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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6/2016.02] 기획_華北 농촌 관행 조사 (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0 조회수 43

기획_華北 농촌 관행 조사 (1)


중국 농촌의 삶을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들: 생존, 혁명, 그리고 마켓

안병일 _ Sagino Valley 주립대학


<중국관행웹진>은 2016년 2월호부터 ‘華北 농촌 관행 조사’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본 기획의 집필자인 미국 Sagino Valley 주립대학의 안병일 교수는 2005년부터 10여 년간 하북성과 산서성의 10여 개 마을을 조사하며 중국의 농촌공동체와 농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관찰해왔습니다. 본 기획은 안병일 교수가 그동안의 華北 농촌조사를 통해서 획득한 경험과 통찰을 여러 연구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하여 기획되었습니다.


중국의 농촌지역에는 인구가 2,000명 정도에 달하는 제법 규모가 큰 행정촌과 그보다 작은 자연촌락을 다 합쳐서 약 90만 개의 촌락이 존재하고, 그 각각의 마을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환경, 구성원들의 특성에 따라 나름의 다양한 삶의 양식을 가지고 있어서 ‘농촌의 삶’이란 단어로 일반화할 수 없다. 또 1980년대 이후 진행된 도시화와 농민들의 대규모 이주에도 불구하고, 농촌인구는 2014년 현재 여전히 약 6억 2천만 명에 달하여 중국 인구의 45%이상을 차지한다. 그들은 각자의 경제적 상황이나 성별, 세대차, 주관적 처지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다양하게 바라보며, 게다가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들의 생활을 어떤 단일한 잣대나 도식을 들이대며 분석하는 것은 만용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중국 화북지역 농민의 삶을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을 살펴본다면, 장기간 농민의 생활형태를 지배하던 생존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와 필요(생존), 1940년대 토지개혁이나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 여러 형태로 농민의 생활양식을 지배하고 또 변화시키려 한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노력(혁명), 그리고 이러한 정부의 노력과 같이 가거나 역행하기도 하면서 농민의 삶을 지배해온 경제의 논리와 시장의 힘(마켓)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로 이 세 개의 기둥 사이에 어떤 역학관계의 변화가 나타났고, 그러한 변화가 어떻게 지난 반세기 농민들의 삶을 지탱하고 또는 바꾸어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필자의 관찰에 의하면, 의외로 ‘유교’나 ‘가부장적 문화’라는 추상적인, 그러나 서구의 학자들이 빈번히 이용하는 도식은 농민의 일상생활의 관행이나 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있어서 그다지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고 오히려 종속변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세 개의 기둥이 어떻게 농민의 삷의 양식을 지배하고 변화시키는가를 관찰하기 위한 첫 번째 창으로, 필자는 ‘uxorilocal marriage(처가 거주의 혼인)’ 관행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uxorilocal marriage’는 보통 데릴사위제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남편이 아내의 주거지로 들어가 사는 모든 형태의 결혼양식을 가리킨다. 사위가 처가에 들어가 사는 데릴사위(招贅)가 가장 보편적인 경우지만, 새 서방이 과부의 집에 들어가 전남편의 부모님과 자식과 사는 경우(招夫 또는 以夫養子)나, 더 극단적으로는 남편이 병이나 장애 등의 이유로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경우, 경우에 따라 남편의 주도 아래 아내가 다른 남자를 들여 기존의 남편과 함께 사는 형태(以夫養夫)를 모두 포함한다. 위 세 가지 중 어떤 형태이든지간에, 우리가 흔히 아는 전통 중국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인 가부장제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데릴사위제의 경우도 한국과 다르게 대부분 사위가 자신의 성을 장인의 성을 따라 바꾸고, 또 그러한 결혼 사이에 태어난 아이의 전부나 최소한 일부가 장인/아내의 성을 따른다는 점에서, 중국은 부계사회라는 우리의 상식 역시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uxorilocal marriage’ 관행은 특수한 일탈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결혼양식의 하나로 널리 실행되어, 중국에서는 명대에 이르면 최소한 사위나 아이의 성을 바꾸는 데릴사위제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국가의 법으로 보호하기에 이르렀고, 청말·민국 초기에 민간, 특히 농민의 생활관행을 조사한 <民商事習慣調査報告錄> 기록에도 ‘招夫’ 또는 ‘以夫養子’가 중국의 모든 성 단위에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일처다부제를 의미하는 ‘以夫養夫’ 역시 복건, 하북, 산서, 섬서, 절강, 감숙 등 중국 전체에서 광범위하게 보고되고 있다. 최근의 사회학자나 인류학자들의 연구에서도 중국의 데릴사위제는 일반적으로 농촌 결혼의 5-10%, 도시지역 결혼의 15-2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하남이나 절강의 일부 지역에서는 30-40% 이상을 차지하기도 한다. 지역 간의 차이뿐만 아니라, 시기에 따라서도 어느 정도 패턴의 차이가 있어서, 농촌지역에서는 1960-70년대에 그 절정에 다다랐다가 이후 점점 감소하는 추세에 있는 반면, 도시에서는 오히려 1950년대까지도 5% 미만이던 비율이 1990년대와 2000년대까지도 지속적으로 늘거나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부장제나 부계사회라고 알려졌고, 또 한국에도 전파된 열녀문을 만들어 이를 장려했던 중국에서 어떻게 이러한 현상이 널리 일어났으며, 도·농간의 차이나 시기적인 변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 이러한 현상의 발생 자체에는 첫 번째 기둥인 중국 농촌의 생존전략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들 없는 농촌가정이 딸의 결혼을 통해 노동력을 구하거나, 주요 노동력인 남편을 잃은 과부가 재혼을 통해 아이들을 부양할 노동력을 얻는 형식의 결혼은 중국 초기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청대(1644-1911)에 이르러 더욱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약 8천만에서 1억 명으로 추산되던 청 초기 중국의 인구가 19세기 중반까지의 200여 년 동안 3억에서 3억 5천만 명으로 증가하면서, 빈농의 농촌가구들은 딸이 태어나면 죽임으로써(여아 영아살해) 늘어나는 먹여 살려야 하는 입의 수를 조절하려 했고, 청 말기에 이르러서는 약 20%의 남성들이 결혼할 여성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 농촌사회의 바닥을 이루던 이러한 남성들에게는 바로 가임 능력이 있는 여성 자체가 희귀한 자원이 된 것이다. 중국 농촌의 결혼이 청대 이후 급격히 매매혼의 양상을 띠게 된 것도, 이러한 여아살해와 결혼적령기 여성의 희소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여아를 죽이지 않고 키운 가족이 그러한 투자의 대가를 딸아이를 시집보내면서 요구한 것이다. 실제로 데릴사위제로 대표되는 청대 및 근대 중국의 ‘uxorilocal marriage’의 많은 부분은 희소성을 가진 가임여성의 신체를 매개로 농업노동력의 교환이 이루어진 거래였던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청말·민국 시기 ‘생존’ 전략의 하나였던 데릴사위제로 대표되는 ‘uxorilocal marriage’가 어떻게 중국 ‘혁명’과 ‘마켓’이 본격적인 힘을 발휘하게 될 개혁·개방 시기를 통해 변형되어 나가는지, 필자가 관찰한 농촌의 구체적인 예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司法行政部, 『 民商事習慣調査報告錄』, 南京: 司法行政部, 1930.

李樹茁 外, 『 當代中國農村的招贅婚姻』,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6.

Sommer, Matthew, “Making Sex Work: Polyandry as a Survival Strategy in Qing Dynasty China,” Goodman, Bryan and Larson, Wendy, eds., Gender in Motion: Divisions of Labor and Cultural Change in Late Imperial and Modern China, Lanham: Rowman and Littlefield Publisher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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