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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5/2016.01]자료와 정보_중국학술원소장 사진자료 소개: 한국전쟁 중국인민지원군 포로 대만송환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0 조회수 46

자료와 정보_중국학술원소장 사진자료 소개: 한국전쟁 중국인민지원군 포로 대만송환



이민주 _ 중국학술원 연구코디네이터

     


<사진 1> 인천항에 도착한 중국인민지원군 포로<사진 2> 손문(孫文)의 초상화를
들고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포로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은 1951년 7월 10일 제1차 회담을 시작으로 약 2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휴전협정에서 가장 큰 쟁점의 하나는 포로송환 문제였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바로 중국인민지원군 포로의 대만 송환에 관한 사진이다.


한국전쟁 중 발생한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는 대략 2만 1천여 명이었다. 이 중 1만 4천여 명은 중국대륙이 아닌 대만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결과의 배경에는 포로들의 정치적 성향 및 포로교육1), 대만의 적극적인 포섭활동, 강요와 위협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대만 정부는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을 ‘반공의사(反共義士)’, ‘애국군인(愛國軍人)’으로 지칭하였으며, 이들에 대해 활발한 포섭활동을 전개했다. 그 대표적 사례로, 대만 정부는 1953년 8월 26일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던 모슬포에 위문단을 파견하여 포로들에 대한 인터뷰 및 선전활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중국인민지원군 1만 4천여 명의 대만행이 결정되고, 대만 정부는 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당시 중화민국 주한대사였던 왕동원(王東原)은 한국화교들에게 「환영반공의사위원회(歡迎反共義士委員會)」를 조직하도록 했고, 총 지휘는 인천화교자치회장 여계직(呂季直)이 맡았다.


1954년 1월 23일, 인천화교들은 인천항에 집결하여 1만 4천여 명의 중국인민지원군 포로에게 꽃과 선물, 편지 등을 전달하는 등 성대하게 이들을 환송하였다.


<사진 3> 중국인민지원군 포로에게 꽃과 선물을
전달하는 여계직 인천화교자치회장과 화교학생
<사진 4> 대만행 함선에 오르는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


이후 대만정부는 1월 23일을 ‘자유일’로 지정하여 한국전쟁에서의 ‘반공(反共)’ 승리를 기념하였고, 인천화교사회에서도 매년 자유일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참고문헌>

仁川華僑小學校校舍復建委員會(1955.12), 「韓國仁川華僑小學復建工程誌略」, 『華僑學校書類編』(인천화교협회 소장자료).


박영실(2014), 「반공포로 63인의 타이완행과 교육 및 선전 활동」, 『정신문화연구』, 제37권 제2호.

여계언(2014), 「6·25전쟁 시기 중국군 포로 연구: 대만 선택 배경을 중심으로」, 박사학위논문, 한국학중앙연구원.




1) 포로교육은 미군의 민간정보교육국(Civil Information and Education Section)에 의해 진행되었고, CIE 프로그램으로 불린다. 교육의 내용은 ‘전쟁의 배경,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자유세계 국민들의 삶, 한국과 세계, 한국의 재건, 지도력과 기술 개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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