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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61/2015.09] 기획 _ 仁川華僑史話(1) 중일전쟁기 인천화교 사회단체의변화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5 조회수 46

[Vol.61/2015.09] 기획 _ 仁川華僑史話(1)    중일전쟁기 인천화교 사회단체의 변화

이정희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인천판사처가 중일전쟁 시기인 1942년 인천화교의 각 사회단체에 대해 간단히 정리한 것을 교무위원회에 보고한 당안이 있다.1) 이를 근거로 1935년 이후 인천화교의 각 사회단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인천화상상회는 1935년과 마찬가지로 위원회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주석은 1, 상무위원은 5명을 두었다. 당시의 주석은 1935년과 마찬가지로 손경삼이었으며, 당시의 나이는 58, 산동성 무핑현 출신이었다. 상무위원은 주석을 포함하여 5명이었다. 곽화정(郭華亭) 58세로 산동성 액현(掖縣) 출신이었다. 왕흥서(王興西) 42세로 산동성 황현(黃縣) 출신이었다. 이선방(李仙舫) 50세로 산동성 무핑현 출신이었고, 왕소남(王少南)은 산동성 출신이었다. 인천화상상회의 당시 연간 수입은 4천 엔이었으며, 중화의지 2천 평을 관리하고 있었다.

 

산동동향회는 이통호(利通號) 기선을 운영하고 있었다. 회장과 부회장 각각 1명을 두고 간사는 7명이었다. 연간 수입은 6천 엔으로 화상상회의 연간 수입보다 많았다. 회장은 사숙당(沙肅堂), 부회장은 조전사(趙甸俟)였다.

 

남방회관은 동사 1명이 있을 뿐으로 연간 수입은 100 엔에 불과했다. 남방회관의 동사는 이전과 같이 왕성홍이었다. 광방 및 광동회관은 이름만 있을 뿐 아무런 활동이 없었다.

인천중화농회는 1937년에 한 번 조직을 바꾸어 1942년 현재 간사장 1, 부간사장 1, 연간 수입은 2천 엔에 달했다. 농회의 역할은 이전과 같이 화교 야채 재배 농사에 관한 각종 업무를 담당했다. 간사장은 곡류송(曲毓松)이었다.

 

여관조합은 10여개의 여관(객잔)에 의해 조직된 단체로 중국과 조선 간의 이동의 제한으로 여객이 줄어 영업이 매우 부진했다. 간어판매중개인조합은 원래 경기도어업연합회에서 조직한 단체로 여기에는 화상 7개소가 가입해 있었다. 주로 이 조합은 조선산 해산물의 수출을 담당했다.

 

화상무역협의회는 1941 5월 경인(京仁)지역 21개 무역상에 의해 조직된 단체로 일본 관청과의 원활한 업무 진행을 위해 일본인 하타에 토시로(波多江俊郞)를 이사로 앉혔다. 업무는 주로 화상의 수출입 허가 신청을 담당했다. 이 협의회의 회장은 화상상회 주석인 손경삼이었다.

 

그 이외 원염조합이 있었지만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화상이 이전과 같이 산동성산 소금을 수입할 수 없었고, 원염이 조선총독부의 전매제로 인해 화상 원염 판매업자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 마영파(馬永發) 경성총영사 인천 방문 사진

출처: 인천화교협회 소장자료

   

한편,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 가운데 마영파(馬永發) 경성총영사가 1943년 경 인천을 방문하여 영사관 회의청 앞에서 인천판사처 직원 그리고 인천화상상회 임원과 같이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마 총영사는 왼쪽에서 첫째줄 네 번째 인물이다. 마영파 총영사는 1907년 인천영사관 수행원으로 조선에 부임한 후 조선의 각 영사관 영사를 거친 후 1943년 린겅위(林耕宇) 총영사 후임으로 1943년 총영사로 임명된 인물이다.

 

중일전쟁 이후 인천화교소학의 교육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화교는 충칭국민정부의 국민에서 왕징웨이 난징국민정부의 국민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먼저 인천화교소학교의 실태를 보도록 하자. 1942년 현재 학교 동사회(이사회)의 동사장(이사장)은 주경성총영사인 린겅위이며 동사는 왕졘궁(王建功) 인천판사처 주임, 남방회관의 동사인 왕성홍인천화상상회의 상임이사인 손경삼, 곽화정, 이선방, 왕소남, 왕흥서, 그리고 산동동향회의 회장인 사숙당, 부회장인 조전사가 포함되어 있었다.2) , 인천화상상회의 상임이사 전원, 남방회관 동사 그리고 산동동향회의 회장, 부회장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들 사회단체의 임원이 인천화교소학교의 동사로 참가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인천화교소학교의 교장은 이인탁(李仁卓)이며 교원은 9명이었다. 학급은 모두 6개 학급이고 초급 4개 반, 고급 2개 반이었다. 학생 인원은 190명이며, 직원의 월급은 25-115엔이었다

 

인천화교소학의 연간 경비는 약 8천 엔이었다. 주요한 수입원이었던 ‘범선조비(帆船照費), ‘범선톤연(帆船噸捐)’이 산동성산 소금 수입의 감소로 크게 감소하자, 천광쉰(曾廣勛) 주인천판사처 주임은 1935년 난징국민정부에 기부금을 요청, 3만元을 받아냈다. 이 돈을 상하이 중앙신탁국에 예금하여 연리 10%의 이자로 연간 3천元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인천화교소학교의 제1기금이었다.

 

또한 중일전쟁 후에는 법폐(法弊)의 평가절하(엔고)로 이자 수입이 줄어들자, 손경삼 주석은 1940년 봄 학교 운영을 위한 기부금을 거둬 모금액은 1.7만 엔에 달했다. 이것이 제2기금이었다. 3기금은 1943년 린겅위 총영사의 제안으로 모금한 3.3만 엔이었다. 인천화교소학교의 수입은 기금의 이자 수입으로 연간 6천 엔, 학비 수입 3천 엔, 정부 보조금 1,900, 1.09만 엔이었다. 지출은 9천 엔이었다. 따라서 1,900엔의 흑자였다. 학교 건물은 교실 5, 도서실 1, 유예실(遊藝室) 1, 사무실 1, 인천판사처의 토지를 차용한 운동장은 약 182(600)이었다.3)

 

|| 한성(인천)화교소학의 교과와 수업시간 (단위: 시간)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5학년

6학년

합계

수신

1

1

1

1

1

1

6

국어

8

8

10

10

10

10

56

산수

4

5

6

6

7

7

35

공민상식

3

3

3

3

-

-

12

작문

1

1

1

1

1

1

6

唱遊

1

1

-

-

-

-

2

미술

1

1

1

1

-

-

4

일어

-

3

4

4

5

5

21

國術

-

2

2

2

2

2

10

체육

-

-

2

2

2

2

8

음악

-

-

1

1

2

2

6

역사

-

-

-

-

2

2

4

지리

-

-

-

-

2

2

4

자연과학

-

-

-

-

2

2

4

총계

19

25

31

31

36

36

178

출처: 194271日收,  <朝鮮華僑槪況>, 「汪僞政府駐朝鮮總領事館半月報告」, 『汪僞僑務委員會案』(2088-373). ; 楊韻平 (2007), 『汪政權與朝鮮華僑(1940-1945): 東亞秩序之一硏究』, 稻鄕, 187-188.

 

||는 한성화교소학의 각 학년별 개설 과목과 수업 시간을 정리한 것이다. 인천도 같은 경성총영사관 소속이기 때문에 한성화교소학교의 개설 과목 및 수업 시간이 거의 같았을 것이다.

 

인천화교소학교 1-6학년 개설 과목은 총 14개 과목에 주간 총 수업시간은 178시간이었다. 그런데 1935년 당시 개설되어 있던 영어 과목은 1942년의 교과과정에서는 사라졌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적국인 미국과 영국의 국어가 영어이기 때문에 폐지한 것으로 보인다.

 

장제스 난징국민정부 시기에 없던 것이 베이징임시정부 시기에 새롭게 추가된 과목은 유교사상을 가르치는 수신 과목이었다. 수신 과목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 학생을 대상으로 주 1시간 배당되어 있었다. 이 과목은 베이징임시정부 교육부가 장제스 난징국민정부가 적극적으로 시행했던 국민당 당화교육(黨化敎育) 배제의 교육방침과, 서구 의존의 탈피라는 임시정부의 건국이념에 의해 신설되었다.4)

 

그리고 일어과목의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 장제스 난징국민정부 시기에도 일어 과목이 개설되어 있었지만 5·6학년 때 일주일에 두 번 수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5)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의 일어 수업은 1942 6월 현재 2학년 3시간, 3·4학년 4시간, 5·6학년 5시간이 각각 배정되어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수업시간 수로 볼 때 국어(중국어), 산수 시간 다음으로 많았다. 이처럼 일어 수업 시간이 많아진 것은 왕징웨이 친일협력정권의 중일친선 교육이념 의 철저한 실현에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베이징임시정부의 교육부도 중일친선의 건국이념 및 교육이념에 따라 소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일주일에 최소한 3시간의 일본어 수업을 시행하도록 지시했다.6)

 

이러한 일어 수업의 증가로 인천화교소학교는 일본인 일어 교사를 채용했다. 일본인 교원 스가타 켄지(菅田謙治) 1939 2월에 임용되었으며, 데라이 치에코(寺井千惠子) 1940 11월에 각각 임용되었다.7)

 

인천화교소학교가 사용하는 교과서도 장제스 난징국민정부 시기의 교과서와 달랐다. 중일전쟁 이전 난징국민정부 교육부교과서국(敎育部敎科書局) 검인의 교과서가 1938년부터는 베이징임시정부의 베이징교육총서편심회(北京敎育總署編審會) 편찬의 교과서로, 1940년 임시정부가 해체된 후는 화북정무위원회교육총서편심회(華北政務委員會敎育總署編審會) 편찬의 교과서로 바뀌었다. 린겅위 경성총영사는 1942년 왕징웨이 남징국민정부 교육부 편찬의 교과서로 바꿀 것을 지시했다8).

 

상기의 논의를 통해, 중일전쟁 시기 인천화교소학교의 교육은 ‘반일적’인 장제스 난징국민정부에서 친일협력정권의 교육체제에 편입되어 교과서 및 교과과정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 1942715日收, <仁川辦駐事處轄境內僑務槪況>, 「汪僞政府駐朝鮮總領事館半月報告」, 『汪僞僑務委員會案』(2088-373).

 

2) 1942715日收, <仁川辦駐事處轄境內僑務槪況>, 「汪僞政府駐朝鮮總領事館半月報告」, 『汪僞僑務委員會案』(2088-373).

 

3) 1942715日收, <仁川辦駐事處轄境內僑務槪況>, 「汪僞政府駐朝鮮總領事館半月報告」, 『汪僞僑務委員會案』(2088-373).

 

4) 이정희 (2007.9), 「중일전쟁과 조선화교: 조선의 화교소학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제35, 122.

 

5) 1930, 「改進華僑敎育曁僑學立案」, 『駐韓使館案』(03-47, 193-02).

 

6) 小島昌太郞 (1942), 『支那最近大事年表』, 有斐閣, 745.

 

7) 19401218, 「京城總領事館公務人員任命辭職及僑敎等問題」, 『汪僞外交部案』(2061-544).

 

8) 194271日收,  <朝鮮華僑槪況>, 「汪僞政府駐朝鮮總領事館半月報告」, 『汪僞僑務委員會案』(2088-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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