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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8/2016.04] 기획_華北 농촌 관행 조사 (3)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2 조회수 54

기획_華北 농촌 관행 조사 (3)



중국 농촌의 삶을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들: 생존, 혁명, 그리고 마켓 - 3

안병일 _ Saginaw Valley 주립대학


지난 두 번의 연재를 통해,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여아살해/여성인구의 저하에 대처한 생존 전략으로 어떻게 청대 빈농남성들이 ‘데릴사위 결혼’을 선택했는지, 또 계급투쟁의 구호와 집산화로 대표되는 혁명기에는 지주/부농출신의 청년들이 계급세탁을 위해, 딸만 있는 가정들이 가구 내 노동인구수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어떻게 데릴사위제를 이용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데릴사위 결혼’을 다루는 연재로서는 마지막으로 1978년 이후, 소위 개혁개방 정책하에 중국 농민의 삶에 대한 시장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시기, ‘데릴사위 결혼’이 어떻게 농민들의 삶을 변화시키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농촌에서 데릴사위들의 출신배경은 1979년 계급 출신에 기반한 신분의 제약이 철폐되고, 1983년 본격적인 집단농장의 해체를 통해 급격히 변화하였다. 일단, 지난 혁명기 그들의 삶을 제약하던 지주/부농 타이틀이 폐지되어 계급세탁을 하기 위한 청년 지원자들이 사라졌다. 한편 집단농장을 해체하여 각 농민 가정에게 토지 경영에 대한 자유를 부여한 가정승포책임제 (家庭承包?任制)는 새로운 데릴사위의 후보자들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즉 가정승포책임제는 대량의 이주노동자를 배출했는데, 그들이 새로운 데릴사위의 주역이 된 것이다. 실제 1949년에는 5억 4천만 정도로 추정되던 중국의 인구가 1978년에 이르면 9억 6천만으로 80%정도 증가했다. 인구의 대부분이 농업인구라는 산업구조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이러한 증가는 심각한 잉여노동력의 문제를 가져왔다. 그리고 집단농장이 해체되면서 그동안 강제적으로 촌락단위의 집단농장에 묶여있던 이러한 잉여노동력은 농업이외의 부문에서 급격하게 배출되었다. 즉, 나중에 농민공으로 불리게 될 농민출신 이주노동자의 시작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농민출신 이주노동자는 1980년대 초기 지주/부농 출신 청년을 대체하며 새로운 데릴사위의 자원이 되었다. 


실제, B촌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1980년대 초 하남성 출신의 청년 셋이 목공기술을 가지고 B촌으로 취업하여 들어왔다. 이제 막 시장경제를 통해 자본을 모은 몇몇 촌민들이 새로 2층집을 지으면서 전문적인 목공 기술을 가진 이 청년들을 고용한 것이다. 성실하고 솜씨 좋은 이 청년들은 얼마 되지 않아 촌락에 딸만 있던 가정들의 주목을 끌었고, 아들만 많고 땅은 적은 집안 출신이었던 이들은 데릴사위로 들어오라는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였다. 촌민들도 자신들이 새로 집을 지을 때 신뢰할 수 없는 외지출신보다는 이들이 더 나을 거라며 이 세 청년들의 정착을 환영하였고, 촌민회의를 통해 그들 명의로 토지까지 분배해 주었다. 원래부터 하남의 같은 마을 출신이었던 이 세 청년은 지금은 마을의 주요 장년집단 멤버로 살아가고 있다.


산서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인 장치(長治)의 외곽에 위치해 어느 정도 시장경제의 혜택을 본 B촌과 달리, 산지에 위치한 A촌은 80년대 이후에는 데릴사위로 들어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80년대 이후 마을출신 청년 중 8명이나 하남과 산동지역과 같이 먼 지역의 데릴사위로 나갔을 뿐이다. 농민공으로 외지로 나갔던 청년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한 방편으로 데릴사위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B촌도 80년대 중반 이후 농민공들이 도시로만 몰려서인지 더 이상의 새로운 데릴사위는 없었다. 이 두 촌락의 사례는 80년대 이후 농촌 지역에서 데릴사위의 비율이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농촌 경제의 낙후와 함께, 중국의 한자녀 정책도 ‘데릴사위 결혼’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개혁개방정책의 일환으로 1978년 이후부터 한자녀 정책이 자발적인 캠페인에서 강압적인 국가 정책이 되면서, 대부분의 농촌 가정에서 아이들의 수는 둘을 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한 자녀 정책하에 출생한 아이들이 결혼 적령기가 된 2000년대 초반에 이르면서 데릴사위가 농촌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농촌 경제의 쇠락으로 데릴사위를 유인할만한 요건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이제 농촌에서도 딸이나 아들 하나씩만 있는 가정이 대다수가 된 상황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데릴사위로 그것도 또 다른 농촌 마을로 내놓을 집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 자녀 정책하에서 보다 높은 교육을 받게 된 상당수의 딸들이 농업 노동력의 제공자인 데릴사위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이 부모님을 봉양할 수 있게 된 것도 농촌에서는 데릴사위가 줄어드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실제 필자의 관찰에 의하면, 외동딸들이 데릴사위로 농업노동력을 집안으로 데리고 오는 것보다는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도시 남자에게 시집가서 부모님에게 현금을 드리는 것이 보다 더 현실적인 부양책이 되었다. 또 그들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자신의 집과 가까운 주변 도시로 시집가서 자주 부모님을 돌보는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반면, 도시 내에서는 농민공 출신이나 심지어는 대학 졸업자들도 외지에서의 정착을 위한 방편으로 데릴사위를 계속 선택하고 있는 듯하며, 무엇보다도 도시화로 도시 교외지역으로 편입된 농촌마을에서는 데릴사위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실제 필자가 조사한 2012년 강소성 상주(常州)시 주변의 교외 마을의 사례는 어떻게 시장의 힘이 이러한 현상을 가져오는지를 잘 보여준다. 남경과 상해의 중간에 위치한 상주의 인구는 90년대를 거치면서 300만에서 700만으로 증가했고, 주변 농촌 마을들이 상주의 베드타운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자 촌정부는 촌 소유의 토지를 개발업자에게 팔고 그 이익을 촌민의 수대로 나누어 주었다. 또 새로 개발된 아파트의 입주권도 촌민에게 우선 배정되었는데 각 가정의 인구수에 따라 집의 평수가 달라졌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딸이 있는 가정들은 필사적으로 데릴사위를 구했고 또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렵지 않게 농촌출신의 데릴사위를 구해 촌락의 주민으로 등록하였다. 다만, 필자가 인터뷰를 진행할 동안 이러한 데릴사위 중 둘이 이혼을 요구하며 자신 몫의 아파트 대금을 청구해 법정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었다. 변호사로 활동 중인 필자의 중국친구에 의하면 그러한 소송은 매우 흔하며, 신부 쪽 가정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데릴사위가 거의 이긴다고 한다. 처음부터 그들 몫으로 인구수에 따라 분배된 개발 이익금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국의 데릴사위제는 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시장의 힘이 각 농촌 공동체와 가족의 생존전략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농촌으로의 유입은 거의 사라진 대신 부가 쏠린 도시로의 유입만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전에 아들 많은 집으로 시집가기를 거부해 데릴사위 증가에 한몫을 했던 “목소리 커진” 딸들은 시장경제 하에서 새로이 열린 경제적 가능성을 쫓아 이제 농촌에서 데릴사위제의 쇠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시장에서 직업을 갖거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남편을 통해 현금으로 직접 부모님을 봉양하면서, 농업노동력 유입을 위한 매개로서의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농촌 가정에서 이러한 딸들의 역할과 지위가 혁명과 마켓의 힘에 의해 지난 50년간 어떻게 변화했으며, 그리고 이 두 기둥 사이에서 딸을 가진 중국 농민들의 생존전략이 어떻게 변동하는지 살펴볼 생각이다.



참고문헌 

李树茁、靳小怡、费儿德曼、李南、朱楚珠著,《当代中国农村的招赘婚姻》,北京, 中国社会科学文献出版社,2006.

Zhang, Hong. “Social Transformations, Family Life, and Uxorilocal Marriages in a Hubei Village, 1870-1994”, PhD diss., Columbia University, 1998. 

Zhang, Weiguo. “State, Gender and Uxorilocal Marriage in Contemporary Rural North China.” The China Journal 60 (July, 2008): 11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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