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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9/2016.05] 기획_大邱華僑史話 (5) 1931년 7월 화교배척사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7 조회수 53

기획_大邱華僑史話 (5)    1931년 7월 화교배척사건

 

 

1931년 7월 화교배척사건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1931년 7월 2일자 『조선일보』 호외의 제목은 ‘중국 관민 8백 명 습격 다수 동포 위급 長春 三姓堡문제 중대화 일 주둔군 출동’이었다. 제목 하단의 기사 가운데 “2일 새벽 三姓堡의 중국 관민 8백여 명이 동원되어 조선 농민과 충돌 조선 농민이 殺傷되었다”는 내용이 게재되었다. 조선 농민이 살상되었다는 것은 오보였지만, 이 『조선일보』의 호외를 읽거나 이를 소문으로 들은 조선인들은 화교와 그들의 주택과 상점을 무자비하게 습격했다. 이른바 만보산사건이었다.

 

3일 오전 1시10분 인천부에서 화교 습격사건이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특히 5일 밤 평양에서는 대량의 화교 학살이 자행되었다. 조선총독부경무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인해 화교 119명이 사망했고, 45명이 중상, 150명이 경상을 입었는데, 평양에서만 사망 95명, 중상 33명, 경상63명이 발생했다.

 

중국 측은 사망자 수 142명, 중상자 수 120명, 경상자 수 426명, 재산피해액 416만 3,103.07원으로 조선총독부경무국보다 훨씬 피해자가 많았다. 이 사건을 조사한 국제연맹의 리튼조사단 보고서에는 사망자 수 127명, 부상자 수 392명, 재산손실액 250만원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 엄청난 사건이 대구·경북지역에서 발생한 것은 5일 밤 평양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다. 6일 심야 0시30분 김천군 김천읍 화교 포목상점에 돌을 던진 사건이 발생했다. 오후 4시 경산군 경산읍 잡화점 德源茂에 金學祥이 술이 취한 채 점포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고 주인을 구타했다.

  

7일에는 대구부의 시내 각지에서 화교를 위협, 협박, 투석하거나 호빵을 먹고 돈을 지불하지 않은 채 도망가거나 폭언을 일삼는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군중은 중화요리점(東亞樓, 仁盛樓, 東昇園)과 호빵집, 포목상점뿐 아니라 야채재배를 하는 화교 농민, 노동자 등을 구분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군중은 7월 8일 오후 6시 대구부 西城町 2-36번지에 위치한 于鴻運 경영의 중화요리점에 가서 폭언을 하고, 1시간 30분 후에는 “중국인은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조선총독부경무국이 작성한 경상북도의 화교피해 보고서

  

9일부터 사태는 대구·경북지역의 동해안으로 확산되었다. 9일 밤에는 영일군 포항면 청년동맹원 19명이 화교 습격 계획을 세워 실행하려다 검속되었고, 11일 오후 9시에는 안동군 북후면에서 군중 60명이 중국인을 습격하려는 계획이 탄로나 4명이 검속되었다. 12일 오전 1시 30분 영일군 창주면 대포리 중국인 상점 외 주택 1호가 4-5명의 군중의 침입을 받고 유리창이 파괴되는 등의 재산손실 22원이 발생했다. 오전 5시 20분 군중 4-5명이 영일군 포항면의 화교 포목상점에 침입하여 포목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총독부경무국 보고서에 따르면, 대구·경북지역의 화교 폭행 및 협박사건은 39건(김천2건, 대구24건, 경산2건, 청도1건, 칠곡2건, 포항3건, 영일2건, 기타3건), 투석 및 기물파손 12건, 호빵을 먹은 후 미지불 도망 6건, 야채약탈 1건이었다. 조선 전체의 인적피해 상황으로 볼 때 대구·경북지역의 피해상황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경무국 보고서에 누락된 사건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영일군 소재의 포목상인 東順和와 曲宗源 상점이 13일 심야 군중 5-6명의 습격을 받고 포목이 하수구에 투기된 사건이 발생했다.1) 영천군 소재의 德聚祥이 군중 100-200명으로부터 습격을 받은 사건도 있었다.2) 어쨌든 조선총독부는 국제문제화 된 이 사건을 가능한 한 은폐 축소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경무국의 피해조사 보고서보다는 실제 피해가 더 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처럼 화교배척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자, 대구·경북지역의 화교가 본국으로 귀국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고령군의 화교 포목상 7-8호가 9월 30일 상품을 헐값에 팔고 모두 귀국했으며3), 이러한 사례는 포항4), 예천5), 선산6), 왜관7)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구부의 포목상 復聚東은 부산의 일본인 포목도매상인 다카세합명회사(高?合名會社)에 2만원, 기타 거래처에 1만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는데 이를 갚지 않은 채 점주 孫紹崑이 귀국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8) 復聚東 이외에도 대구부의 화상 상당수가 상점의 문을 닫고 귀국하는 사례가 속출했다.9)

  

대구부의 은행은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화상에 대한 대출을 기피했다. 1931년 9월의 화교에 대한 대출액은 2만 4,000원인데 1932년 1월에는 1,000원으로 격감했다.10) 화상에 대한 대출 기피는 화상의 자금사정을 더욱 악화시켜 폐점하는 상점이 속출했다.

  

1930년 10월 현재 대구·경북지역의 포목상점은 815개소 있었는데 이 가운데 조선인 상점이 550개소, 화교 상점이 217개소, 일본인 상점이 47개소였다. 화교 포목상점이 전체의 약 3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1931년 7월 화교배척사건과 9월 18일 발생한 만주사변으로 화교경제는 큰 타격을 입고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참고문헌]

朝鮮總督府警務局, 『鮮內ニ於ケル支那人排斥事件ノ槪況』(조선내 지나인배척사건의 개황), 1931년7월.

中央公論社編, 「リットン報告書」(리튼보고서), 『中央公論』1932년11월호 별책부록.

李正熙 , 『朝鮮華僑と近代東アジア』(조선화교와 근대동아시아), 京都大學學術出版會, 2012년.




1) 「중국인습격」, 『매일신보』, 1931년 7월 15일.


 

2) 1931년12월3일發, 조선총독부외사과장이 경무국장에 보낸 공문, 「朝鮮居留中國人保護ニ關スル件」, 『昭和 五·六·七 各國領事館往復』(국가기록원소장).


 

3) 「상품경매후 중국인철귀 고령 군민이 대활동」, 『동아일보』, 1931년10월4일.


 

4) 「포항중인귀국」, 『조선일보』, 1931년12월15일.


 

5) 「예천 중국인 속속 귀국중」, 『동아일보』, 1931년12월3일.


 

6) 「선산 중국인 귀국 준비중」, 『조선일보』, 1931년10월25일.


 

7) 「왜관 중국인 귀국을 준비」, 『동아일보』, 1931년12월6일.


 

8) 「화상의 음험한 수단 빗진채 高飛遠走」, 『매일신보』1931년9월30일.


 

9) 「은행경계로 중국상인 곤경, 대구에 잇는 중국상인은 폐점 귀국자 속출」, 『동아일보』, 1931년10월9일.


 

10) 京城商工會議所, 「滿洲事變の朝鮮に及ぼした經濟的影響」, 『經濟月報』제196호, 1932년4월,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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