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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5/2016.01]기획_ 大邱華僑史話(1) 중국 광저우에서 만난 일제시대 경북 영주화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10 조회수 56

기획_ 大邱華僑史話(1)    중국 광저우에서 만난 일제시대 경북 영주화교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지난해 12월 7일 광동성(廣東省) 광저우(廣州)에 있는 기남대학(暨南大學) 화교화인연구원(華僑華人硏究院)을 방문했다. 기남대학은 1906년에 설립된 국립대학으로, 화교대학이라 불릴 정도로 화교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세계 화교, 화인의 자녀가 이 대학에 많이 다니고 있는데, 특히 북한화교의 자녀가 국비 유학생으로서 이 대학에 많이 다녔거나 현재도 재학하고 있다. 이 대학 화교화인연구원은 동남아시아 화교 출신인 진가경(陳嘉庚, 1874-1961)이 세운 복건성(福建省) 하문대학(廈門大學)의 남양연구소(南洋硏究所)와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화교화인 연구기관으로 유명하다.

 

이 연구원 자료 센터를 견학할 때 우연히 경상북도 영주에서 포목상을 경영하는 화상(華商)의 화교등기증(華僑登記證)을 발견했다. 이 화교등기증에 적힌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당시의 조선화교 및 대구지역 화교 연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소중한 자료다. 

      

[사진1] 경상북도 화교 孫恩華의 화교등기증(1932년, 기남대학 소장)


화교등기증의 주인공은 손은화(孫恩華)라는 20세의 남성이었다. 원적은 산동성 모평현(牟平縣) 남관둔촌(南官屯村)이었다. 직업은 면포상(포목상)이었으며, 경영하는 포목상점의 상호명은 영주군에 소재한 동취흥(同聚興)이었다.

 

조선에 입국한 날짜는 민국17년(1928년)이며, 영주에서 동거하는 부인과 자녀는 없었다. 이 화교등기증이 발급된 날짜가 1932년 8월 6일이었기 때문에 손은화는 조선에 이주하여 5년째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당시 영주군에 동취흥이라는 포목상점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다른 자료는 없지만 이를 입증할만한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928년 대구 화상공회(華商公會) 설립 때 대구부(大邱府)와 각 군의 화상은 회관 설립을 위한 기부금을 갹출했다. 영주군의 화교 상점 가운데 기부금을 낸 것은 춘성태(春盛泰), 경의덕(慶義德), 영생인(永生仁), 유흥복(裕興福), 의증영(義增永), 덕풍항(德豊恆)이었다.1)

 

이들 화교 경영 상점은 포목상점 혹은 잡화상점이었다. 그런데 영주군의 바로 옆 군(郡)인 봉화군에 동취복(同聚福)이라는 화교 상점이 있었다. 동취흥과 동취복은 ‘동취’라는 상호명을 함께 사용하고 있어, 양 상점은 같은 동취 계열의 합자회사(합과(合夥)라고 함)일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대구부 포함)의 화상은 1931년 7월 발생한 화교배척사건으로 포목상점과 잡화상점을 정리하고 상당수 귀국했다. 이 사건으로 경상북도의 화교 인구는 1930년 말 2,384명에서 1931년 말에는 1,369명으로 45.8%가 감소했다. 경상북도 농촌 지역의 화상은 주로 대구부의 화상 도매 포목상으로부터 상품을 구입하거나, 도매 포목상의 대리점 역할을 하면서 면포, 비단, 마포 등을 판매했다. 대구부에 160개, 경상북도 각 군에 655개, 모두 815개의 포목상점이 있었다.2) 손은화가 경영하던 동취흥은 화교배척사건 이후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화상의 재편에 따라 기존의 화상 포목상 대신에 새롭게 설립되었을 확률이 높다. 남경국민정부 부산영사관이 1934년 12월 화교의 직업별 분포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구부의 포목상점 경영 화상은 31명, 군 지역은 185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영주군은 17명이었다. 손은화가 1934년까지 영주군에 거주했다면 이 17명 중의 한 명이었을 것이다.3)

 

‘화교등기증’은 어떻게 해서 탄생한 것일까. 중화민국 남경국민정부가 화교등기규칙(華僑登記規則)과 세칙을 공포한 것은 1930년 1월 17일 외교부령에 의해서였다. 화교등기증을 만든 목적은 해외 거주 화교의 보호에 있었다. 화교 등기의 사무는 규칙 제2조에 재외 중화민국 영사관이 처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화교 등기 청구인은 영사관으로부터 등기청구서 2장을 수령하여 해당 사항을 기입한 후, 이를 상반신 사진 3장과 등기인지세로 국폐(國幣) 0.2원과 함께 영사관에 제출해야 했다. 영사관은 이들 필요 서류와 사진을 수령한 후 화교등기증을 발급해 주었다.

 

다시 손은화의 화교등기증을 보도록 하자. 이 등기증은 ‘駐釜山領事館’이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기 때문에 중화민국 주부산영사관이 발급한 것이다. 당시 주부산영사관의 관할 구역은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였다. 따라서 영주군은 경상북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주부산영사관이 담당한 것이다.

 

손은화의 화교등기증 제일 앞에 ‘邱字第三0號’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주부산영사관이 경상북도 거주 화교등기증 청구인에게 발급한 번호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구’(邱)는 대구를 의미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손은화는 1932년에 들어 경상북도 화교 가운데 30번째로 화교등기증을 발급 받은 화교가 된다. 그런데 8월 6일 현재 경상북도 화교 가운데 화교등기증을 발급 받은 인원이 30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정은 이러하다.   

 

조선의 각 중국영사관이 화교등기증 업무를 개시한 것은 1931년 11월이었다. 즉, 손은화가 화교등기증을 발급받은 것은 이 제도가 조선에서 시행된 지 불과 10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조선의 각 영사관이 1931년 11월에 화교등기증 업무를 개시한 것은 그해 7월 발생한 화교배척사건의 영향이 클 것이다. 당시 영사관은 각 지역의 화교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망자와 피해자 파악을 하는데 큰 애로를 겪었기 때문이다.

 

화교등기증 교부 신청을 하는 화교는 많지 않았다. 중화민국 경성총영사관(京城總領事館)이 본국 외교부에 보고한 1934년의 화교등기 절차를 거친 통계를 보면,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화교 인구의 약 4할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조선 거주 화교는 대도시보다 농촌부에 거주하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관할 영사관에 직접 가서 화교등기증을 교부받는 것은 교통편의 불편, 비용의 발생 등으로 인하여 참가율이 매우 저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화교등기증의 유효기간은 1년에 불과하여 매년 갱신해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한편, 각 영사관은 화교등기증을 발급한 후 매월 그리고 분기별로 이를 정리하여 외교부와 교무위원회에 각각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화교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거나 귀국할 경우, 사망했을 경우는 반드시 화교등기증을 발급 영사관에 반납하도록 되어 있었다. 손은화의 화교등기증이 기남대학 화교화인연구원에 보관되게 된 경위는 분명하지 않지만 손은화가 산동성의 고향으로 귀국하면서 화교등기증을 부산영사관에 반납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부산영사관이 반납한 화교등기증을 외교부에 보내어 보관하다 여러 단계를 거쳐 기남대학에 기증된 것은 아닌지 추측된다.


[사진2] 교토화교 위형향(魏馨香)의 화교등기증(1932년, 기남대학 소장)


화교등기증의 양식은 비슷했던 것 같다. 기남대학 화교화인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는 다음의 화교등기증을 보도록 하자. 주고베총영사관(駐神戶總領事館)이 발급한 교토(京都) 화교 위형향(魏香)의 화교등기증이다. 손은화와 같이 1932년에 발행된 이 화교등기증에 기록된 위형향은 교토 거주의 31세의 화교였다.

 

그는 1923년 일본에 입국하여 1932년 현재 교토에서 화양루(華洋樓)라는 중화요리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의 원적은 복건성(福建省) 복청(福淸) 출신이었다. 일본에 이주한 복청 화교는 주로 직물 행상에 종사한 것으로 유명한데 위형향은 중화요리점을 경영하고 있어 흥미롭다. 손은화의 화교등기증과 위형향의 화교등기증을 비교해 보면 항목이나 양식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위형향의 화교등기증에는 사진이 없다는 것이 다르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은 기남대학 방문 시 필자가 촬영한 것이다.




1) 大邱華商公會 (1930), 『本會設立建築及捐款一覽表』(대구화교협회소장)




2) 李正熙 (2012), 『朝鮮華僑と近代東アジア』, 京都大學學術出版會, 36·114-118쪽.




3) 中國第二歷史?案館 (1990), 『南京國民政府外交部公報』제8권제1호, 1935년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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