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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6/2016.02] 논단_중국 화북지역 농촌조사의 성과와 과제: 최근 10년 간 하북/산서성 농촌조사를 중심으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0 조회수 59

논단_중국 화북지역 농촌조사의 성과와 과제: 최근 10년 간 하북/산서성 농촌조사를 중심으로



안병일 _ Sagino Valley 주립대학


필자의 박사논문 제목은 어색하게도 “Modernization, Revolution, and Midwifery Reform in Twentieth-century China”이다. 미국인들도 가끔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묻고는 하는 ‘Midwifery’라는 단어는 한국어로는 산파술에 해당한다. 이 주제를 처음 들고 갔을 때 지도교수도 도대체 무얼 하겠다는 거냐고 난감해 하셨지만, 필자가 산파술이라는 주제를 잡은 이유는 국민당이 추진한 1920~30년대의 근대화·서구화나, 1940년대 말부터 50년대의 공산당이 주장했던 혁명의 이데올로기가 실제 중국 농민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고 싶어서였다. 즉, 근대화나 여성해방, 계급혁명이라는 대의가 아이가 태어나는 아주 구체적이고 또 일상적인 현장에서 어떻게 현실화되거나 좌절되고, 또는 변형되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이 거창한 주제의식을 논문으로 만들기 위해 필자는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중국 하북성과 산서성의 시골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1950년대에 아이를 낳았던 할머니들, 마을 산파나 접생원(조산사), 그리고 50년대의 의료 관행을 기억하고 있는 농촌 의사들이나 부락 노인들을 인터뷰했고, 마지막으로 산파술에 대한 교육 매뉴얼이나 예산 관련 서류를 보관하고 있는 현이나 성 단위 당안관·당안국을 전전했다. 그리고 2010년 논문이 “드디어” 통과된 후에도 지금까지 그때 필자가 방문했던 마을들 중에서 한 곳, 그리고 2011년 이후에 농촌여성의 상속권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공부하며 인연을 맺게 된 또 하나의 마을을 거의 해마다 방문하고 있다.


필자가 농촌마을을 조사하고 다닌 건 순전히 논문을 마쳐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었고, 또 그래서 대부분의 관심을 1950년대 농촌 마을에서의 출산관행과 담론의 변화를 살펴보는데 집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2005년부터 2015년 사이 발생한 하북지역 농촌 마을의 현실과 변화를 완전히 도외시 할 수는 없었다. 실제 인터뷰에서도 농민들의 50년대에 대한 기억은 종종 현재의 상황에 의해 간섭되었다. 나아가 하북 지역의 한 마을에서는 필자가 인터뷰를 시작한 2005년 이후, 바로 옆 마을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외지인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필자와 대화를 나눈 마을 주민들이 조사를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 다음부터는 인터뷰 자체를 거절당하기도 했다. 또 출산이라는 아주 사적인 기억에 대한 질문은 곧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의 현재 상황에 대한 자랑이나 푸념으로 곧잘 이어졌고, 나아가서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소개시켜주거나 그들과의 식사 초대로 이어지곤 하였다. 결국 현대 중국 농촌의 상황에 대한 필자의 조사는 원래의 방문 목적과는 거의 무관했지만, 거의 강제된, 그러나 필수적인 연구의 과정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친구로, 자기가 아는 유일한 외국인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귀찮은 존재이기도 했겠지만, 10년간의 우정과 그들의 삶에 대한 관찰은 어떤 의미에선 필자에게 학위논문만큼이나 소중한 자산이 된듯하다.


처음 중국대학의 교수님들을 통해 “자신이 아는 누군가”의 마을로 소개받고 들어간 2005년 중국 농촌은 극심한 격랑을 맞고 있었다. 옥수수 가격, 또는 생필품이나 교육·의료 등 기본적인 서비스가 시장의 힘에 휘둘리고 있었고, 농민들은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수수나 조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로 나가고 있었다. 또 농민으로서의 삶을 벗어나는 유일한 현실적인 대안인 대학교육을 위해 아이들도 도시나 하다못해 읍내의 학교로 보내느라 하숙·자취 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생활단위로서의 가족이라는 삶은 형해화 되어가고 있었고, 필자가 인터뷰한 농민들은 문자 그대로 울고 있었다. 또 부패나 꽌시의 고리를 통한 지방 당 간부나 국가 관리들의 부당한 지배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농민들이 1950년대의 혁명을 기억하는 방식은 급진적인 계급투쟁이 아니라, 전쟁이나 빈곤으로 해체되거나 위협받던 가족구조의 회복이라는 전통적인 욕망의 실현이었다. 나아가, 그 혁명의 와중에 공산당이 위생을 강조한 근대식 산파술을 보급한 것도 건강한 아들을 낳고 산모나 아이가 감염으로 사망하지 않도록 하는, 그래서 가족이 지속되는, 기술로 수용했다고 한다. 농민들은 바로 그처럼 공산혁명을 가족구조의 복원으로 보고 지지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주도하는 또 다른 혁명인 개혁·개방이 그 가족을 해체해 버리고 있다고 불안해하였다. 나아가, 지방 관리들이 그런 과정에서 보호자가 아닌 약탈자로 행동하는 것에 대한 곤혹스러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2004년에만 중국 전역에서 74,000건의 소요나 폭동이 발생하여 3백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는 기록은 바로 이러한 현실의 반향이었던 것이다.


관찰자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결과가 다르겠지만, 필자가 보기엔 2010-11년을 기점으로 하북의 농촌사회는 어느 정도 그러한 불안과 곤혹스러움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하다. 물론 도·농간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고, 농민의 삶이 급격히 개선된 것도 아니지만, 중앙정부가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 지방, 특히 농촌단위에 대한 의료 등 지원을 늘리고 있고(물론 그 과정에서의 부패도 있지만), 또 대도시에서의 부가 지역 읍내로까지 어느 정도 흘러 들어가며 많은 농민공들이 돌아오면서 마을 공동체가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다. 나아가 핸드폰이나 교통수단의 발달로 밖으로 나간 식구들과의 교류나 연락이 빈번해 진 것도 소소하지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특히나 2005년에 추진했다가 거의 실패했던 농민에 대한 의료보험 사업이나 노령연금의 지원은, 2010년 재추진 이후 분명 중요한 사회적·심리적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필자가 체계적인 인류학 훈련을 받지 않았고, 또 처음부터 농촌 연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아 체계적인 데이터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필자의 관찰이 피상적인 인상 보고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중국 농촌의 현실 변화를 관찰하는 의미 있는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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