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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1/2015.09] 논단 _ 시민강좌시리즈 삼국지, 그 이후 이야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5 조회수 41

[Vol.61/2015.09] 논단 _ 시민강좌시리즈    삼국지, 그 이후 이야기

이강범 _ 중앙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우리에게 익숙한 삼국지는 陳壽의 正史 『三國志』가 아니라 羅貫中이 여러 사료를 취합하여 소설로 창작한 『三國志演義』이다. 그러므로 두 책 사이에는 정통 관념과 역사적 사실여부 등에 있어 대단히 큰 간극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三國志演義』에 등장하는 상황 논리와 갈등구조를 통해서 소설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고 이를 통해 인생을 성찰해 보는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는 『三國志』를 통한 정확한 이해가 보충된다면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좀 더 정확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三國志演義』를 읽다보면 오장원에서의 전투에서 諸葛亮이 병사하면서 삼국시대는 그대로 막을 내리는 느낌을 준다. 삼국이 정립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데 결국 누가 이겼는지, 삼국은 결국 누구의 손에 일통의 세계로 나가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모를 이해하기 매우 힘들다. 소설에서 주는 느낌과는 달리 諸葛亮의 사망 이후로도 거의 30년간 위 촉 오 세 나라의 대치 상태가 지속된다. 30년 동안 역사의 주인공은 조조 유비 손권이 아니라 그들의 아들과 손자, 혹은 증손자 세대들이다. 그러므로 諸葛亮의 사망은 삼국시대의 끝이 아니라 본격적인 통일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다 알고 있다시피 조조의 위나라를 오래 보좌해 온 司馬씨 집안에 의해 통일은 완성되기 때문에 이 강의에서는 『三國志演義』 그 이후의 얘기를 풀어 나갈 것이다

 

. 司馬氏 3父子의 정권 장악

 

이 이야기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겠다. 우선 曹操가 장년이 되었을 때부터 등장하는 司馬懿-- 즉 오장원 싸움에서 제갈량을 ‘과로사’로 몰고 간 마지막 적수인 사마의와 그의 두 아들인 사마사 사마소를 중심으로 이들 3父子가 어떻게 점차 위나라 조정을 농단하고 점차 세력을 넓혀 가는지, 그리고 어떻게 끝내 元帝 曹奐을 몰아내고 西晉을 건국하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 한다. 그 과정에서 주도면밀한 ‘전쟁광’ 司馬懿이 보여주는 용병술과 전략, 勢 불리할 때의 ‘韜光養晦’ 책략, 때를 놓치지 않는 과단성으로 성공하는 高平陵의 쿠데타, 적을 처단할 때의 철저함과 잔인성 등을 이야기 할 것이다. 즉 대장군 曹眞의 아들 曹爽과 나란히 어린 황제의 보정대신으로 임명되었다가 曹爽에게 권력 싸움에서 밀리자 중풍을 핑계대고 물러나 때를 기다리다가 기회가 오자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키고 모든 반대파를 살육하는 司馬懿의 ‘살인기계’의 면모를 살펴볼 것이다. 여기에는 힘 있는 曹爽에게 붙어 온갖 술수를 동원하여 주군의 적수인 司馬懿를 해치고자 하는 曹爽의 참모들도 등장한다. 정치 싸움에서 상대방을 이기기위해서는 당연한 행위이겠지만 그 중에서 극적으로 변절한 당대 최고의 학자 何晏의 ‘슬픈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비극을 자초한 ‘못난’ 지도자 曹爽의 모습은 음흉하고 노회한 司馬懿와 비교하여 지금도 다시 새겨볼 만한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준다. 司馬氏의 西晉건국은 조조가 죽고 나서 46년 이후 손자 司馬炎, 즉 晉武帝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이 모든 초석은 司馬懿가 만든 것이니만큼 가장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마의가 70을 넘긴 ‘고령’의 나이로 사망하였지만 천하는 여전히 그의 두 아들 司馬師 司馬昭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형제는 아버지보다 더욱 위나라의 조정을 움켜쥐고 전횡을 하게 되는데 司馬씨 집안의 독재에 저항하는 王凌 李豊 毌丘儉 등의 거병을 하나씩 분쇄해가면서 더욱 세력을 공고하게 한다. 毌丘儉을 진압하러 갔다가 司馬師는 눈알이 빠져 사망하였지만 동생 司馬昭가 정권을 이어받아 司馬氏 집안의 통치는 변화가 없게 된다. 그러고는 ‘역모’에 가담한 황제 曹芳을 齊王으로 격을 낮추어 쫒아낸 뒤 황제를 새로 갈아치울 계산을 한다. 우여곡절 끝에 高貴鄕公 曹髦에 모두 동의하여 그를 꼭두각시로 세우게 된다.

 

그러나 司馬氏의 말을 곱게 들어주기를 기대했던 曹髦는 점차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때를 보아 다시 황권을 찾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司馬昭의 마음은 길가는 사람도 다 안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모든 이가 司馬氏의 야심을 알고 있는데 황권을 다시 찾는 것이 쉬울 리 없지만, 20살도 안 된 曹髦는 혈기에 치밀한 준비도 없이 서둘러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궁문 밖을 몇 걸음 못나가 司馬昭의 오른팔인 賈充의 부하 成濟의 창에 가슴을 관통당해 죽고 만다. 황제를 대낮에 암살한 이 사건으로 천지가 진동하였지만 成濟 일가를 처형하는 것으로 간단히 수습한 司馬昭는 더욱 공고하게 권력을 다진다. 그 때부터 魏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元帝 曹奐을 그의 아들 司馬炎이 몰아내고 晉제국을 건국하기까지 불과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劉備 이들인 劉禪이 황제가 되어 다스리던 蜀의 사정은 극도로 혼란해졌고, 司馬昭는 군사를 보내 함락시키고 劉禪의 항복을 받아낸다. 포로로 잡혀온 劉禪이 보여준 블랙 코미디는 못난 ‘2세’의 전형을 보여준다.

 

. 西晉의 건국과 이후 못난 황제들

  

魏元帝의 ‘선양’을 받아 晉 제국을 건국한 司馬炎은 너그럽고 깊은 생각으로 선정을 베풀어 한때나마 ‘太康之治’라는 호칭이 붙을 만큼 태평치세를 열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뿐, 자신감에 넘쳐서일까, 본격적인 사치와 향락의 생활을 시작한다. 여인에 대한 끝없는 욕심은 황제가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기엔 확실히 도가 지나쳐 보인다. 이미 만 명을 초과한 후궁이 너무 많아 수레를 끄는 커다란 양이 멈추는 방의 후궁에게 ‘성은’을 내리는가하면 이를 아는 후궁들이 양이 좋아하는 소금을 가지고 양을 유혹하는 등의 코미디가 연출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280, 吳나라를 쳐서 마지막 황제 孫皓의 항복을 받아내 거의 100년에 이르는 동난 시기를 마감하고 진정으로 천하를 통일하는 위업도 이루었다.

  

더욱 자신이 붙은 司馬炎은 역사에도 길이 남는 막장극의 주인공 혹은 조연이 되기도 했는데 가장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 형주자사였던 石崇과 황제의 외숙의 모친의 동생인 王愷가 벌인 부자대결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황제의 인척인 王愷가 밀리자 약이 오른 황제가 뒤에서 이른바 ‘스폰’을 자처한 이 대결은 두고두고 이 시기 가장 추악한 한 장면이 될 것이다. 石崇 또한 단순 부자가 아니고 정치인으로서 ‘수퍼 갑질’을 하는 ‘악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돈 자랑은 통치의 이념을 ‘孝’로 설정한 것과는 너무나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이 시기의 허위의식과 구역질나는 위선의 초상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晉武帝 司馬炎의 최악의 결정은 후계자 문제일 것이다. 다른 아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장남이라는 이유로 司馬衷을 태자로 확정지은 것이다. 물론 황후의 고집도 작용하였지만 아들이 많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도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것은 훗날 왕조의 단명을 재촉하는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순조롭게’ 황제에 오른 아들 司馬衷이 바로 중국역사에서 유일한 이른바 ‘백치황제’ 惠帝가 되겠다. 거기다 더욱 최악의 결정은 며느리, 즉 태자비를 賈南風으로 결정한 것이다. ‘질투가 심하고 아들도 못 낳으며 추악하게 생기고 키도 작고 얼굴도 까만’ ‘완벽한’ 이 여자는 단지 司馬昭의 공신 賈充의 딸이라는 이유로 간택이 되었다. 궁에 들어오자 임신한 후궁을 때려죽이는 ‘거사’를 하는 바람에 한 때 폐비될 위기에도 몰렸으나 시아버지 사마염이 죽고 나자 거든히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賈南風은 모자란 남편을 대신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 마침내 시어머니 楊황후를 처단하고 확실하게 정권을 움켜쥐게 된다. 이어서 司馬氏 집안을 이간질 시켜 이른바 ‘八王의 난’을 기획하고 막후 조종자 노릇을 하다 결국 司馬氏에 의해 참살되지만 晉 왕조를 멸망의 길로 이끈 주범이 되었다. 惠帝 司馬衷이 의문의 독살을 당한 뒤, 동생 司馬熾가 즉위하였지만 마지막 남은 실력자 司馬越과의 권력 싸움으로 계속 나라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 시기 북방에서는 흉노 저 강 갈 선비족, 이른바 五胡가 빈번하게 남침하며 중원을 넘보고 있었는데 司馬氏 집안싸움으로 이를 효과적으로 막지 못한 晉은 결국 懷帝 司馬熾는 흉노족 劉聰에게, 愍帝 司馬鄴은 갈()족인 석륵(石勒)에게 포로가 된다. 이 황제 둘은 똑같이 ‘노비황제’가 되어 잔치에서 술 따르고 사냥 나가서 길잡이 노릇하는 등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 살해됨으로써 서진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길지 않은 西晉 왕조시기를 돌아보면 우리가 지금도 경계로 삼아야 할 점이 적지 않다.

 

첫째, 이 시기에 중국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상인 淸談사상이 최고도로 발전하였는데, 그들이 이룬 학술적인 성과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고상한 선비의 정신의 최고 경계, 혹은 취미로 그치지 않고 이를 통치와 행정에도 적용하는 우를 범했다. 즉 현실과 정신적 이상세계를 분간하지 못하고 고상함을 뽐낸 이들의 행태는 강한 외족의 침입에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한 왕조의 후계자 결정은 그 왕조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이다. 힘 있고 야망에 가득 찬 아들이 많을 때 간혹 피의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국가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불가피한 강자 선발의 과정으로도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백치’아들을 인정상 내칠 수 없어 후계자로 삼은 우둔함은 비판받아야 마땅할 것이며, 오늘날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셋째, 그러나 무엇보다도 왕조에 가장 치명적인 독은 부패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시대는 당연히 돈 많은 사악한 무리가 국정을 농단하고 충신의 길을 막고 사회를 온통 타락으로 이끄는 지름길이다. 만고에 변함없이 경계 삼을 수 있는 거울이지만 모든 시대는 이를 빠짐없이 반복하고 있다.

 

넷째, 이 시기는 역사상 가장 생명이 값없이 죽어간 시대로 꼽을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시기에 생명 사상에 대한 논의와 고뇌가 가장 치열하게 펼쳐진 시기이도 하다. 너무나 많은 지식인이 비명횡사하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우는 시대였다.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의외의 일로 다치거나 죽지 않게 하는 것인데, 이를 망각하는 지도자가 너무 많지 않은가?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2015 시민강좌 『차이나 스토리』 강연자의 발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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