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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7/2016.03】기획_大邱華僑史話 (3) 대구화교의 기반을 다진 모문금 - 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2 조회수 152

기획_大邱華僑史話 (3)    대구화교의 기반을 다진 모문금 - 2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지난 호에서 모문금의 고향 선배인 강의관(姜義寬)에 대한 언급했는데, 이번 호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건축청부회사 쌍흥호가 건축한 대구화교협회 건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강의관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확실한 자료가 없었는데, 이번에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외사과(外事課) 문서에 이를 입증할 자료가 발견되었다. 조선총독부 외사과는 당시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외국 공사관과 각국 소속 교민 관련 교섭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대한제국이 1905년 외교권을 일제에 의해 강탈당한 후, 대한제국 주재 외국 공사관은 모두 철폐되고 대신 자국 교민의 보호를 담당하는 총영사관 혹은 영사관이 설치되었다. 이들 총영사관 혹은 영사관의 각국 교민 관련 대외 교섭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던 행정기관이 바로 외사과였던 것이다. 외사과는 각국의 총영사관과 교섭한 모든 외교 자료를 보관했는데, 해방 이후 이 자료들이 총무처 정부기록보관소, 그 다음은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昭和 3년(1928) “各國領事館往復”(각국영사관왕복) 문서철 가운데 ‘在留民國人姜銀貴大邱中學校入學願ニ關スル件’(재류 민국인 강은귀 대구중학교 입학원에 관한 건)의 문건이 있다. 이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화민국 주경성총영사 왕수선(王守善)은 1927년 2월 22일자로 외사과장 앞으로 강의관의 자제로 대구보통학교를 졸업한 강은귀(姜銀貴)를 대구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경성중화총상회가 주경성총영사관으로 강은귀가 입학할 수 있도록 부탁했기 때문에 강의관이 경성중화총상회에 직접 연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총영사관은 강은귀의 이력을 첨부했다. 강은귀의 나이는 15세이며, 원적은 ‘中華民國 山東省 黃縣 城東區 頭于家村’(중화민국 산동성 황현 성동구 두우가촌)이었다. 강은귀는 강의관의 자제이기 때문에 원적은 부친 강의관의 중국 고향 거주지일 것이다. 모문금의 출생지는 같은 산동성 황현 東麻院 慕家村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동향인 것은 이것으로 완전히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외국인 자제가 조선의 학교에 입학하려면 조선총독부 학무국(學務局)의 허가가 필요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 외사과장은 같은 해 6월 16일 학무국장 앞으로 강은귀의 입학이 가능한지 조회하는 공문을 보냈다. 강은귀의 대구중학교 입학이 허용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당시 대구공립보통학교는 1906년 대구공립소학교로 설립되었고, 1911년에 대구공립보통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학교는 주로 조선인 아동이 다니던 학교였다. 그리고 대구중학교는 1921년 설립되었으며, 1922년 대구공립중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이 학교는 주로 일본인 학생이 많이 다녔으며 조선인 학생은 매우 적었다. 대구지역의 명문인 대구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20년대만 하더라도 조선 거주 화교는 단신으로 조선에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조선에서 번 돈을 본국에 송금하여 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강의관은 자제를 데리고 와서 화교학교가 아닌 현지의 학교에 보낸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대구화교소학교가 설립된 것은 1941년이기 때문에 당시 대구에는 화교학교가 없었다.

  

강의관이 대구에 언제 이주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모문금이 강의관의 소개로 대구의 쌍흥호로 이직한 것은 1920년이기 때문에 강의관은 1910년대에 대구에 이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1999년 10월 모문금을 잘 아는 화교 난계선(欒繼善, 당시 84세)을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그는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마리아였다고 한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초대주교인 프랑스인 안세화(Florian Demage)는 1911년 부임하자마자 주교관과 신학교의 건축을 계획하고, 이들 건축을 위해 필요한 건축기술자를 중국 북경관구에 요청했는데 이때 온 건축기술자가 강의관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필자의 추정과 거의 일치한다.(대구광역시·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1988), 64쪽)

  

강의관은 1931년 7월 배화사건 때 고향으로 완전 귀국했기 때문에 모문금과 같이 쌍흥호에서 일한 것은 1920년부터 1931년까지 약 12년이 된다. 대구·경북지역에서 이 시기에 건축된 종교건축물은 두 사람의 손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보면 된다.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는 건축물로서는 김수환 추기경이 다닌 성유스티노신학대학 건물, 계산성당의 성모당,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계산성당 사제관 등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이 현재의 대구화교협회 건물이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대구의 부호인 서병국(徐炳國)의 사무실 겸 주택으로 지어졌다. 이 건축물은 대표적인 대구의 근대건축물로 평가받아 대구시 등록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대구시는 이 건물이 건축된 해를 1925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1> 강의관과 모문금이 시공한 대구화교협회 건축물


<사진2> 대구화교협회 건물의 상량문


이 건축물의 2층 다락방에 다음과 같은 상량문(上樑文)이 나무에 적혀 있다. ‘中元甲己巳歲己巳月己巳日立柱上樑’. ‘己巳歲’는 기둥을 세우고 건물의 기본 구조를 올린 때가 1929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中元’은 음력 7월 15일을 뜻하기 때문에 양력 8월 19일이 된다. 즉, 1929년 8월 19일 이 건축물의 상량일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강의관과 모문금의 공동 작품임이 틀림없다.

  

대구화교협회 형성문(邢盛文, 68세) 총무는 이 건축물의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상량문을 필자에게 안내해 설명해준 것도 형성문 총무였다(2016년2월4일 인터뷰). 서병국씨의 딸은 미국으로 이민 갔는데 고향에 올 때면 늘 이곳을 들린다고 한다. 그 딸은 이 건물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이다. 형성문 총무는 그 딸이 소개한 이 건물에 대해 여러 가지를 설명해 주었다.

  

입구로 들어가면 오른쪽에는 방이 3개 있다. 화교협회 사무실로 사용하는 방은 서병국 부부의 거실이었고, 바로 옆의 작은 방은 침실이었으며, 더 깊은 곳에 방이 하나 더 있다. 그런데 이 비밀스런 방은 지하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입구에서 왼편으로 가면 좌우에 방이 하나 있다. 그 오른쪽 방은 이전 수세식 변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각 방문의 창은 건축 당시의 창문으로 한쪽은 평면 다른 한쪽은 울퉁불퉁한 것이 요즘에는 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쓴 목재는 금강산에서 운반해 온 삼나무였으며, 붉은 벽돌은 평양에서 구워 온 것이라고 한다. 1989년 이 건물 1층의 나무 창틀 공사를 했는데 삼나무 창틀과 붉은 벽돌이 얼마나 튼튼한지 공사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 만큼 좋은 자재를 사용했다는 말이다.

  

이 건물에는 대문이 있었다. 건물에서 나와 왼쪽 편에 한국식 대문도 일본식 대문도 아닌 중국 전통식 대문이 하나 서 있다. 이 대문과 화교협회 건물 사이에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의 기무사가 가건물을 지어 업무를 봤고 그 이후 이곳에 주차장이 들어서 마음대로 철거를 하지 못해 오래 동안 방치되어 오다, 최근 가건물이 헐리면서 이 대문이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사진3> 대구화교협회 건물의 정문


서병국이 1943년 콜레라로 사망한 후 유족이 1949년 당시의 화교협회인 중화상회에 팔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 중화상회장이자 이 건물의 시공자인 모문금이 이 건물 인수의 주역이었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대구광역시·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대구지역 근대 건축물 조사보고서”, 1988년.

朝鮮總督府外事課, “各國領事館往復”, 昭和三年(1928년). 

대구초등학교 홈페이지(www.taegu.es.kr)

대구중학교 홈페이지(www.daegu.m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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