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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59/2015.07] 출판물 특별기획 _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 -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를 중심으로』, 이정희·송승석 著, 學古房, 2015.05.29.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5 조회수 35

 

[Vol.59/2015.07] 출판물 특별기획 _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 -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를 중심으로』, 이정희·송승석 著, 學古房, 2015.05.29.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 -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를 중심으로』

이정희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자료명
 

저자

출판사

출판일자

총서사항

판형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
-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를 중심으로

이정희·송승석

學古房

2015. 5. 29

중국관행자료총서 6

신국판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서문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필자는 인천화교에 관한 기존의 연구 성과나 일반 소개서에 잘못된 사실을 전하는 것을 자주 발견했다. 사회의 혼란의 근저에는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 부족과 진리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 인천차이나타운의 올바른 조성도 인천화교사회와 인천의 발전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에서 나와야 한다. 우리가 과거의 화교 역사를 연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로서 잘못된 역사를 후세에 물려주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이런 생각과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의 만남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 책은 서론과 결론 그리고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부록은 인천화교 관련 자료 소개 및 연표가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시기는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다.

 

주로 활용한 자료는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의 근대 시기 사료이며 이 이외에 중국의 주경성총영사관의 “주한사관당안(駐韓使館檔案)(타이완중앙연구원근대사연구소 소장), “왕위교무위원회당안(汪僞僑務委員會檔案)(난징중국제2역사당안관 소장),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외교 담당 부서인 외사과(外事課)자료이다. 근대 인천화교와 관련된 1차 자료를 모두 참고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1차 자료를 활용하여 근대 시기 인천화교와 관련하여 새롭게 밝혀낸 사실(史實)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천화교협회의 전신인 중화회관 및 중화상회의 설립 연대 그리고 각 동향회의 설립 연대를 밝혀냈다. 중화회관의 설립은 1887년 초, 중화상무총회의 설립은 1913 12, 중화총상회의 설립은 1915 12, 화상상회의 설립은 1929 6월이었다. 그리고 산동동향회의 설립은 1891, 남방(회관)의 설립은 1899, 광방(회관)의 설립은 1900년이었다.

 

둘째, 인천중화상무총회 및 각 지역 중화상회의 연합체인 여선중화상회연합회의 장정(章程)의 내용 전문을 번역하고, 이를 상세히 분석하여 동 조직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각 지역 화교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던 중화상회 조직의 장정이 이처럼 완벽하게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셋째, “인천중화상회 보고서”(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의 분석을 통해 1930년대 중반 인천화교의 사회 및 경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밝혀낼 수 있었다. 인천 화상의 경제는 1920년대 전성기를 맞은 이후, 1930년대 들어 1931 7월 발생한 제2차 배화사건과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불경기,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고관세 부과 및 일본산 대체품으로 인한 수입 감소로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국면에 있었다. 여기에다 조선총독부가 1934 9월부터 실시한 중국인 입국 제한 조치와 화교의 국내 이동을 제약하는 조치 등으로 인천화교 인구가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인천화교 사회단체의 활동은 이전에 비해 많이 위축되었다. 그러나 인천 화상은 여전히 포목상, 해산물 수출무역, 잡화 수입상 부문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同順泰와 王成鴻은 현재의 차이나타운에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넷째, 한국 정부 수립 직후 한국 정부의 인천 화상에 대한 차별적 조치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었는지 “인천중화상회 보고서”를 통해 분명히 밝혀낼 수 있었다. 기존의 연구에선 한국 정부의 외환 및 무역정책에 초점을 맞춰 이뤄졌지, 인천 화상의 입장에서 그러한 정책이 얼마나 차별적인지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인천중화상회 보고서”에는 그러한 차별적인 정책뿐 아니라 일선 한국 공무원의 화상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에 대해 매우 ‘분노’하는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다섯째, 인천 화상의 각종 금융 및 거래 네트워크를 밝혀낼 수 있었다. 인천 화상은 상하이, 오사카, 옌타이, 칭다오 등지의 화상을 통해 상품을 수입하고 있었으며, 인천의 은행과 전장(錢莊)을 이용하여 수입 대금을 지불했다. 또한 인천 화상은 인천 각 은행 지점으로부터 대출 받아 자금흐름을 원활히 했다.

 

여섯째, 인천 화상의 상점은 자본출자자와 노무출자자로 구성된 중국 전통의 기업형태인 합고(合股)가 많았다. 또한 각 상점은 관련 업종을 중심으로 강력한 상점 연계 조직인 연호(聯號)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는 해방 초기 한국 최대의 무역회사인 만취동(萬聚東)의 주권(株券)을 통해 만취동의 연호가 동순동, 계중무역, 복생동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한편, 이 책의 부록에 실린 자료는 근대 인천화교를 연구하는데 기본적인 사료이다. 【부록1】은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 가운데 근대 시기의 목록을 작성한 것이다. 문서뿐 아니라 사진, 도장 등의 비문서 자료의 목록도 게재되어 있다. 【부록2】는 일본의 신용전문회사가 조사한 인천 화상 상호의 신용조사 목록이다. 1910년대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의 장기간에 걸친 신용 조사의 결과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인천 화상의 규모나 신용 정도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부록3】은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 가운데 1935년과 1949년에 조사된 “인천중화상회 보고서”의 원문 전문과 번역문 전문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인천중화상회 및 여선중화상회연합회의 장정 원문 전문과 번역문 전문도 게재되어 있다. 【부록4】는 인천화교와 관련된 조선과 중국 간에 체결된 조약문의 번역문을 게재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10.4.) ‘인천구화상지계장정’(1884.4.2.), ‘한청통상조약’(1899.9.11.), ‘인천, 부산 및 원산의 청국조계 장정’(1910.3.11.), ‘조선의 중화민국 거류지 폐지 협정’(1910.2.1.)이다. 【부록5】는 이번 조사 결과 새롭게 밝혀진 인천화교 관련 새로운 사실을 반영한 ‘근대인천화교연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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