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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9/2016.05] 기획_한국중화요리, 그 ‘식(食)’과 ‘설(說)’ (15)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7 조회수 120

기획_한국중화요리, 그 ‘식(食)’과 ‘설(說)’ (15)

 

 

한국 화교사회에서 ‘호떡집(胡餠家)’을 찾다

주희풍 _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호병가(胡餠家), 또는 호병상(胡餠商)은 1920년대 ‘호떡집’의 한자 표기이다.1) 사진 속 간판 중앙 상단의 ‘華商(화상, 화교가 운영하는 상점)’이라는 글자와 우측의 ‘包子(바오즈, 우리의 왕만두와 유사한 만두나 소가 든 찐빵)’, 좌측의 ‘中華빵(중화빵, 당시 중국의 병(餠) 종류를 말함)’이라는 표기로 볼 때, 당시의 ‘호떡집’은 지금의 중국 과자점과 만두가게의 혼합 형태로 보인다.


1959년 명동거리의 한 호떡집 취천루(聚泉樓)


호떡집은 중화요리점과 함께 당시 한국 화교들의 주요 생계수단이었다. 이것을 한국에서는 ‘호떡집’이라고 불렀는데, 아래 기사에서 “쌀가루와 호떡 고물이 간간히 떨어저잇섯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호떡집’에서 파는 전통중국과자나 병(餠) 종류를 통틀어 ‘호떡’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1931. 06. 02. 동아일보 2면 사회면 스크랩


-기사 내용의 일부-


        “그들이자고간 자리에는 풀을 뜨더펼처노흔 것은 물론이오 신문지 조각이 수백장씩 흐터저잇고 쌀가루와 호떡 고물이 간간히 떨어저잇섯다고한다”2)


필자는 당시 ‘호떡집’의 원형을 찾으러 나섰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쉽지 않을뿐더러 당시 ‘호떡집’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위 단서들을 토대로 2016년 현재 한국의 화교사회 속에서 당시 ‘호떡집’의 맥을 이어온 가게를 찾아 나섰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집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자료조사를 하면서 많은 화교들, 특히 연배가 있는 화교들한테서 공통된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호떡집’이라는 말에서 오는 반감인데, 진유광(번역본, 2009:126)의 책에서도 당시 한국의 “화교의 입장에서 이 ‘호(胡)’라는 호칭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의 화교들은 호(胡)자가 중국인을 비하하는데 쓰인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어에서 호(胡)자는 대부분이 2,000년 전 실크로드 시대 중국 서역에서 넘어 온 물건들에 붙이는 글자였다. 예를 들면, 호병(胡甁)에는 중국인을 비하하는 뉘앙스는 없으며 “중국 당대(唐代)에 유행했던 서역 전래의 술 붓는 그릇의 하나”라고 여겨지는 곡선이 아름다운 술병일 뿐이다. 중국의 정통 악기인 호금(胡琴)도 민족적 비하라는 뉘앙스를 풍기지는 않는다. 또한 한국의 화교를 포함해서 중국인들은 당근을 ‘胡蘿蔔(후루어보)’라고 하고 참깨를 胡麻(후마)나 芝麻(지마), 호두를 胡桃(후타오) 혹은 核桃(허타오)이라고 하는데, 이 모든 것은 중국 서역에서 건너온 것들이다. 이렇듯 ‘호떡집’의 호떡 역시 중국 서역에서 건너온 병(餠)라는 것일 뿐, 민족적 비하가 섞여 있지는 않다. 참고로 중국 대보름에 먹는 월병(月餠) 역시도 예전에는 ‘후빙(胡餠)’ 즉 한국어로 옮기면 ‘호떡’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그래도 ‘호떡집’에서 민족적 비하 뉘앙스를 느낀다면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3) 시기에 유행하던 “호떡집에 불났다”와 같은 관용구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진유광(번역본, 2009:125)에 따르면 “1920년대에는 한국 전역에 대략 400여 가구의 호떡집이 있었으며”, “지금은 명동거리에 위치한 취천루(聚泉樓) 한 곳만 남아 있다”고 한다.


서울 명동거리에 위치한 취천루 본점


취천루는 70년 전통을 가기고 있는 가게이다. 보시다시피 현재는 만두전문점으로 운영되고 있고 전통중국과자와 찐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경제적 문제로 인해 만두전문점으로 바꾸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통중국과자는 손이 많이 가고 정교하면서도 세심한 작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현재 전통중국과자점은 찾아보기 매우 힘든 업종이 되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중국북방지역의 전통과자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전통중국과자점이 있는데 100년 가까이 그 전통을 이어왔다고 한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복래춘(復來春)


복래춘(復來春), 인천 선림동의 복래춘에서는 매우 다양한 전통중국과자를 판매하고 있다. 바오즈와 찐빵은 판매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 화교들의 문화적 상징과 같은 보보(饽饽), 즉 만터우(饅頭)4)를 주문 판매하고 있다.


복래춘(復來春)의 보보(饽饽) 만터우(饅頭)


보보(만터우)에는 붉은 대추를 꽂은 것도 있고 꽂지 않은 것도 있는데 사진과 같이 붉은 대추를 꽂은 것은 주로 제사 때 많이 사용된다.5)

  

서울 명동 한성화교소학교 앞에는 40년 전통의 도향촌(稻香村)이 있다. 도향촌도 바오즈와 찐빵을 판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수요에 맞게 다양한 전통중국과자를 선물세트형식으로 판매한다는 점과 240년 전통 북경의 도향촌(稻香村)과 상호가 같다는 것이 특이하다.


서울 한성화교초등학교 앞에 위치하는 도향촌(稻香村)


흥미로운 것은 도향촌에서 판매되고 있는 전통중국과자 중에서 한국화교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전통중국과자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와디수(襪底酥)와 좡위안빙(狀元餠)이 그것인데, 와디수는 2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 장쑤성 쿤산시 진시진(江蘇省崑山市錦溪?)의 전통중국과자이고, 좡위안빙은 후베이성 톈먼시(湖北省天門市)의 전통중국과자이다. 도향촌에 따르면 와디수는 참깨를 갈아 만든 소를 넣어 고소한 맛과 달지 않은 풍미가 조화를 이루어 그 특유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좡위안빙은 팥과 대추로 만든 쫀득한 소를 넣어 만들어 부드럽고 달콤하여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전통중국과자라고 한다.


도향촌(稻香村)의 와디수(襪底酥) 도향촌(稻香村)의 좡위안빙(狀元餠)


마지막으로 부산 차이나타운에는 삼생원(三生園)이 있다. 50년 전통의 삼생원은 이 글에서 찾는, 당시 ‘호떡집’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영업을 하는 곳이다. 먼저 가게 한곳에는 메뉴를 진열하는 공간이 따로 있다는 점과 간판의 중앙 상단에 ‘華商(화상)’이라는 두 글자가 있다는 점, 그리고 우측에는 ‘包子(바오즈)’, 좌측에 ‘中式點心(중스뎐신, 중국의 모든 과자나 빵류의 총칭)’이 있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호떡집’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산차이나 타운의 위치한 중국과자점 삼생원(三生園)


부산 차이나타운에서 전통 ‘호떡집’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가게를 찾았다는 것이 매우 뜻밖이었다. 삼생원에서는 당시 한국 화교사회에서 즐겨 먹던 ‘호떡집’의 메뉴 그대로 팔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또우지앙(豆漿, 콩국과 두유와 유사) 요우티아오(油條,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 기름에 튀긴 중국의 빵), 바오즈, 지단빙(鸡蛋饼)6), 주화빙菊花饼, 가오빙(烤饼) 등이라고 한다.


삼생원(三生園)의 또우지앙(豆漿)과 요우티아오(油條)


또우지앙과 요우티아오는 중국을 대표적인 음식이며 중국의 아침식사 대용으로 즐기는 음식인데, 당시 화교사회에서도 아침에는 또우지앙과 요우티아오를 즐겨 먹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삼생원은 실제로 당시 또우지앙과 요우티아오를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삼생원 바오즈는 전형적인 초창기 한국 화교들이 만든 바오즈의 모양 그대로이다. 한국의 왕만두와 만드는 기법과 과정이 거의 일치한다. 특징이라고 한다면 발효된 밀가루반죽을 사용하여 찐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의 화교들은 ‘호떡집’을 ‘包子鋪(바오즈푸, 만두가게)’라고 할 정도로 바오즈는 ‘호떡집’의 주력상품이었다.


삼생원(三生園)의 바오즈(包子)


지단빙(鸡蛋饼), 주화빙菊花饼, 가오빙(烤饼)은 한국 화교사회에서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음식이다. 몇 명의 한국 화교들이 그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경제성이 별로 없어 이제는 만들어 팔지 않는다고 한다.


 

삼생원(三生園)의 지단빙(鸡蛋饼)


삼생원(三生園)의 주화빙菊花饼


삼생원(三生園)의 가오빙(烤饼)


이 글은 사진 한 장과 당시의 짤막한 기사 한편, 그리고 탐방의 형식을 통해 현재 한국의 화교사회 속에서 이른바 초창기 화교의 ‘호떡집’을 찾고자 했다. 그 결과 부산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삼생원이 그것에 가까운 영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뜻밖의 성과도 거두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화빙과 가오빙을 찾은 것이다. 주화빙을 삼생원에서는 팥빵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었다. 어쩌면 주화빙을 중국식 ‘팥빵’으로 번역해 부르는 것이 손님이 이 음식을 빠르게 이해하게 하는 한 방법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번역이란 등가어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고 문화와 문화를 횡단하는 고리이기도 하다. ‘병(餠)’이라는 문화가 중국 서역의 호(胡)라는 문화와 횡단하여 ‘호병(胡餠)’이 되었듯이, 떡이라는 문화와 호병(胡餠)의 문화가 횡단하여 ‘호떡’이 되었던 것은 서로 다른 문화의 교류 속에서 발생한 필연적 현상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진유광(번역본, 2009) 진유관 저 이용재역 《중국인 디아스포라 한국화교 이야기》 한국학술정보(주).


이 글에서 인용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 http://blog.naver.com/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http://newslibrary.naver.com/)

* 취천루(聚泉樓) 명동 본점 제공

* 인천 차이나타운 복래춘(復來春) 제공

* 인천 차이나타운 복래춘(復來春) 제공

* 서울 명동 도향촌(稻香村) 제공

* 서울 명동 도향촌(稻香村) 제공

* 서울 명동 도향촌(稻香村) 제공

* 부산 차이나타운에는 삼생원(三生園) 제공

* 부산 차이나타운에는 삼생원(三生園) 제공

* 부산 차이나타운에는 삼생원(三生園) 제공

* 부산 차이나타운에는 삼생원(三生園) 제공

* 부산 차이나타운에는 삼생원(三生園) 제공

* 부산 차이나타운에는 삼생원(三生園) 제공



1) 1921. 02. 26. 동아일보 3면 사회면 기사, 1921. 06. 16. 동아일보 3면 사회면 기사 참고.


2) 당시 사용되던 띄어쓰기와 맞춤법으로 그대로 옮겨 썼다.


3)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만보산지역에서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벌인 유혈사태.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한 이래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만주 등지로 이주하였는데, 중국 동북지방에 이주한 조선인을 또다시 중국대륙 침략에 이용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었다.


4) 보보(만터우)는 밀가루만 발효시켜 만든 찐빵의 일종이다. 주식으로 먹기도 하지만 현재는 주로 제사 때에 사용한다. 


5) 「중국관행웹진」 vol. 67 2016. 03. 《한국중화요리, 그 식(食)과 ‘설(說)’(13)》 참고. ‘보보’는 한자 ‘발(勃)’과 중국어 발음이 같다. ‘보(勃)’자를 중첩하면 ‘보보(勃勃)’가 되는데, 고문(古文)에서는 “사물이 한창 일어나는 현상”의 의미를, 현대 중국어에서는 “왕성하다”, “발랄하다”, “강렬하다”, “욕망이 강렬한 모양” 등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대추가 붉기 때문에 “훨훨 타다(강열하다)”의 의미까지 해서 “오랫동안 강렬하고 왕성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6) 일명 ‘계란빵’이라고 하며 빵 안쪽에는 계란 흰자와 팥을 넣고 빵 겉쪽에는 계란 노른자를 발라 구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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