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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2010.12] 자료소개 _ ≪申報≫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2 조회수 64

[Vol.4/2010.12] 자료소개 _ ≪申報

박장배 _ 인천대학교 HK연구교수

 

≪선바오≫는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의 대표적인 일간지이다. 1872(同治11) 4 30일 중국차를 거래하던 영국인 무역상인 메이저(Ernest Major)가 상하이에서 창간하였다. 77년의 역사를 가진 ≪선바오≫는 중국공산당에 의해 1949 5월에 폐간되었다. 이 신문은 오랫동안 발행된 데다가 상하이의 대표적인 일간지로 중국 근대사현대사연구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자료의 보고다.

 

아편전쟁 이후 상하이는 홍콩과 함께 외국계 신문 출판의 기지가 되었다. 1841~1894년을 헤아려보면, 중국의 외국문(포르투갈문 제외) 신문의 80% 정도가 이 두 곳에서 출판되었다. 중문 신문잡지도 두 곳이 50%를 초과했다. 상하이는 홍콩보다는 신문 출판이 상당히 늦어, 영문 신문잡지는 개항 7년 후인 1850년에 출현하였고, 중문 신문은 홍콩보다 4년 늦은 1857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상하이는 1860년 이후에는 홍콩보다도 훨씬 많은 신문이 발행되었다. 상하이 최초의 중문 신문은 1861년 상하이에서 창간된 ≪상하이신바오(上海新報)≫였다. 이 신문은 상업적인 신문으로, 10년 동안 상하이의 유일한 중문 신문이었으며 경쟁 상대가 없었다.

 

≪선바오≫는 창간 당시에는 소형의 격일간으로, 문인의 기호에 맞춰 뉴스, 언론과 상업정보 외에 시문소품(詩文小品)을 실었다. ≪상하이신바오≫도 문인이 쓴 시문을 싣기 시작하였고, 동전 30()을 받았던 가격도 매월 양은(洋銀) 반원(半元), 매년 양은 4()을 받았다. ≪선바오≫는 창간 후 동전 8문만을 받았다. 그래서 ≪상하이신바오≫도 동전 8문을 받고, 반년에는 1 2()5, 매년 2원을 받았다. ≪상하이신바오≫는 1872 12 31일에 정간을 알리고 상하이 신문계에서 퇴출되었다.

 

≪선바오≫의 창간자인 어니스트 메이저와 그의 형 프레더릭 메이저(Frederick Major)는 동치 초년에 상하이에 와서 찻잎과 포목 장사를 하였다. 1871년에는 선교가 아니라 영리를 목적으로 ≪선바오≫를 창간하였다. 메이저는 친구 우드워드(C. Woodward), 프라이어(W. B. Pryer)와 매킬럽(John Machillop) 3인과 함께 ≪선바오≫를 창간하였다. 세 사람은 각각 은 400량씩, 모두 1,600량을 냈다.

 

구독자를 늘려야 수입을 낼 수 있었던 ≪선바오≫는 신문에 일련의 개혁을 도입하였다. ≪선바오≫는 주로 서양인에게 의지했던 ≪상하이신바오≫와는 달리 거의 전적으로 중국인이 필정(筆政)과 경영을 주도하였다. 창간 당초는 소형의 격일간이었지만, 4개월 후에는 일간으로 바꾸어 편집을 쇄신하였다. 이전의 신문들과는 달리, ≪선바오≫는 언론을 매우 중시하여 매 호마다 논설 한 편을 앞 페이지에 실었다.

 

또한 ≪선바오≫는 문예작품을 실었다. 이전의 종교신문과 상업신문들은 우연히 구체(舊體)의 시를 실었는데, 내용은 교리를 선전하고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여 문학적 가치가 없었다. 처음에는 작품의 내용이 비교적 단조로웠지만, 점차 개선되어 종합성을 띠었다. ≪선바오≫는 처음으로 중국신문 특유의 부간(副刊)을 냈다. 이렇게 하여 뉴스, 언론, 문예(副刊)와 광고의 4요소로 구성된 중국 근대신문의 형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상하이신바오≫ 등이 간단한 전쟁뉴스를 전했던 전례가 있었지만, ≪선바오≫는 특파원을 파견하여 상세한 도보를 하였다. 특파원은 1874년의 일본군 타이완 출병 사건과 청불전쟁 등을 취재하여 자세한 보도를 하였다. 1876 3 30일 선바오관(申報館)은 ≪선바오≫ 외에 통속적인 신문 ≪민바오(民報)≫를 창간하였다. 1884 5 8일에는 중국 최초의 석인(石印)의 저명한 시사화보(時事畵報) ≪뎬스자이화바오(点石齋畵報)≫를 창간하였다. 이것은 13년 동안 발간되다가 1896년에 정간되었다.

 

1889년 메이저는 선바오관을 메이저 형제 유한회사(Major Bros. Ltd.)로 바꾸고 이사회를 만들었다. 그들 형제는 주식 2000(약 은 10만량)를 회수하여 영국으로 돌아갔다. 메이저가 떠난 후, ≪선바오≫의 업무는 이사회에서 주도하였다. ≪선바오≫의 뒤를 이어서 상하이의 외국상인은 영향력이 비교적 큰 ≪쯔린후바오(字林滬報)(1882 4 2일 창간)와 ≪신원바오(新聞報)(1893 2 17일 창간)를 창간하였다. 이 세 신문은 솥의 세 발처럼 정립 국면을 열었다.

 

1912년에는 스량차이(史量才)가 경영이 부진한 선바오관(申報館)을 사들여 ≪선바오≫는 완전히 중국인이 경영하게 되었다. 난관을 넘자, ≪선바오≫ 사업은 빠르게 발전했다. 일일 발행량은 1912년에 7000부였는데, 1922년 창간 50주년 때에는 5만부로 늘었다. 스량차이는 광고의 중요한 작용에 주의하여 신문의 광고가 크게 늘었다. 철도의 발달도 신문의 발달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신원바오≫는 ≪선바오≫보다 21년 늦게 창간되었지만, 1914년에 일일판매량 2만부에서 1921년에는 5만부로 증가하였다. 두 신문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는 쌍벽을 이루었다.

 

≪선바오≫의 ≪쯔유탄(自由談)≫은 ≪신원바오≫ 등의 문예란 등과 함께 민국초년과 북양군벌 통치시기에 원앙호접파의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두 신문의 안정적인 발전 시기는 군벌 혼전의 시기였다. 두 신문은 매우 조심스런 정치적 태도를 취했는데, 이 결과 두 신문은 여론상에서 선진세력을 대표하지 않았고, 호소력도 약했다. 1925 530사건에 대한 모호한 태도도 노동자학생의 비난을 받았다.

 

만주 및 상하이 사변 후에는 항일언론기관으로서 국민당의 압박을 받기도 했다. 결국 1934 11 14일 쓰량차이는 상하이 노상에서 암살되었다. 1941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 일본군부는 ≪선바오≫와 ≪신원바오≫를 정간시켰으나, 1주일(12 9일 정간, 12 15일 복간)만에 한젠바오즈(漢奸報紙)로 개조하여 복간하였다. 두 신문은 미국인 명의로 표면상에서 ‘중립’을 표방하며 복간되었지만, 실제로는 일본 상하이 주둔 육군 보도부 부장 아키야마 쿠니오(秋山邦雄) 중좌(中佐)가 직접 통제하고 있었다. 1942 12월에는 두 신문을 상하이 주둔 일본 해군에서 관할하여 표면상의 중립 색채를 완전히 없앴다.

 

항일전쟁 승리 후에 두 신문은 적의 선전도구가 된 부역(附逆)의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국민당정부가 관리하게 되었다. 국민당의 관리 하에서 두 신문은 1945 11월에 복간되었다. 국민당의 재산이었던 ≪선바오≫는 중국인민해방군이 1949년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종간되어 그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1949 5 27일 ≪선바오≫는 제225995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다음 날, 중국공산당중앙 화동국(華東局) 겸 상하이시위원회 기관지 ≪해방일보≫의 첫 호가 선바오관의 터에서 출판되었다.

 

현재 ≪선바오≫의 마이크로필름에는 베이징의 ‘전국도서관문헌마이크로필름센터(全國圖書館文獻縮微中心, 1988, 上海: 上海圖書館)’ 본이 있다. ≪선바오≫의 영인본에는 타이완학생서국의 영인본이 있다. 또한 상하이수뎬(上海書店, 1983-1985)의 영인본도 있는데, 이것은 400책으로 묶여 있다. 현재 인천대학교 HK 중국관행연구사업단 자료실은 상하이수뎬 영인본을 소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方漢奇 主編, ≪中國新聞事業通史≫ 第1(1992), 2(1996), 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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