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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8/2016.04] 논단_시진핑의 브레인 왕후닝(王滬寧) 연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2 조회수 181

논단_시진핑의 브레인 왕후닝(王滬寧) 연구


박승준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중어중국학과


왕후닝(王滬寧ㆍ60). 더 이상 ‘은둔의 책사’도 아니고, 이제야 정치 전면에 나선 ‘흑마(黑馬ㆍ다크호스)도 아니다. 2002년부터 13년째 중국공산당의 중앙 정책연구실 주임을 맡고 있는 중국공산당의 공개된 지낭(智囊ㆍ지혜의 주머니ㆍ브레인)이다. 장쩌민(江澤民) 당 총서기 시절에는 중앙정책연구실 정치팀 팀장(組長)으로, 후진타오(胡錦濤) 시대에는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겸 당 서기처 서기로 당의 브레인 역할과 당무 총괄 담당자 역할을 겸해왔다.


장쩌민의 대표적 업적인 ‘3개 대표이론’, 즉 중국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를 대표하는 정당이 아니라 부르주아(유산계급)를 포함한 모든 인민을 대표하는 정당이라는 이론이 왕후닝의 머리에서 나왔다. 후진타오 시대를 이끌어온 ‘과학적 발전관’, 즉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해야 한다는 국가 목표도 왕후닝의 아이디어를 기초로 만들어졌다. 2012년 시진핑(習近平) 시대가 시작되면서 왕후닝은 25인의 정치국원의 한 명으로 선출됐고, 현재 시진핑 시대를 이끌어 가고 있는 ‘중국의 꿈(中國夢)’과 ‘신 실크로드 전략(一帶一路)’도 그가 책임지고 있는 당 중앙정책연구실의 건의로 수립된 국가전략이다.


물론 왕후닝 혼자서 그런 전략들을 수립한 것은 아니다. 정치, 경제, 철학, 문화, 국제, 농촌, 사회 문제와 당의 건설과 유지를 연구하는 9개 국(局)이라는 방대한 조직을 가진 당 중앙정책연구실의 책임자로서, 왕후닝의 지휘 아래 그런 정책들이 만들어져 왔다.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 그리고 시진핑으로 당 최고 지도자가 바뀌면서도 왕후닝에 대한 신뢰가 이어져 온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특히 시진핑 시대에 들어오면서 왕후닝은 시진핑의 해외순방에 반드시 수행하고, 외국 국가 정상과의 회담에 반드시 참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의 오른팔이던 후야오방(胡耀邦)이 당 총서기를 맡고 있던 시절이던 1981년에서 1987년까지 지금의 왕후닝이 맡고 있던 역할은 마오쩌둥(毛澤東)의 비서 출신으로 좌파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이던 덩리췬(鄧力群)이 수행했다. 당시에는 현재의 중앙정책연구실의 전신인 중앙서기처 연구실이라는 조직이 있었고, 덩리췬이 주임을 맡고 있었다. 후야오방의 후임 당 총서기이던 자오쯔양(趙紫陽) 시절에는 바오퉁(鮑?)이 ‘중앙정치체제 개혁연구실 주임’이란 이름으로 2년 정도의 짧은 기간 당의 브레인 역할을 수행했다. 바오퉁은 1989년 천안문 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에 의해 축출된 자오쯔양과 함께 제거됐다.


왕후닝은 한국전쟁 종전 이후인 1955년에 산둥(山東)성 라이저우(萊州)에서 출생해서 17세에 상하이 사범대학을 다닌 뒤, 베이징(北京) 대학, 칭화(淸華) 대학과 함께 중국 3대 명문대학의 하나인 푸단(?旦) 대학 국제정치학과 대학원에서 학위 과정을 마치고, 교수가 됐다. 1988년부터 2년간은 미 아이오와 대학과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에서 방문교수로 미국을 경험할 기회를 가졌다. 귀국한 뒤에는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주임교수, 법학원 원장을 지냈고, 1995년 장쩌민 전 당 총서기에 발탁돼 당 중앙정책연구실 정치팀 팀장이 되어 베이징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후 당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을 거쳐, 후진타오 시대에 들어가면서 당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으로 발탁됐고, 이후 2012년 11월 시진핑 시대가 출범하면서 정치국원으로 선출됐다.


왕후닝이 베이징으로 발탁되어 올라가기 전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부교수이던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은 상하이(上海)시 당서기 우방궈(吳邦國)였다고 중국 매체들은 기록하고 있다. 우방궈는 개혁개방의 설계사 덩샤오핑의 손에 이끌려 베이징으로 가 당 총서기가 된 상하이시 당서기 출신 장쩌민에게 왕후닝을 등용할 것을 여러 차례 추천했고, 나중에 우방궈가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면서 왕후닝은 베이징으로 가게 되었다. 장쩌민은 그런 왕후닝에게 “내가 당신을 등용하지 않았으면, 상하이 사람들에게 귀찮은 소리를 들을 뻔 했다”는 조크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우방궈가 강력하게 왕후닝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 당규에 따르면, 중앙정책연구실의 주요 임무는 국가의 상황에 맞는 정책의 개발과 각종 당 대회 결정문의 초안, 그에 관련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5년 마다 한 차례씩 개최되는 당의 전국대표대회(당 대회)때 당 총서가 발표해야 하는 공작보고와 당 총서기의 각종 연설문 작성도 중앙정책연구실 소관이고, 전국의 경제 상황에 대한 조사와 자료수집, 보고서 작성, 그리고 당의 이데올로기 문제에 관한 정보수집과 보고서 작성 역시 중앙정책연구실의 중요 임무이다. 우방궈의 추천으로 장쩌민 시대에 중앙정책연구실에 진입한 왕후닝은 장쩌민 시대에 장쩌민의 외국방문과 국내 시찰에 수행인원으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고, 시진핑 시대에 들어와서는 시진핑의 외국방문과 외국정상과의 회담, 시진핑의 국내 시찰에 반드시 수행하고 배석하는 인물로 널리 국내외에 알려졌다.


중국의 국책 연구기관으로는 당중앙정책 연구실과 함께 국무원의 싱크탱크인 국무원연구실이 있고, 당 간부 재교육 기관인 당교(黨校)와 국무원 고급 관료들의 재교육 기관인 국가행정학원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왕후닝은 당중앙정책 연구실 정치팀장, 부주임, 주임으로 지금까지 20년째 중국공산당의 정책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하고, 실제로 정책을 수립해서 당 최고 지도자에게 건의해왔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장쩌민의 ‘3개 대표론’과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시진핑의 ‘중국의 꿈’과 ‘신 실크로드 전략’, 그리고 AIIB(아시아인프라 투자은행) 구상 등이다. 다시 말해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시대에 탄생한 중국공산당의 대내외 전략은 당 총서 구상이라기보다 당 중앙정책연구실의 집단 연구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중국의 경우 그 연구기관의 책임자가 3대 총서기에 걸친 20여 년 동안 왕후닝이라는 인물이 바뀌지 않고 지속적으로 담당해왔다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 대통령이 5년마다 바뀔 때마다 각종 연구기관의 책임자가 거의 대부분 교체되는 것은 물론, 대통령 교체와 관련 없이 남북한 통일문제를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의 책임자 한 사람 갖고 있지 못한 사실과 크게 대조적이다. 그런 우리의 현실이 왕후닝을 갑자기 등장한 혜성으로 보이게 하는 착시(錯視) 현상을 일으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baike.baidu.com/link?url=6Q648KX8WvY__q9Krb4bX9K4191LOTSNu7hxQNx-iQkwbU33o4hFxHvC5OK_boeKCWJLbxBNrqAzL9ERuydq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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