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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5/2016.01]논단_중국 영상산업의 발전과 정부정책: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0 조회수 72

논단_중국 영상산업의 발전과 정부정책: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김진영 _ 한양대학교 중국문제연구소


1 _ 영상의 발달

 

기원전 동굴 벽화에서부터 인류는 움직이는 생생한 장면을 재현하고 싶어 했다. 이런 인간의 본능은 시각매체의 지속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18·19세기에는 환등기, 매직 랜턴(Magic lantem), 조트로프(Zoetrope), 프락시노코프(Praxinoscope) 같은 시각기구 등을 통해서 움직이는 영상을 재현했다.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를 제작해, 프랑스 파리 카페에서 최초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다수의 관객이 같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오늘날의 영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일상생활의 단편적인 영상과 해외 다른 나라의 일상적인 모습을 촬영해 상영하던 영화는 점점 스토리가 있는 영화로 발전했다. 1초에 24프레임의 장면이 움직이는 영상을 만든다는 원리가 알려지면서 촬영할 수 없는 장면을 표현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등장했고, 애니메이션은 점점 더 독보적인 하나의 영상분야로 자리를 잡아갔다. 현대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서 애니메이션은 전문 애니메이션 작품 뿐 아니라 다른 많은 분야에도 활용되고 있다.


2 _ 중국 영상, 애니메이션의 발달

 

1896년 상하이 ‘우일촌’ 찻집에서 영화가 상영된 이후, 1905년에는 중국인에 의해서 첫 번째 중국영화 <정군산>이 제작되었다. 이후 중국영화는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에서도 다양하게 발전했다. 중국 애니메이션은 영화보다 비교적 늦게 중국에 소개되었다. 1920년대 전후에 중국에 소개된 애니메이션은 만씨 형제를 매료시켰다. 이후 만씨 형제는 애니메이션을 독학으로 연구하여 실험 제작했다. 1926년 순수 단편 애니메이션인 <화실대소동(大鬧畵室)> 제작에 성공한 이후, 만씨 형제는 계속해서 최초 유성 애니메이션과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철산공주(鐵扇公主)>(1941) 제작에 성공한다. 이 같은 만씨 형제의 지속적은 노력은 중국 애니메이션을 탄생시키고, 그 수준을 끌어 올리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중국 정부는 영상사업을 정부에서 일괄적으로 통제하고자 하였다. 중국 정부의 영상사업 통제 의지는 건국 이전부터 나타났다. 그 예로 1946년 10월 만주국에 있던 ‘만주영화협회’를 ‘동북영화회사’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중국 정부의 첫 번째 영화제작소로 지정했다. 이후 동북영화회사에 있던 애니메이션 제작팀은 제작조건과 기반시설이 더 좋은 상하이영화제작소로 옮겼다. 애니메이션 제작팀은 상하이미술영화제편창(上海美術電影作片廠)이란 제작팀에서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이후 중국의 모든 애니메이터들은 상하이미술영화제편창에 소속되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였다.


3 _ 중국 정부의 정책

 

중국 정부의 영화, 애니메이션에 대한 영상정책은 시기별로 나누어 변화했는데, 건국 이후 문화혁명 이전, 문화혁명기간, 문화혁명 이후, 2000년 이후 애니메이션 지원정책 등, 이렇게 4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 정부는 영상사업에 계획경제체제를 적용해 제작 안정화와 인력 양성을 꾀하였다. 연 작품 제작수량에 맞춰 제작비 전액을 정부가 부담함으로써, 영화 제작소에 소속된 애니메이터들은 안정된 제작환경에서 작품 제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 배급과 상영도 정부가 각 지방에 상영장소를 설립하고 직접 배급했으므로, 오랜 전쟁으로 인해서 낙후된 배급망과 상영장도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정부의 노력으로 중국은 전국구의 배급망을 빠른 시간에 구축할 수 있었고, 상영장이 늘어나면서 영상사업의 수익도 안정되어갔다.

 

영상사업 안정화 외에도, 정부는 애니메이터들을 구소련과 동부유럽으로 유학을 보내, 당시 유명했던 이지 트른카 같은 애니메이터들에게 애니메이션 제작방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또한 상하이미술영화제편창 자체 내에서도 애니메이터들이 모여 해외 작품을 감상하면서 선진 제작방법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정부와 애니메이터들의 노력으로 중국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소재와 제작방법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 사청운동(四淸運動)으로 기존의 애니메이션 작품은 대부분 상영이 금지되었다. 문화대혁명 초기 4년간은 제작 자체가 금지되었다. 이후 삼돌출(三突出)의 제작방법에 따라 정치성이 강한 애니메이션이 소수 제작되었을 뿐, 이전의 다양하고 작품성 있는 애니메이션은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파괴되고 정체되었던 애니메이션은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 정부가 다시 문예 발전을 중요시하는 정책에 힘입어 이전 모습을 회복해갔다. 상하이미술영화제편창 외에도 새로운 애니메이션 제작부가 성립되어, 상하이미술영화제편창의 독점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품이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소수민족 민간전설, 속담 등을 애니메이션화한 우수한 작품들이 다수 제작되어 ‘중국학파’라는 중국 애니메이션 위상을 국제사회에 입증하였다.

 

개혁·개방이후 중국에 TV가 보급되면서 방송국 설립이 증가되었고 애니메이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 애니메이션을 저렴한 가격에 수입하게 되었는데, 일본 애니메이션이 시청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면서 중국 애니메이션은 중국 관객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하였다. 갈수록 자국 영상시장을 해외 영상물에게 뺏기자, 중국 정부는 1993년 제3호 문건을 시작으로 영상사업에도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2000년에 들어와서 중국 정부는 전문적인 애니메이션 지원정책을 구체적으로 시행하였다. 먼저 방송쿼터제를 시행해 황금시간 때 중국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도록 하였다. 해외 수입 영상물은 밤 10시 이후에 방영하도록 했고,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을 설립해 중국 애니메이션을 일정 비율로 상영하도록 하였다. 또한 애니메이션 산업 기업과 전문 단지를 조성하여 국가와 지방정부가 경제적인 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이 기업과 단지에는 민간투자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중국 애니메이션 제작이 크게 늘어났다.


다년간의 정부의 노력과 애니메이션 회사의 노력으로 중국의 애니메이션은 규모면에서 뿐만 아니라 작품성 면에서도 급성장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성공사례로는 <란마오 시리즈>와 <희양양과 회태랑>이 있는데, 이 TV애니메이션은 지금도 저작권 판매 수익에서 10위 안에 드는 저력을 과시한다. TV애니메이션의 성공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성공으로 이어졌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2015년 7월 여름방학을 겨냥해 개봉한 <몽키킹>으로, 1700억의 수익을 거두는 큰 성공을 이뤄 중국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밝혀주고 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me2.do/xpx66F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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