 사회의 ‘상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드높이고자 하였다.

 

0 comments
작성자 패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