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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58/2015.06] 논단 _ 조선과 만주국의 협력 이데올로기인 ‘선만일여론(鮮滿一如論)’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5 조회수 93

[Vol.58/2015.06] 논단 _ 조선과 만주국의 협력 이데올로기인선만일여론(鮮滿一如論)’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송규진 _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

 

1890년 이래 일제는 ‘주권선’ 유지를 위한 ‘이익선’의 확보를 대외정책의 중요한 목표로 설정했다. 일제는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시기까지는 러시아의 만주 주도권을 인정하고 일본이 조선에서 주도권을 행사한다는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을 내세웠지만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만한불가분론’으로 대외정책을 바꾸었다.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먼저 조선과 만주를 하나로 묶는 인식을 구축하기 위해 역사학을 이용했다. 이는 만선사관으로 결실을 맺었다. 한국사의 정체성, 타율성, 당파성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식민사학 가운데 만선사학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만선사’ 혹은 ‘만한사’란 용어가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으로 개념화되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러일전쟁(19041905) 직후부터 1910년을 전후하여, 이른바 ‘만한경영(滿韓經營)’이 한창 논의되기 시작할 때 생겨나 학계의 일반 용어가 된 것 같다. 시라토리 쿠라기치[白鳥庫吉] 1905년 무렵부터 만주 및 조선의 역사지리 연구의 필요성을 제창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이라고 약칭됨)에 만선역사지리조사실(滿鮮歷史地理調査室)이 신설되면서 1907 1월부터 ‘만선사’ 연구가 착수되었다. 이나마 이와키치[稻葉岩吉]는 ‘만선사’연구를 체계화하면서 ‘조선과 만주가 역사적으로 하나의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1910년 이후 일제는 압록강 철교 준공과 안봉선 개통을 통해 조선과 만주사이의 교류를 활발히 했다. 이로 인해 경성 남대문에서 출발한 급행열차가 만주의 창춘(長春, 만주국 수립 이후 新京)까지 직통 운행할 수 있었고 ‘정치·경제상으로 만주와 조선은 이미 경계가 무너졌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일제는 만주와 조선의 통치정책을 일원화하기 위해 ‘관헌수뇌자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1921 5월 선만회의(鮮滿會議)에는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를 비롯하여, 각부대신,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 정무총감, 관동청장관, 관동군사령관, 주중국공사, 텐진[天津]영사 등이 출석하여 만주와 조선에서 실행할 통치정책을 강구했다. 특히 만주지역에서 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공동 대응을 하기 위한 방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일본에서 조선이나 만주를 시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경우에는 ‘선만시찰단’을 조직하여 하나로 묶어 시찰하기도 했다. 해외여행도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일본 신문사가 주최하는 민간인 단체 관광이나 문부성과 해군성이 공동 주최한 선만여행이 격증했다.

 

일제는 만주국이 수립되자 조선철도를 만주철도와 연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조선 북부지방과 만주지역을 하나로 묶는 교통망을 정비했다. 그리하여 동해를 경유하여 일본에 이르는, 만주∼조선∼일본을 연결하는 주요한 루트가 형성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철도 및 철도의 각 종단항인 웅기, 나진, 청진 등 ‘3항’을 통일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1933 9월 조선철도의 일부를 만철에 위탁했다.

 

또한 일제는 조선과 만주국의 무역을 전담할 기구로 1933 4월에 조선무역협회를 설립하여 무역 촉진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무역협회는 그 지부를 만주국은 물론 관동주, 중국으로 확장했으나 주력을 기울인 것은 대만주국 무역이었다. 조선무역협회 만주지부출장소는 인쇄물 발행, 신문·잡지선전, 간담회, 문서선전, 출장선전, 즉매선전, 시식회, 견본시·전시회, 조선상품 발송에 의한 선전 등 조선상품을 만주국에 선전하고 소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1936 8월에 미나지 지로[南次郎]는 조선총독에 취임하면서 “동양평화의 근간은 일만(日滿) 양국의 불가분의 관계를 더욱 견고히 하는 데 있다. 게다가 조선과 만주는 접경하고 있기 때문에 양 민족은 실로 하나로서 공존공영을 기약해야만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미나미는 취임초부터 산업, 경제, 정치에서 ‘선만일여’를 강조했는데 1936 10월에 개최된 조선산업경제조사회에서도 ‘선만일여’를 지도정신으로 채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총독부 간부가 여러 차례 만주를 시찰하고 또한 관동군, 만주국 등의 당국자도 자주 조선에 오게 되었다.

 

1936 10월에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와 관동군사령관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가 투먼[圖們]에서 회담을 하면서 만주와 조선의 관계를 좀 더 밀접하게 하기 위해 서로 긴밀히 협조하기로 했다. 그들은 회담을 마친 뒤 만주국과 조선은 만주사변 이전의 국경관념이 해소되었다고 발표하고 구체적 시책들을 내놓았다. 투먼회담의 결정은 구체적으로 실행해 옮겨졌다. 정무총감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綠一郞]는 만주국이민, 압록강수로개발, 대만주국무역, 교통통신연락, 경비 밀접화, 우수한 관리교환 등을 안건으로 한 선만최고중요회담을 위해 만주로 갔다.

 

또한 1937 4월에는 만주국 국무총리 장징후이[張景惠]가 경성을 방문했다. 만주국 국무총리의 조선방문은 선만수교사상 ‘획기적 장거’라고 평가되었다. 장징후이는 연설에서 조선과 만주의 관계는 형제육친사이라며 친밀감을 표했다. 당시 그의 연설을 생방송으로 하는 선만교환방송도 이루어졌다.

 

만주국 국무총리 장징후이[張景惠]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선과 만주의 관계는 군사적으로도 더욱 중요한 관계로 발전했다. 1939 12월에는 중일전쟁에서 조선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관동군사령관 우에다 겐키치가 경성으로 와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와 회견했다. 당시 미나미는 선만일여는 기본적으로 ‘대륙경영’을 기초로 하여 구상되었음을 솔직히 밝혔다. 이를 위해 조선인 이주자에 대해 만주국에서 잘 보살펴줄 것을 당부했다. 우에다는 조선에서 출동한 군인이 중일전쟁에서 큰 활약을 벌인 것과 조선에서 중일전쟁을 위문하고 후원한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다.

 

1941 4월에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만주국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당시 ‘동아의 대국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자각분자’가 있음을 개탄하면서도 대부분의 조선인이 “동양인의 운명공동체에 의하여 공존공영의 도의 세계를 건설한다는 숭고한 목적을 이해하고 일본국민의 긍지와 대동아건설의 사명에 매진하고 있다”며 조선인이 일본제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음을 자신했다. 미나미는 ‘선만일여론’를 ‘동아공영권’ 확립의 근간인 일본·만주국·중국을 하나로 묶는 데에 매개역할을 보다 확실히 하고자 관동군사령관 우에다 겐키치와 만나 기본요강과 실시방안까지도 구체적으로 합의했다. ‘선만일여론’은 내선일체와 일만일체를 매개하는 역할로서 조선과 만주국이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음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선만일여론’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제가 ‘대동아공영권론’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대동아공영권은 ‘남방권(南方圈)’과 ‘북방권(北方圈)’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일제가 주장한 초국가적 이데올로기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대동아공영권’의 지도국가는 당연히 일본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거점으로 대륙 ‘북방권’을 결합하고 대만을 거점으로 해양 ‘남방권’을 결합했다. 일제는 조선을 북방권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대륙전진병참기지론’을 제기했고 만주국에서는 ‘현지조달주의’를 제창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만일여론’은 ‘대륙일여론(大陸一如論)’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상황에서 조선과 만주국의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륙권의 결합은 필연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과 만주국과의 연락을 보다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 1942 4월에 선만연락회의가 조선총독부에서 개최되었다.

 

1942 7월에 만주국 참의부의장 장스이[臧式毅]는 경성으로 와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도 조선에서 만주국을 원조한 것에 대해 조선총독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1942 8월에 조선군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이 확대되면서 조선과 만주국은 정치, 군사적인인 측면은 말할 것도 없고 산업, 경제적 측면에 있어서도 공동의 운명을 갖고 있음을 특별히 강조했다.

 

‘선만일여론’은 일제가 조선을 발판으로 대륙을 침략하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정치 세력 간에 대립·갈등속에서도 조선과 만주국의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일제는 만주국 이주 조선인을 ‘선만일여’의 첨병대로 높게 평가했다. 따라서 조선인의 만주국 이주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만주국이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며 집단이민을 장려 하는 등 일제의 대륙정책에 부응하는 ‘질적으로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 긴밀하게 협력했다. 그러나 만주국에서도 일본인은 조선인을 차별했고 만주국 이주 조선인도 그런 현실을 피부로 느끼며 대부분 비참한 삶을 살았다. ‘선만일여론’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조선의 대만주국무역이 크게 늘었지만 무역상사의 운영주체는 거의 일본인이었다. 일부 조선인의 ‘선만일여’에 대한 기대는 대부분의 조선인에게는 실현될 수 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image.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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