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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1/2015.09] 관행논단 _ 최서해의 소설: ‘경계’의체험과 ‘피아’(彼我)의 이분법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5 조회수 93


[Vol.61/2015.09] 관행논단 _ 최서해의 소설: ‘경계의 체험과피아’(彼我)의 이분법

박노자 Vladimir Tikhonov _ 노르웨이 오슬로대

 

편집자: 박노자 교수는 7 29일 중국학술원과 인천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중국관행연구포럼에서 “식민지 조선인이 본 중국 그리고 화교”라는 주제로 약 2시간 동안 강연을 했다. 박노자 교수는 이날 포럼에서 일제 식민지 하의 조선인이 구미 및 일본 제국주의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 및 조선 거주 화교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을 당시의 소설과 신문 기사 등을 통해 분석, 전반적으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부정적이며 비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봤다고 지적했다. 박노자 교수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 날카로운 분석력, 뛰어난 한국어 구사 능력과 입담을 바탕으로 한 강의는 약 80명의 참석자를 매료시켰다. 참석자들은 세계적인 한국학 관련 학자의 반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탈하며 겸손한 박노자 교수의 인간성에 감탄했다. 본 웹진은 박노자 교수의 강연 내용을 요약하여 실을 예정이었으나, 박노자 교수가 아직 발표하지 않은 소논문을 보내와 이것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 논문은 최서해 등의 소설을 통해 당시 조선인의 중국 및 화교 인식을 분석한 것으로 이번 연구포럼의 강연 내용을 보다 구체화 시킨 연구 성과라 할 수 있다. 이에 본 웹진은 논문 전문을 게재하기로 하였으며, 박노자 교수의 배려에 감사드린다.

 

1 _ 들어가며: 경계인 최서해의 삶과 글

 

1920년대의 ‘문단의 총아’로 알려졌던 최서해를 정의(定義)하자면 요즘의 흔한 표현으로 ‘경계인’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여기에서 ‘경계’란 동시에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계급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었다. 1920년대 조선의 문단은 -그리고 나아가서 소위 ‘문화계’ 전체는- 대체로 일본에서 유학했거나 적어도 국내에서 근대 교육을 충분히 받은, 그리고 재산이 있는 가정의 출신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스스로의 노력으로라도 비교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중산계층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거의 전적으로 ‘점령’돼 있었다.

 

이와 달리 함북 성진의 소작인의 아들 최학송(최서해, 1901-1932)의 학력이란 약간의 한문 공부와 보통학교 중퇴 정도이었으며, 그가 유학 대신에 경험한 것은 간도에서의 육체노동과 극도의 궁핍한 생활이었다. 자신의 계급적 위치에 대한 뼈 앞은 자각, 계급적 위치가 약간이라도 나은 타자들과의 지속적인 비교는 최서해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자서적(自敍的) 작품이라 할 「전아사」 (餞迓辭; 『동광』, 9, 19271, 29-42)에서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신의 마음 상처를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함께 소학교와 글방에 다니던 친구들은 어느새 서울 어느 학교를 졸업하였다는 둥 동경 어느 대학에 입학하였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다 내 혈관의 피는 진정 되지 안했습니다. 그것보다도 괴로운 것은 한 때는 같은 글방에서 네냐 내냐 하던 친구들이 고향의 학교의 군청에 혹은 교사로 혹은 군 주사 나으리로 부임하여 면소에 출장을 나오면 옛 정은 잊어버리고 배내미는 꼴은 참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으로 그 놈의 것을 꿀꺽꿀꺽 참고 나면 십년감수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밖으로는 이러한 자극을 받고 안으로는 생활에 쪼들릴 제 어찌 젊으나 젊은 내 가슴에 감정이 없겠습니까? 내게 신경쇠약이라는 소위 문명병이 있다 하면 그 원인은 이때로부터 생기었을 것입니다.

 

계급의 상향 이동을 하려는 욕망은 매우 강하지만 그 출발점부터 재정도 학력도 태부족하여 마음고생만 공연히 해야 했던 그에게는 계급, 그리고 여러 계급 사이의 벽은 당면 현실의 핵심이었다. 가난뱅이, ()학력자 출신으로서의 최서해에게는 고학력 중산계층 위주의 서울 문단으로의 진출은 어쩌면 이민 못지않게 힘든 ‘경계 체험’이었다. 그 자신의 인식도 그랬지만 그를 보는 타자들의 눈도 무엇보다 그의 출신 배경에 집중되곤 했다. 이와 같은 시각은 예컨대 최서해에 대한 김동인의 애도사(哀悼辭: 「소설가로서의 서해」, - 『동광』, 36, 19328, 97-98)에서 매우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그 생장부터가 재래의 작가와 달랐다. 빈곤한 환경 아래서 어려서부터 무수한 고생과 쓰라림을 겪은 사람이었다. 중으로, 방랑객으로, 아편쟁이로, 인부로, 기아 때문에 죽음에 직면한 가련한 존재로 별별 경력을 다 지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그리는 사회가, 아직껏 조선 소설작가들이 그리는 사회와 온전히 달랐다. 그의 그리는 사회는 암흑한 사회였다. 굶주림과 병과 아픔과 죄악과 잔혹함과 공포가 막 섞인 사회였다. 아직껏 온전히 유산층의 생활만 소설에서 보든 조선 독서계에서 曙海에게 경이의 눈을 던지고, 손을 들어서 맞은 것은 이 소설 안의 사회의 新奇에 고혹되기 때문이었다. 프로 예맹에서 曙海를 대장 격으로 맞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거부(巨富) 출신의 김동인이 이야기하는 것은, 대부분 중산계층 중심의 ‘독서계’가 최서해의 소설들을 매우 ‘이국적’이고 ‘이질적’인, ‘정상적’ 도시 유산층으로서 직면하기 힘든 체험담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최서해가 생존했던 당시나 지금이나 최서해 관련 논의를 지배하는 표현은 ‘궁핍 문학’ 내지 ‘체험 문학’인데1), 이는 바로 그의 당시로서의 ‘이질성’을 잘 보여준다.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는 최서해가 ‘이국적인 구경거리’이었지만 최서해 그 자신에게는 글쓰기란 그 어떤 ‘고상한 이상’을 추구하는 일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체제 안에서의 경제 활동이었다. 그가 자신을 ‘작가’라기보다는 ‘원고 노동자’로 더 가까이 여겼다. 그것을 ‘타락’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와 같은 현실을 현실로 인정했다.

 

“나는 원고를 썼습니다. 써서는 잡지사와 신문사에 보냈습니다. 보낸 뒤의 창피한 꼴이야 어찌 일일이 말씀하오리까? 처음 써 달라는 때에는 별별 아첨을 다하여 가져가고는 배를 툭툭 튀기면서 똥갑만도 못한 원고료나마 질질 끌다가 그것도 바로 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싸울 수도 없어서 혼자 애를 태우고 혼자 분개합니다. () 이렇게 순전히 어떠한 예술적 충동은 돌볼 사이가 없이 영리본위로 쓰게 되니 돈을 생각하는 때마다 원고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오지도 안는 정을 억지로 빡빡 긁어서 질질 썼습니다. 이 고통은 여간 크지 않습니다.

 

명색이 ‘작가’이었던 그는, 사실상 잡지사에서 비정규적으로 고용되는 일용직 노동자나, 영세한 ‘원고 장사’를 하는 최하급의 자영업자이었던 것이다. ‘문단의 총아’, ‘조선 독서계를 매혹하게 한 존재’이었던 그는, 실제로는 ‘문인’과 ‘노동자’의 경계에서 산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급적, 신분적 ‘경계’는 그가 겪어야 했던 수많은 경계 중의 하나뿐이었다. 함북 출신으로서 말씨가 사뭇 다른 서울에서 1923년 이후로 살아야 했던 그는, 끝내 함북의 독특한 사투리를 고치지 못해 ‘재경(在京) 중의 지방인’이라는 중간적 정체성을 숨길 길이 없었다. 김동인이 본 최서해는 ‘가난뱅이 출신’ 그 다음으로는 무엇보다 ‘관북(關北) 출신’이었다.

 

“關北人 그는 關北人 특유의 호담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하면 그 사투리 많은 말청으로 열변을 토한다. 落魄 시대에 집안의 어린 妻子가 바가지를 긁으면 며칠이고 집을 비우고 나돌아 다녔다.(「嗚呼·曙海의 死, 曙海回想記」, 『삼천리』, 4권 제8, 19328, 92-93)

 

관서 출신의 김동인에게는 관서보다 훨씬 더 ‘먼 고향’이었던 함북 출신의 최서해가 이미 ‘이국적인 존재’로 보였다. 그러나 ‘서울/지방’의 경계보다도 최서해가 넘나들지 않을 수 없었던 또 한 가지 경계는 ‘타협/저항’의 분계선이었다.

 

확인되지 않았지만, 가출하고 연락이 끊긴 최서해의 ‘부재하는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추측되는가 하면, 「전아사」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최서해 본인이 의식적으로 1919 3 1일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만큼 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뚜렷했다는 것이다.

 

‘나의 고통’을 확대 해석하여 ‘민족 전체의 고통’을 소재로 삼은 ‘조선의 고리키’, 최서해가 1925년에 정식으로 카프라는 사회주의 경향의 작가 모임에 가입하고 카프의 이념가 김기진에게 ‘조선 문단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듣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오늘날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그 당시의 최서해의 작품 중에서는 일부가 ‘신경향파’(, 계급 문학)로 분류될 수 있다 해도 상당부분은 차라리 일반적인 ‘부르주아 자연주의’에 더 가까웠다는 것이었다.2) 

 

, 한 때에 ‘혁명’과 ‘사회주의’를 자주 거론했던 그가 1929년에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이 되면서 카프로부터 제명을 당하고 말았다. ‘민족적 배신?’ 최서해의 변명 아닌 변명은 “(조선인의 잡지사나 신문사에 비해서) 매일신보의 봉급이 더 정확하고 낫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밑에서 볼 수 있듯이 최서해에게는 ‘민족’이란 매우 유의미한 구분법이었다. 그렇지만 ‘노동자로서의 생계의 기본인 월급’과 ‘민족’이 충돌됐을 때에 역시 ‘노동의 대가’가 우선 순위가 됐다. 「전아사」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매춘’과 비유한 최서해 스스로가 자신의 ‘훼절’에 대해서 상처를 받을 만큼 받은 듯하지만, 그가 어디까지나 ‘저항’과 ‘협력’이 교차되는 식민지의 ‘회색 지대’3)에 속했다. 체제에 대해 반항하면서도 그 체제 안에서의 생존을 구하느라고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물론, 최서해가 카프에서 제명을 당하고 그 반대로 김동인과 같은 대표적 ‘부르주아 문인’과 더 가까워졌다고 해서 그 세계관의 근본적 좌표가 본질적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늘 돈 궁리로 긴장을 풀지 못하고 살았던 그는, 그의 유일한 장편이라 할 수 있는 『호외시대』 (號外時代; 『매일신보』 1930920-193181일 연재)에서는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주된 매개체인 ‘돈’의 마성(魔性)을 힘써 강조했다.

 

“사람이 부리려고 만들어놓은 돈이 도리어 사람을 부리게 됐다. 돈의 앞에서는 오륜삼강도 힘을 못쓰게 되고 정의 정도도 허리를 굽히지 아니하지 못하게 됐다.4)  『호외시대』의 「작자의 말」에서 이념적 중심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이 발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지전능한 보편적 매개체인 돈이 바보를 똑똑한 사람으로 만들고 부패한 사람을 정직한 사람으로 둔갑시킬 만큼의 절대 권력을 가진다”는 마르크스의 주장5)을 방불케 한다. 『호외시대』는 체불된 임금을 놓고 벌어지는 노사갈등에 대한 묘사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지마는, ‘양심적’ 경영을 시도해본 홍재훈이라는 ‘민족적 자본가’ 일가가 세계공황 여파로 망하고, 여성 주인공이 사창가로 팔리거나 자살하고, 홍재훈의 양자 격인 양두환이라는 또 한 명의 주인공이 홍씨 일가의 가업을 재기하도록 하기 위해 은행 돈을 빼돌리는 등 ‘돈이 사람을 망가뜨리는’ 과정을 최서해는 소설의 주된 줄거리로 삼았다.

 

‘양심적’ 자본가라 해도, 자본주의 사회 전체를 속박케 만든 돈의 마술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이 작품의 교훈이라면 교훈이다.6) 이처럼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간직한 만큼 최서해는 어디까지나 ‘계급문학’의 한 -다소 ‘문제적인’- 대표자였다.

 

하지만, 그의 일부 작품에서는 ‘계급모순’과 중첩되는 또 하나의 모순은 바로 ‘민족 모순’이었다. 식민지 시대인 만큼 ‘민족 모순’은 대개 지배자인 일제나 그 ‘내지인’과의 관계를 뜻했지만, 인생의 상당부분을 중국에서 보낸 최서해에게는 ‘민족 모순’의 당사자는 ‘일본’이라기보다는 ‘중국’과 ‘중국인’이었다.

 

2 _ 최서해 등 식민지 작가들의 타자, 중국인

 

‘경계인’으로서의 최서해의 가장 뚜렷한 특질은 ‘간도 체험’이었을 것이다. ‘간도’에 대해 초기의 ‘문학적 소개’를 해주는 것은 그의 소설의 중요한 ‘매력 포인트’ 중의 하나였다. 간도는 조선인 이주민뿐만 아니고 만주인과 중국인, 일본인 등 여러 종족들이 각종의 갈등을 빚으면서 공생하는 다()민족, ()문화 공간이었는데, 이와 같은 간도의 복합성을 최서해가 그 작품에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간도 생활의 ‘이질적 요소’ 중의 하나, 즉 중국인에 대한 최서해의 시각은 놀라울 만큼 부정 일변도다. 이 사실은, 특히 최서해의 ‘신경향파’로서의 문단에서의 위치를 고려할 때에 더 주목 받을 만하다. ‘신경향파’는 일본과의 ‘민족 모순’에 주목하면서도 원칙상 ‘무산 계급의 국제주의 원칙’을 지키려고 했다. , ‘일본인’ 모두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일제’와 ‘일본 착취자’들에게 비난과 부정의 예봉을 돌려야 했던 것은 카프의 논리였다.

 

그러나 최서해의 작품, 특히 『홍염』 (『조선문단』, 19271)에서는 꼭 ‘착취자’뿐만 아니라 ‘중국인’ 모두가 매우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가장 악질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것은 지주 인()가인데, 기타의 중국인들도 그와 거의 동질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물론 ‘중국인 악질 지주’는 최서해 문학만의 특색은 아니었다.

 

‘고약한 중국인 지주, 그 밑에서 고생하는 조선인 소작인’은, 현실성이 강한 식민지 시대 문학의 하나의 흔한 소재였다. 예컨대 최서해의 은인(恩人)이었던 이광수의 『삼봉이네 집』 (19301129일부터 1931424일까지 『동아일보』 연재)에서 중국인 지주 호로야가 주인공 삼봉이의 누이인 을순에게 눈독 드린 결과 그에게 헌신적이었던 삼봉이를 ‘강도’라고 고의적으로 모함하여 경찰에 넘겨주는 등 ‘욕정에 의한 배신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강경애의 「소금」 (『신가정』, 19345-6월호 연재)에서 악질적인 중국인 지주 팡등은 자신의 아내가 친정에 가는 사이를 이용하여 봉염네를 겁탈한 뒤에 임신한 그녀를 쫓아내는 등 반인륜적 악행을 일삼는다.

 

치정(癡情) 이외에 ‘중국인’을 특징지어주는 것은 일반적 탐욕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김동인의 『붉은 산』 (『삼천리』, 19324월호,  114-117)에서는 ‘만주인 지주’가 ‘그 소출이 너무 작다’고 판단되어진 조선인 소작인 송첨지를 마구 때려 죽게 만든 뒤에, 비록 마을 불량배이긴 하지만 같은 조선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항의에 나선 ‘삵’이라는 인물까지도 구타해 죽게 만드는 등 탐욕과 폭력의 화신으로 나타난다. , ‘욕정과 탐욕에 불타는 패륜적 중국인 지주’는 식민지 문학의 ‘코드’ 중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홍염』의 경우에는 지주 개인의 악행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동정을 당연히 받고 있고 어디까지나 저자의 의중을 반영하는 조선인 주인공들은 모든 중국인들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곤 한다. 중국인에 대한 작가 자신과 조선인 주인공들의 평()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부모도 모르는 되놈” (한 관청)

“되놈이란 오랑캐” (문서방의 부인)

“간도에 있는 중국인들은 조선 여자를 빼앗아가든지 좋게 사가더라도 밖에 내보내지도 않고 그 부모에게까지 흔히 면회를 거절한다. 중국인은 의심이 많아서 그런다고 한다. (작가의 말)

“되놈에게 인륜이 있소? (한 늙은 부인)

 

작품 속에서 지주 인가가 쓰는 매우 서투른 조선말도 인가의 이질성을 강조하는 요소 중의 하나인데, 무엇보다 인상 깊이 그의 부정적 의미의 ‘다름’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집 안의 풍경이다.

 

“어느 천 년에 지은 집인지, 거미줄이 얽히설키 서린 천정과 벽은 아궁이 속같이 까만데 벽에 붙여놓은 삼국풍진도(三國風塵圖)며 춘야도리원도(春夜桃李園圖)는 이리저리 찢기고 그을었다. 그을음과 담배 연기에 싸여서 눈만 반짝반짝하는 무리들은 아귀도(餓鬼道)를 생각케 한다. 문 서방은 무시무시한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중국인의 집’이란 이질적이고 위협적인, 아귀가 사는 지옥을 방불케 하는 곳이다. 이 집에 방화한 주인공 문 서방은 그러한 측면에서 악()과 선()의 싸움에서 어디까지 선의 편에 설 뿐이다. 인가의 집에 방화하고 인가를 도끼로 죽인 그는, 어디까지나 ‘아귀를 소탕한 일’을 해낸 것처럼 설정돼 잇는 것은 『홍염』이다.

 

‘악질 지주’에 대한 이야기인 이상 이와 같은 설정이 ‘민족적’이라기보다는 ‘계급적’이라고 볼 여지도 당연히 있지만, 소설 중에서는 인가의 일꾼이나 중국인 농민 가운데서 긍정적인 주인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착한 우리’(조선 농민)와 ‘악한 저들’(중국인 지주, 그의 일꾼 등)의 갈등은 ‘우리 편’의 비극(문 서방 부인의 죽음)과 ‘악한 저들’에 대한 ‘선한 우리들’의 ‘의로운 복수’(문서방의 방화와 인가에 대한 처단)로 매듭지어지게 되는 것이다.

 

‘조선인/중국인 사이의 적대적 모순’이라는 설정으로서는 『홍염』은 최서해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다소 특이한데, 중국인의 ‘타자성’은 그 유명한 『탈출기』 (『조선문단』, 19253월호)에서도 얼마든지 확인된다.

 

“나는 농사를 지으려고 밭을 구하였다. 빈 땅은 없었다. 돈을 주고 사기 전에는 한 평의 땅이나마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인(支那人)의 밭을 도조나 타조로 얻어야 한다. 일년내 중국사람에게서 양식을 꾸어먹고 도조나 타조를 얻는대야 일년 양식 빚도 못될 것이고 또 나 같은 ‘시로도’에게는 밭을 주지 않았다. 생소한 산천이요, 생소한 사람들이니, 어디 가 어쩌면 좋을는지?

 

간도에서의 생활 상황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지주 중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것은 중국인이었던 1920년대 초반의 실제적 상황을 고려할 때에 이 설명은 보다 현실적이 된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에 간도 주민의 75%를 이루는 조선인들 중에서 지주의 비율은 7%에 불과했지만, 중국인 주민 중에서는 44%가 지주였다.

 

중국에 입적(入籍)하는 것을 조건으로 조선인도 토지를 매입할 수 있었지만 중국측의 까다로운 절차와 일본측의 방해로 입적 자체가 어려운데다가 입적이 가능하다 해도 토지 매입할 돈을 갖고 있는 조선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일본측의 보고들에 의하면 1920년대 초반에 남만주 조선인 주민들의 다수가 극단적으로 가난해 묘()조차 살 돈이 없었다.7) , ‘중국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인’이라는 설정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것이었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은 일종의 ‘계급의 종족화’라는 수사법(修辭法)이다. 실질적 현실의 생활을 보다 전체적으로 재현하자면 중국인 중에서도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가난뱅이라는 사실까지도 절대 빼먹으면 안되는데, 여기에서는 ‘중국인’이 마치 ‘지주’의 별칭처럼 인식되는 듯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 최서해에게 ‘우리’와 ‘중국인’들을 근본적으로는 매우 이분법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선악(善惡)이분법적으로- 사유하는 근대적 내셔널리즘의 심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대체로 비()서구 국가들의 근대적 내셔널리즘은 ‘침략적 서구’와 ‘침략 희생자’로서의 ‘우리’ 사이의 이분법에 근거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한국의 경우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소 예외적이다. 첫째, ‘침략자’는 서구가 아닌 일본이 되는 것이었고, 둘째 일본 못지않게 또 하나의 이웃나라인 중국도 타자화의 대상이 된 것이다.

 

사실, 근대 한국 문학에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더럽고 음란하고 비양심적이고 게으른 지나인’에 대한 멸시적인 시선이 강했다.8) 예컨대 『탈출기』와 같이 1925년에 출판돼 그 당시 자연주의 계통의 작품으로서 ‘모범작’으로 인정됐던 김동인의 『감자』에서는 음란하고 비도덕적인 화교 왕 서방이 주인공 복녀를 범해놓고 결국 죽게끔 한 것뿐만 아니라 육()서방 등 불특정 다수의 화교들이 조선 여성들을 상습적으로 성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거기에다가 중국인에 대한 『감자』의 묘사는 ‘그들’의 ‘타자성’을 극대화한다.

 

“중국인들이 모여서 별난 악기를 뜯으며, 별난 곡조로 노래하며 야단했다.

 

1920년대에 이르면 화교 집단의 재한(在韓) 생활이 거의 반세기가 됐는데, 대표적인 한국 작가 김동인에게는 ‘그들’이 아직도 ‘별난 종족’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질성’에 대한 강조는 더 이상 1920년대 중반의 소설만큼 강하지 않지만, 남성 화교 이미지의 성애화(性愛化: sexualization)는 이효석의 『분녀』 (1936)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인공 분녀를 유혹한 왕 서방은 이 소설에서 ‘부’()와 정력(精力), 유혹의 기술로만 특징지어지는 인물이다. ‘타자’에 대한 매우 과장된 성애화가 오리엔탈리즘의 특질이라면, 이와 같은 화교에 대한 묘사는 일종의 ‘전유된 (appropriated) 오리엔탈리즘’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 한국이 ‘중국 남성에게 희생당한 여인’의 여성적, 소극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를 남성화시키는 전형적인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의 차이를 보여준다. ‘중국인’은 오리엔탈리즘적 고정관념대로 부정적으로 서술되었지만, ‘한국’도 결국 ‘소극적이고 여성적인 동양’의 역할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보산사건 때 인천 차이나타운의 유풍덕 상점에
피신한 화교들의 모습

 

물론 식민지 시대 한국 지식인들의 대()중국 인식을 ‘전유된 오리엔탈리즘’으로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탈출기』, 『감자』와 똑 같이 1925년에 나온 같은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이지만, 주요섭의 『인력거꾼』 (『개벽』, 58, 19254)에서는 오히려 ‘부유한 조선인’은 ‘가난한 중국인’에 대한 ‘가해자’로 설정돼 있기도 하다.

 

8년 동안 人力車 끌든 생각이 났다. () 또 언젠가는 한번 밤이 새로 두시나 되여서 大東族舍에서 술이 잔뜩 취해 나오는 귀울리(高麗人)신사 세 사람을 다른 두 동무와 같이 태우고 법계 보강리까지 10리나 되는 길을 가서 셋이 도합 10錢 은화 한 닙을 받고 어처구니 없어서 더 내라구 야료치다가, 그들은 이들한테 단장으로 죽도록 얻어맞고 머리가 깨여져서 급한 김에 人力車도 내여 버리고 도망질쳐 나오든 광경이 다시 생각이 났다.

 

그리고 문학의 범위를 벗어나 식민지 시대 지식인 사회의 ‘중국’ 담론 전체를 보자면, 근대 중국과 근대 조선 사이의 ‘다리’를 놓아주는 일종의 ‘지중파’(知中派) 지식인의 존재도 눈에 띈다.

 

중국을 ‘제2모국’이라고 생각했던 변영만(1889-1954)도 그랬지만, 1931년 소위 ‘만보산 사건’으로 재한 화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의 화해를 적극적으로 도모했던 『동아일보』의 재()중국 특파원 신언준 (1904-1938)도 ‘지중파’의 범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9)

 

그러나 이와 동시에 최서해와 김동인, 이효석이 ‘스타’의 반열에 속했던 일본 교양인 계층 사이에서는 ‘왕 서방’들에 대한 통속적인 인식은 민족주의적 시각에서의 ‘부정적 타자’ 의식에 더 가까웠다는 것은 한국적 근대의 하나의 비극이 아닌가 싶다. 근대 민족주의는 늘 ‘부정적인 타자’들의 이미지 생산 및 유포를 의미하지만, 한국으로서 가장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가까운 이웃인 중국의 이미지가 식민지 시대부터 대중적으로 부정 (否定) 위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전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3 _ 나아가며: 중국, 중국인 타자화 극복의 길은?

 

최서해의 문학은 ‘가난의 체험’, ‘극단적 현실’과 ‘극단적 행동’의 묘사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조선인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빈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의미에서 한국 근대 문학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서해를 매우 적극적으로 평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최서해에 대한 평가에서 그의 ‘타자’ 인식의 민족주의적 측면도 빠뜨릴 수 없을 것이고, 이러한 측면에 대해서 마땅히 비판적일 수도 있다. 최서해는 여러 의미에서 ‘경계인’이었지만 그의 대()중국 인식으로 봤을 때에 그가 ‘타자’에 대한 포용보다 ‘피아’(彼我)의 이분법에 훨씬 더 기울었던 것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식민지 시대 문학의 이와 같은 문제적인 부분에 대해서 적절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앞으로의 한-중 간의 ‘가까워지기’, 양쪽의 민족주의적 시각의 교정이 더 쉽지 않을까? 미래의 동아시아적 지식 공동체의 실천은, 과거에 대한 뼈아픈 성찰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식민지 시기의 ‘민족’과 ‘타자’ 의식의 문제점에 대한 맹성(猛省)과 함께, 그 시기에도 이미 보였던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국제주의적, 연대주의적 접근의 시도들도 우리가 새로운 동아시아적 연대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비판적 근대인’ 변영만과 지중파 진보지식인 신언준도 이미 언급했지만, 일제가 중국 침략의 야욕을 펼치면서 조선인까지도 침략의 대열에 동원시켜 조선인, 중국인 사이에 이간질하려 했던 비극적인 시대에 중국과의 연대를 외쳤던 하나의 사회적 축()은 바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일제의 선전가들이 만주 침략의 하나의 핑계로 ‘재만(在滿) 조선인의 문제’를 삼아 이 문제를 해결해준답시고 조선인을 중국 침략의 하위 파트너로 이용하려 했을 때에는, 공산주의적 언론인 박일형(朴日馨, 1905-?)은 좌파 잡지 『비판』에서 중국혁명만이 재중 동포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못을 박고 동포들과 중국혁명 세력의 연대를 촉구했다.10)

 

1922년에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 그룹 중의 하나인 북성회(北星會)를 주도한 거물 공산주의자 김약수(金若水, 1892-1964)도 마찬가지로 ‘동포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을 중국 공산당과의 합작에서만 찾으려 했다.11) 김명식(金明植, 1892-1943) 1930년대에 들어 다소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으로 접어든 일부 좌파 논객들이 중국에서의 ‘민족 자치구 설치’의 필요성도 언급했지만, 중국 혁명 세력과의 동지적 연대 역시 이 주장에서도 하나의 전제였다.12)

 

물론 무조건적인 ‘중국인 동지와의 연대’ 주장을 일종의 ‘낭만적인’, 혹은 도식주의적인 국제주의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없지 않아 있다. 공산주의 운동 안에서도 종족적 ‘다수’와 ‘소수’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머지않아 중국 공산당의 만주지역 조직에서의 친일조직인 ‘민생단’의 멤버로 의심 받는 조선인 혁명가에 대한 1933-35년간의 야만적인 마녀사냥으로 표출되기도 했다.13) , 공산주의자들이 주창한 ‘한-중 혁명 연대’의 길은, 이미 공산주의자들에게조차 내면화돼 있는 민족 차별 인식 등으로 인해서 현실적으로는 꼭 평탄하지만 않았다.

 

하지만, 문학 등 여러 영역의 근대적 담론이 중국과 중국인을 부정적으로 타자화시켰던 식민지의 상황에서는 좌파의 ‘국제주의’는 -그 도식적 측면 등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적 탈()민족 공동체 건설의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음에는 틀림없었다.

 

동아시아에서의 상호 타자화 극복, ()경계적 연대를 모색하는 이들에게는 지금도 1920-1930년대 좌파들의 국제주의적 시도들이 하나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계급문학 진로의 모색에 적지 않은 공을 들였던 식민지 조선 문단의 ‘경계인’ 최서해는 이 국제 연대주의적 시도들과 다소 거리가 멀었다. 이는 좌파 운동과 관련성이 있는 문화인물조차 ‘탈민족’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김민환, 박용규, 김문중, 등 공저, 『일제 강점기 언론사 연구』, 나남, 2008

곽근 엮음,『최서해전집 상·하』, 문학과 지성사, 1987

곽근, 「서해 문학의 이해를 위하여」, 곽근 엮음,『최서해전집·하』, 문학과 지성사, 1987

민두기, 「만보산 사건 (1931)과 한국 언론의 대응: 상이한 민족주의적 시각」, 『동야사학 연구』, 65, 1999.

박상준,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 신경향파』, 소명, 2000.

박일형, 「만주문제를 如是我觀: 특히 재만 조선인문제의 해결에 대하야」, 『비판』, 7, 193111.

이덕일, 「민생단 사건이 동북항일연군2군에 미친 영향」,『한국사연구』, 91, 1995, 129-167.

유인순, 「근대 한국 소설에 투영된 중국, 중국인」, 『한중인문과학연구』, 8, 2002,  69-81.

윤해동, 『식민지의 회색지대』, 역사비평사, 2003.

한점돌, 「최서해와 프로 심파타이저의 미학」, 『호서어문연구』, 3, 1995, 71-92.

Marx, Karl,The Power of Money, Economic and Philosophic Manuscripts of 1844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59), pp. 40-43.

Park Hyun Ok, Two Dreams in One bed: Empire, Social Life and the Origins of the North Korean Revolution in Manchuria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5).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image.search.naver.com/


1) 곽근, 「서해 문학의 이해를 위하여」, 『최서해전집·하』, 문학과 지성사, 1987, 429.

 

2) 박상준,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 신경향파』, 소명, 2000, 332.

 

3) 윤해동, 『식민지의 회색지대』, 역사비평사, 2003.

 

4) 곽근 엮음, 『최서해전집·하』, 문학과 지성사, 1987, 278.

 

5) Karl Marx, The Power of Money, Economic and Philosophic Manuscripts of 1844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59), pp. 40-43.

 

6) 한점돌, 「최서해와 프로 심파타이저의 미학」, 『호서어문연구』, 3, 1995, 71-92.

 

7) Park Hyun Ok, Two Dreams in One bed: Empire, Social Life and the Origins of the North Korean Revolution in Manchuria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5), pp. 78-123.

 

8) 유인순, 「근대 한국 소설에 투영된 중국, 중국인」, 『한중인문과학연구』8, 2002, 69-81.

 

9) 민두기,「만보산 사건 (1931)과 한국 언론의 대응: 상이한 민족주의적 시각」, 『동야사학 연구』, 65, 1999.

 

10) 박일형, 「만주문제를 如是我觀: 특히 재만 조선인문제의 해결에 대하야」, 『비판』, 7, 193111.

 

11) 김약수, 「재만조선인 문제에 대한 제견해 검토」, 『비판』, 7, 193111.

 

12) 그 당시의 논쟁에 대해서는 김민환, 박용규, 김문중, 등 공저, 『일제 강점기 언론사 연구』, 나남, 2008, 318-319쪽을 참조.

 

13) 이덕일, 「민생단 사건이 동북항일연군2군에 미친 영향」,『한국사연구』91, 1995, 129-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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