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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9/2016.05]논단_산둥(山東)과 의화단운동-지역의 관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7 조회수 95

논단_산둥(山東)과 의화단운동-지역의 관점

 

이은상 _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


의화단운동은 청말(淸末)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신해혁명 이전 발생한 대규모의 무력 충돌이다. 의화단운동의 배외적(排外的) 성격은 의화단이 중국기독교민과 외국선교사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표현되었다. 이것은 중외관계(中外關係)에 엄중한 위기를 가져와 외국 열강의 군사적 간섭을 가져왔다. 청조(淸朝)는 1900년 6월 말 열강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의화단을 공인하였다. 아울러 ‘베이징 공사관 포위’(Siege of Peking)라는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결국 열강에 의해 공사관 포위는 해제되고 청정(淸廷)은 시안(西安)으로 도피하였다. 톈진(天津)에 이어 베이징을 점령한 열강은 의화단을 진압하고 중국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였다. 의화단 전쟁(Boxer War) 이후 20세기 초 10년 간 청조는 일련의 개혁 조치를 실행하였으나 1911년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1900년 이 해는 중국 역사상 분수령이 되었다. 


의화단운동은 중국인과 서양인의 심중에 영향력을 주는 신화(myth)를 형성하였다. 20세기 초 서양에서 의화단은 ‘황화(黃禍)의 화신(化身)’으로 간주되었다. 의화단의 언행은 서양인에게 ‘위기, 외국인 혐오, 비이성(非理性), 야만’ 등을 연상시켰다. 중국의 지식인에게도 의화단은 미신과 낙후(落後)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국의 민족주의와 배외주의의 고조기에 의화단운동은 ‘애국주의’와 ‘제국주의 반대’의 상징으로 재평가되었다. 의화단의 신화화는 문화대혁명 시기 정점에 달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역사’로서의 의화단과 ‘신화’로서의 의화단은 구별되었지만 중국학계에서 의화단운동은 여전히 제국주의의 중국 분할(瓜分)에 과감하게 저항한 ‘반제애국운동(反帝愛國運動)’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의화단운동의 발생 원인에서 제국주의가 중요한 요소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의화단운동을 반제운동으로 일원화하여 평가하면 의화단이 어떤 특수한 지역적 환경에서 발생하였는지에 대한 복잡한 동기를 단순화하게 되고 의화단운동의 다양한 측면을 사상시킬 우려가 크다. 이런 점에서 ‘지역의 관점’(local perspective)에서 의화단운동 연구는 중요하다.


의화단운동은 국내외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지만, 기본적으로 지역적 특색을 갖는 운동이었다. 1900년 여름 산시(山西), 내몽고,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일부 의화단이 출현한 것 말고, 이 운동은 실제로 화북 평원의 산둥과 즈리(直隷)에 한정되었다. 이 운동은 산둥 특히, 산둥서부에서 발발하였다. 따라서 19세기 후반 산둥의 사회경제적 환경은 의화단운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산둥서부는 황하 이북의 화북평원 지대인 서북부와 운하 서쪽의 서남부 지역을 포괄하고 있다. 산둥서부는 1855년 장쑤(江蘇)로 흐르던 황하가 산둥서부로 물길을 바꾸는(大改道) 사건으로 상습적인 수재 지구가 되었다. 가뭄으로 인한 피해의 영향도 커서 대다수 농민은 사망하거나 가옥과 토지를 상실하고 고향을 떠나 유민(流民)이 되어야 했다. 산둥서부 유민의 경로는 북으로 즈리, 남으로 허난(河南)·장쑤 등지로 연결되고 있는데, 특히 경제적 선진지역인 장쑤성은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활로를 모색하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사염(私鹽)이나 아편 등 불법 경제활동의 밀매 루트도 산둥서부에서 장쑤 등지로 이어지고 있으며, 민간종교나 권회(拳會. boxer)의 전파 경로도 이와 거의 일치하였다.


청대 대운하도 산둥서부를 관통하였다. 대운하는 원래 조량(漕糧)을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를 통해 남북의 화물이 오가고 관리와 부유한 상인이 왕래하는 교통로이자 무역로로 상품 경제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렇지만 18세기 말 이후 운하 행정의 이완으로 운하의 정상적 이용에 차질이 발생하자, 조량 수송이 바다를 이용한 해운으로 바뀌는 등 일련의 개혁 조치로, 운하를 이용한 운송은 점차 쇠퇴하였다. 운하의 기능 상실은 산둥서부 린칭(臨淸)·더저우(德州) 등 운하 연변 도시의 쇠락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운수노동자인 수수(水手) 집단의 실직으로 이어졌다. 황하와 운하가 지나는 지리적 환경은 이처럼 산둥서부의 사회경제적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산둥서부는 황하와 운하의 배수 능력 부족으로 비가 오면 범람이 잦고 토양이 염화되어, 동쪽에 위치한 산둥반도구에 비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또한 산둥서남부 차오저우부(曹州府)는 사염 밀매, 아편 생산의 온상이었다. 인문적 수준을 살펴보면, 진사(進士)나 거인(擧人)의 규모 면에서 산둥반도구가 상위, 산둥서부가 하위를 차지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차오저우부가 가장 적었다. 엘리트층의 분포 면에서 산둥반도구와 산둥서부 간의 대조적 차이는 지역의 인문적 수준과 경제력 간에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산둥과 인근 화북평원은 상무(尙武)의 전통으로도 유명하였다. 일찍이 북송(北宋) 말기 쑹장(宋江)의 반란을 원형으로 한 소설 『수호전』에 등장하는 영웅호걸의 근거지는 바로 산둥서남부 량산(梁山)이었다. 물론 산둥인의 상무의 전통은 한편으로는 강인하고 용맹스러우며 충성을 다하는 병사를 배출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악화될 경우 비적을 양산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차오저우부가 19세기 후반 ‘비적의 고향’으로 명성이 높았던 것은 경제적 어려움, 사염과 아편 밀매, 엘리트층의 부재, 상무의 전통 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의화단은 대부분 1890년대 초 이래 계속된 자연재해로 빈곤에 내몰린 농촌청년이 많았다. 이들은 ‘강신부체(降神附體, spirit possession), 도창불입(刀槍不入, invulnerability)’ 곧, 신(神)이 빙의하여 창과 칼로도 몸을 상해(傷害)하지 못하게 하는 불사신이 된다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 의화단의 기원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도 불구하고 강신부체 의식이 의화단 형성, 발전의 중요 요소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강신부체 의식은 산둥서북부 신권(神拳, Spirit Boxer)에서 시작되었는데 누구라도 공개적으로 연습하고 쉽게 학습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산둥서남부 大刀會((Big Sward Society)의 도창불입 신앙과 결합되어 의화단의 중요한 의식으로 보편화되었다. 1898년부터 계속된 화북평원의 가뭄 역시 의화단의 발전을 촉진한 주요 요소였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한 불안, 굶주림에 대한 공포는 모험과 극단적 행동을 가져오게 한다. 빈곤한 화북 농촌청년들은 쉽게 의화단에 참여하여 강신부체 의식을 습득하고 가뭄을 야기한 기독교(洋敎), 양물(洋物)에 대한 폭력에 가담하였다.


산둥(서)남부와 산둥 교계(交界)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자원 확보를 둘러싸고 집단 폭력 전통이 장기화되었다. 그것은 파벌 투쟁, 도비(盜匪), 민간종교결사의 폭력, 선교사와 반교(反敎) 충돌 등으로 표현되었다. 서방 제국주의의 침입과 기독교 전파라는 외재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의화단의 폭력은 화북평원의 집단 폭력 전통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기독교사는 일반적으로 박해(수난사) 혹은 충돌의 역사로 이해되지만, 지역의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다. 청말 산둥의 천주교 선교구는 산둥동부, 산둥남부, 산둥북부 등 셋으로 나누어졌다. 그에 따르면 산둥서북부는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서남부는 독일 성언회(聖言會,  Society of Divine Word) 소속이었다. 도비가 많기로 유명한 차오저우부 등 산둥서남부는 원래 선교 활동의 불모지였으나 1885년부터 성언회가 관할하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1900년 전후 산둥의 천주교민 8만 명 중에서 산둥남부 교구는 44,000명으로 산둥 전체 교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 성공은 선교사의 정력적 활동, 독일 정부의 후원 뿐 아니라 자원이 부족한 산둥서남부에서 천주교회가 그 경쟁을 둘러싼 쟁탈에 가담함으로써 흡인력 있는 사회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언회는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원 경쟁에 뛰어들었다. 선교사는 기독교민과 비(非)기독교민 간의 토지, 수리(水利) 문제 같은 소송 안건에 개입하여 교민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냈다. 촌락민은 약세를 전환하기 위해 선교사와 연맹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도비가 집단 거주하는 촌락민 전체가 체포의 위협을 면하기 위해 천주교에 귀의하거나 민간종교 성원이 탄압을 피하기 위해 천주교에 가입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반면 라자리스트(遣使會, Lazarist) 관할의 즈리 정딩부(正定府) 천주교민은 민간종교 성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집단 귀의의 사례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선교사가 교민의 법률적 분쟁에 개입 혹은 후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신 천주교회는 지방당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포교와 자선사업을 진행하였고 본국의 기금을 지역사회에 투입함으로써 지역사회와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였다. 장시성(江西省) 향촌의 천주교회 역시 산둥과 다르게 전체 촌락 구성원이 기독교로 귀의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 지역에서 반교(反敎) 사건의 대부분은 기독교 본래의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천주교가 지역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인 혹은 가정 분규, 빈곤 등의 이유 때문에 발생하였다. 1860년 기독교 선교가 합법화된 이후 의화단운동이 발생한 1900년까지 장시성 향촌의 천주교회는 ‘기본적’으로 지역사회에 적응하였다.


이처럼 지역의 관점에서 의화단운동에 주목하게 되면 반제로서의 의화단, 대립과 충돌의 반기독교운동사로만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앙과 국가 중심의 거대 담론이 아닌 지역의 관점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풍부한 자료, 현지조사 성과 등이 뒷받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image.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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