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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9/2016.05] 연구성과 소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7 조회수 47

연구성과 소개

 

손승희, [만주국의 중국적 관행의 제거와 변용 - 糧棧 폐지를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4輯, 2016.3, pp.265-314


본 연구는 만주국 성립 전후의 역사적인 연속선상에서, 만주국이 중국적 관행인 ‘糧棧’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으며 어떤 식으로 새로운 관행의 탄생을 도모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동북사회를 보다 장기적인 시각에서 파악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이를 통해 동북 대두의 유통구조의 변화와 양잔의 존재양태를 드러내고자 했다.

  

만주국 수립 전 동북의 대두유통에서 양잔은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농민에게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양잔은 各省 官銀號를 통해 군벌정권과도 밀접했고, 聯號관계를 통해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동북 내의 유력한 상인세력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만주국은 국가 수립 후 양잔과 권력, 양잔과 농민관계를 단절시키고자 했다. 우선 양잔과 권력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해 滿洲中央銀行을 설립하여 각 성 관은호를 병합하고 그 산하에 있던 양잔을 부속시켜 버렸다. 이로써 권력과 밀접한 ‘官商’은 몰락했다. 그러나 농촌에서 농민을 상대로 대두를 집산하던 각지의 중소양잔의 역할은 여전히 강고했다.

  

양잔의 여러 기능 중 본질적인 것은 중간상인으로서의 대두의 集散과 分散기능이었다. 그러나 만주국은 이러한 성격을 부인하고, 양잔을 농민과 수출상 사이에서 ‘중간착취’를 하는 고리대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이에 따라 만주국은 양잔 폐지 방침을 확정하고, 양잔을 배제한 채 농민과 수출상을 직접 연결시키고자 했다. 양잔과 농민 사이를 단절하기 위해 金融合作社를 설립하여 농민에게 자금을 융통해주는 제도를 만들었지만, 담보를 요구했기 때문에 빈농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조치가 農事合作社의 설립이었다. 특히 농사합작사 산하에 交易場, 農業倉庫, 잡화점 등을 설치함으로써 농사합작사는 이전에 양잔이 하던 업무의 상당부분을 흡수했다. 이로 인해 지방의 중소양잔이 받은 타격은 컸다.

  

그러나 양잔의 농민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되었다고 해도 제반 시스템의 불비로 인해 농사합작사 부설 교역장이나 농업창고에서의 양잔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불만으로 인해 농민들의 교역장 기피현상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교역장 기피는 암암리에 교역장 외 거래를 형성하게 했고 이는 양잔을 존속시키는 토양으로 작용했다.

  

양잔의 완전 제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만주국은 이제 양잔의 활용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즉 양잔의 ‘제거’에서 ‘변용’으로 양잔정책이 변화했다. 그것은 특산전관공사를 설립하여 대두의 유통을 일원화하면서도 실제로는 기층사회의 대두 집산을 양잔이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개별 양잔에 대해서는 양잔조합을 조직하여 양잔이 이에 가입하도록 규정하고 이를 통해 지방양잔을 통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糧棧組合과 專管公社 사이에는 特約收買人을 둠으로써 특정 일본기업이 대두유통을 독점하게 하고, 전관공사를 통해 대두가 국가에 귀속되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만주국은 대두의 유통구조를 더욱 복잡하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이상의 만주국의 양잔 폐지 방침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원인은 만주국이 양잔의 중간상인으로서의 기능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잔을 통한 거래’라고 하는 익숙함이 주는 편리함과 정서적인 안정감은 관행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더욱이 양잔 관행은 동북의 지역성에 기반을 둔 사회경제적 필요에 의해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변하지 않는 한 관행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만주국의 양잔 폐지방침은 중국인 중심의 대두 유통구조를 일본인 중심으로 바꾸고, 합작사 조직을 통해 농민을 통제하고자 했던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중간착취’를 제거하기 위해 양잔을 폐지해야 한다고 했던 만주국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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