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알림
Information / News

열린게시판

제목 [Vol.66/2016.02] 기획_大邱華僑史話 (2) 대구화교의 기반을 다진 모문금 - 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0 조회수 76

기획_大邱華僑史話 (2)    대구화교의 기반을 다진 모문금 - 1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대구화교의 역사는 110년을 헤아린다. 대구에는 화교학교인 대구화교소학과 대구화교중학, 그리고 대구경북지역 화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대구화교협회가 있다. 이들 대구화교 사회의 사회단체와 학교의 반석을 다진 인물이 바로 모문금(慕文錦)이다.


지금까지 모문금의 출신과 활동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것을 기록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다. 중국 남경(南京)에 있는 중국제2역사당안관에 소장되어 있는 ‘汪僞僑務委員會?案(왕위교무위원회당안)’에 그의 이력을 기록한 자료가 있어, 그의 출신과 활동에 대한 비밀을 정확히 밝힐 수 있게 되어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기록은 1943년 2월 왕정위(汪精衛) 남경국민정부의 부산영사관이 동 국민정부의 교무위원회에 보고한 문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 문건은 대구화교학교 창설에 필요한 보조금을 남경국민정부에 청구한 것으로, 보조금이 필요한 이유, 학교설립을 주도한 모문금의 이력서, 교장 손전순(孫殿舜)의 이력서가 들어 있다.


모문금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그는 청나라 광서 21년(1895년) 10월 28일 산동성 황현(黃縣, 현 龍口市) 동마원(東麻院) 모가촌(慕家村)에서 태어났다. 1943년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황현은 근대시기 산동성에서 상업이 매우 발달한 지역으로, 지역 출신 상인은 조선뿐 아니라 만주, 블라디보스톡 등지서 활발한 경제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이 지역은 과거합격자를 많이 배출하여 향신(鄕神)이 많았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지적으로 수준이 높았다. 


모문금은 1905년 1월 20일 출생지인 모가촌의 사숙(私塾)에 입학했다. 당시는 공립학교가 거의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사숙에 들어갔을 것이다. 1912년 12월 12일 사숙을 휴학하고 그의 나이 19세 때인 1913년 3월 15일에 조선 경성부(현 서울) 정동의 쌍흥호(雙興號) 건축청부회사의 서기로 취직했다. 쌍흥호는 당시 서양인 경영의 교회, 학교, 병원 등의 공사를 청부하는 건축회사로, 동성호(東成號), 장발륭(長發隆), 광승호(廣昇號)와 함께 대표적인 화교 건축청부회사의 하나였다.


쌍흥호에 취업한 모문금은 건축에 소질이 있어서인지 1915년 4월 1일 이 건축회사의 설계 직원이 되었으며, 1917년 3월 31일 이직할 때까지 3년 간 일했다. 모문금이 대구로 이주한 것은 그의 나이 26살 때인 1920년 4월 1일이었다. 그는 대구부 남산정 190번지에 소재한 쌍흥호(雙興號) 건축청부회사에 취업했다. 건축회사의 상호명으로 볼 때 서울 쌍흥호의 대구지사가 아닐까 추정된다. 당시 대구 쌍흥호의 책임자는 강의관(姜義寬)이었는데, 그 역시 황현 출신이기 때문에 강의관이 동향 후배인 모문금을 데리고 온 것일 것이다. 강의관과 모문금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호로 미루고자 한다. 하여튼 모문금은 1960년대 말에 아들이 거주하는 대만으로 이주하기까지 약 40년간 대구 시민에게 ‘모 서방’이라 불리며 살았다.


그는 1928년에 설립된 대구 화상공회의 후신인 대구 중화상회의 부주석으로 1933년 12월 14일 선출되었으며,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6년에는 중화상회의 주석으로 선출되어 대구 화교사회의 명실상부한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37년 6월 21일 대구 중화요리음식점 조합장에 피선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그가 대구·경북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중화요리점인 군방각(群芳閣)의 사장인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모문금은 대구·경북뿐 아니라 조선화교사회의 지도자의 한 명이기도 했다. 1938년 설립된 전국 중화상회의 연합단체인 ‘여선중화상회연합회’(旅鮮中華商會聯合會)의 간사로 1939년 3월 임명되었다. 매우 놀라운 사실은 모문금이 간사로 선출된 당시의 사진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 가운데, ‘旅鮮中華商會聯合會成立壹週年記念撮影’(여선중화상회연합회1주년기념촬영) 단체 사진이 그것이다.


첫째줄 왼쪽에서 7번째 인물이 범한생(范漢生) 경성총영사, 6번째 인물이 연합회 회장인 주신구(周愼九) 경성중화상회장이다. 확인해 본 결과, 모문금은 첫째줄 왼쪽에서 첫 번째의 ‘대머리’를 한 인물이다. 당시의 나이는 45세. 모두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고 정숙하게 사진을 찍었는데, 모문금은 다리를 꼰 채 사진을 찍은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여선중화상회연합회는 조선총독부의 강제와 ‘친일’ 범한생 총영사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설립된 단체이기 때문에 모문금이 무언의 어떠한 ‘저항’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자세를 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사진 속의 모문금은 매우 늠름한 기상과 리더로서의 품격이 느껴진다.


[사진] 여선중화상회연합회 설립 1주년 기념사진

자료출처: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


다시 모문금의 이력서로 되돌아가보자. 이력서에는 그가 1941년 8월 21일의 대구화교학교 설립자로 나와 있으며, 그 바로 옆에 경상북도지사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았다고 나와 있다. 따라서 1941년 8월 21일이 대구 화교학교의 설립 일자가 되는데, 학생을 모집하여 개교한 것은 1943년 4월이었다. 부산영사관이 본국의 교무위원회에 올린 학교 운영 보조금 청구 문서를 보면 모문금이 이 학교 설립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이력서 마지막에는 1942년 3월 20일 여선화교대표대회에 초빙되었고, 경성의 화교중학 설립 준비위원에 임명된 것이 나온다. 모문금 등의 노력으로 조선 첫 화교중학인 광화학교(光華學校)가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것은 1944년 4월인데, 이 학교가 현재의 한성화교중학의 전신이다.



참고문헌 

‘大邱中華商會轉慕文錦創設僑校請求補助’, “汪僞僑務委員會?案” (中國第二歷史?案館所藏,소장번호 2088-569)

朝鮮總督府, “朝鮮に於ける支那人”(1924)

대구화교정착100주년기념사업회, “대구화교 정착 100주년 기념자료집: 100년 이웃 100년 친구”(2006)

이정희, ?중일전쟁과 조선화교: 조선의 화교소학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제35집, 2007.9.

이정희, ?20세기 전반기 대구지역 화교의 경제적 활동(1905-1955년)?, 『대구사학』 제80집, 2005.


0 comments
작성자 패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