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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6/2016.02] 연구성과 소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0 조회수 59

연구성과 소개



김지환, [전후 중국 국영기업의 조직과 경영], 『中央史論』 42輯, 2015.12. 외 2편



1. 전후 중국 국영기업의 조직과 경영」, 『中央史論』 42輯, 2015.12.


본 연구는 1949년 이전 중국에서 설립된 국영기업 가운데 규모가 가장 방대했던 중국방직건설공사를 통해 국영기업의 조직과 경영의 문제를 파악하려 시도하였다. 중국방직건설공사중방공사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4대가족 관료자본의 전형기업으로 규정되어 왔으며, 기업의 경영 역시 민족공업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한 독점 국영기업으로 평가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방직건설공사는 국영기업으로서 당연히 전후 국가권력의 경제정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기업의 평가를 위해서는 당연히 전후 경제조건 및 경제정책과의 상관성 속에서 분석이 불가결하다. 이러한 차에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에서 『中國紡織建設公司理事會會議錄』이 출판되면서 이 분야의 연구에 전기를 마련하였다. 본 논문은『중국방직건설공사이사회회의록』을 주요한 전범으로 삼고, 그밖에 종전 직후 중국에서 출판된 정부문서나 동업공회 관계 문건, 기간물과 신문 등 다양한 사료를 통해 중국방직건설공사를 중심으로 국영기업의 경영과 관련하여 경제사적 분석을 시도하고, 이로부터 도출된 실증적 내용을 근거로 다시 본 기업이 전후 경제건설 과정에서 가지는 역사적 의의와 평가를 도출해 보고자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방직건설공사는 전후 공산품의 수급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일용필수품의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국영기업의 효율성과 정책 집행의 수월성에 기초하여 적산사창의 국영화, 즉 중국방직건설공사를 설립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효율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국영기업의 지배구조를 재편하여 동사회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기업의 독립경영권을 보장하였으며, 경제부, 방직사업관리위원회로 이어지는 중층적 관리 보고체제의 비효율성을 제거하고자 시도하였다. 또한 직공의 채용과 교육훈련에서 엄격한 표준을 마련하여 시행하였으며, 이러한 경영시스템은 결과적으로 민영사창과 비교하여 높은 생산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방직건설공사는 국민정부의 전후 경제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시가에 비해 저렴한 면사포를 시장에 투매함으로써 전후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2. 「南通大生企業과 중국 동북시장」, 『東洋史學硏究』 133輯, 2015.12.


대생사창은 1899년 5월 23일 중국 근대 실업가인 장건에 의해 강소성 남통에 설립된 대표적인 근대 기계제 사창이다. 대생사창은 일차대전 시기, 소위 ‘민족공업의 황금시기’에 비약적인 발전을 구가하였으나, 종전 직후 경영이 급속히 악화되어 마침내 1925년 7월에 채권은행단의 관리로 들어가고 말았다. 본 연구는 대생사창의 발전과 쇠퇴를 일차대전 시기 중국 중국 공업경제의 발전과 전후 경제환경의 변화 속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전 직후 대생사창의 경영이 악화된 근본적인 원인을 생산과 시장의 상호관계로부터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기업의 경영 악화를 풀기 위해 어떠한 방안을 마련하였는지도 살펴보았다. 대생사창의 경영 악화에는 일차대전 시기 중국 동북시장의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장건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시도하였다. 장건의 대일 차관 교섭은 마침 배일운동에 고심하던 일본에게 이를 완화할 수 있는 호기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5?4운동 이래 전국적으로 배일운동이 여전한 상황에서 배일의 상징적 인물인 장건의 대일 차관 교섭은 강소성민을 비롯하여 전국적인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남통토포에 대한 원사의 공급을 통해 수입 일본 면제품을 대체한다는 대생사창에게 현지 주민들의 반발은 경영의 기조를 동요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반발에 직면하여 장건은 차관의 교섭 사실 자체를 부인하였으며, 결국 차관의 도입은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이다.



3. 「만주 간선철도망 형성의 역사적 회고」, 『滿洲硏究』 20輯, 2015.12.


철도는 근대의 상징적 이기인 동시에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매우 유효한 수단이었다. 이와 같은 양상이 매우 현저하게 나타난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만주지역, 즉 중국 동북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만주지역에서 철도의 총 연장이 중국 관내지역과 비교하여 약 10배 정도의 밀도를 보이고 있음은 이 지역을 둘러싸고 전개된 열강의 치열한 경쟁을 반영한 것이다. 만주에서의 간선철도망의 형성은 청말 이래 러시아와 일본의 경쟁과 이에 대한 장작림, 장학량 등 동북군벌, 나아가 중앙정부(국민정부)의 대응이라는 구도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본 연구는 중국(동북), 러시아, 일본의 세력구도 속에서 중국 동북지역에서 간선철도망이 어떠한 역정을 거쳐 형성되었으며, 철도의 부설이 가지는 정치, 군사적, 사회경제적 배경과 목적을 살펴보고, 나아가 국제관계의 변화 속에서 간선철도망에 대한 지배권(통제권)의 변화와 철도망이 이 지역에 초래한 결과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았다.


철도는 근대의 상징적 이기로서, 20세기를 전후한 철도의 발전은 동북지역의 사회경제에 근본적인 변혁을 초래하였다. 동북군벌 장작림 등 동북 지방정권과 중앙정부는 철도자판운동을 통해 철도의 이권을 회수하고자 시도하였다. 특히 호로도항의 건설과 이를 통해 입안된 동북철도망 건설계획은 종래 철도를 매개로 동북지역에서 세력권을 형성해 왔던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이해와 상충될 수밖에 없었다. 만주사변은 결국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일본의 대륙침략 구상이 그대로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항전승리 후 국민정부와 중국공산당은 동북지역의 철도 접관에 경쟁적으로 뛰어 들었다. 특히 철도의 밀도와 중공업 비중이 높았던 동북지역에서 사회간접시설의 복구는 전후경제건설의 과정에서 매우 긴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북지역의 철도에 대한 소련의 약탈은 전후 철도 복원에 엄중한 타격을 주었으나, 철도의 신속한 복구와 정상화는 전후 동북지역, 나아가 전중국의 경제부흥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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