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알림
Information / News

열린게시판

제목 [Vol.58/2015.06] 기획 _ 중국동북이야기 (7) 근대 도시봉천의 형성과 상업공간의확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5 조회수 84

[Vol.58/2015.06] 기획 _ 중국동북이야기 (7)    근대 도시봉천의 형성과 상업공간의 확대

근대 도시봉천의 형성과 상업공간의 확대*

김희신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奉天이라 부르는 도시 공간은 본래 만주족의 故地이며, 청초 皇宮과 奉天府가 있었던 지역에서 유래한다. 청말 이후 봉천은 한족 이주인구의 급격한 증가, 통상지로의 개방, 철도의 부설과 함께 도시근대화 과정에서 도심을 구성하는 세 개의 공간, 즉 奉天城內, 商埠地, 滿鐵附屬地로 확대, 발전해 갔다.

 

<奉天 도심 공간: 만철부속지·상부지·성내>1)

  

 

우선 奉天城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만주족의 故地이며, 內城과 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內城은 벽돌로 쌓아 만든 정방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벽의 동서남북 각 면에는 각각 大小 두 개의 門, 즉 小東, 大東, 小西, 大西, 小南, 大南, 小北, 大北 등 8개의 門이 있어 외부와의 교통에 이용되었다. 그리고 각 門을 통하는 동서남북의 도로를 주요 大街로 하여 井字形(바둑판 모양)의 도로가 성내를 관통한다. 한편 內城을 둘러싸고 바깥쪽에 있는 外城은 내성과는 달리 타원형의 土城으로, 외성 벽에는 內城 8개 각 문과 도로의 연장선에 關을 설치하고 邊門이라 불리던 8개의 문이 있다.

 

<奉天市 內·外城門의 위치와 명칭>

성곽

門 위치

內城

外城

門 명칭 (속칭)

關 명칭 (속칭)

東面

 

內治 (小東門)

小東關 (小東邊門)

 

撫邊 (大東門)

大東關 (大東邊門)

西面

外攘 (小西門)

小西關 (小西邊門)

懷遠 (大西門)

大西關 (大西邊門)

南面

西 

天佑 (小南門)

小南關 (小南邊門)

 

德盛 (大南門)

大南關 (大南邊門)

北面

西

地裁 (小北門)

小北關 (小北邊門)

福勝 (大北門)

大北關 (大北邊門)

 

城의 중심에는 청 초기의 황궁이 있고, 鼓樓와 鐘樓가 小西門에서 小東門으로 통하는 四平街에 위치해 있다. 청대 八旗의 거주지였던 내성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은 바로 四平街(현재 中街)라 부르는 곳이었다. 이 거리는 상업지로 발전하여 오랜 전통을 지닌 점포가 많았고, 청말 이후가 되면 한족 상공업자의 터전으로 변화되었다. 스코틀랜드인 의사 크리스티가 『奉天三十年(1883-1913)』이란 저서 속에서 “1905년 이전에는 단층 건물뿐”이라 묘사했던 城內에 1905년 盛京將軍 趙爾巽이 3층의 學務公所를 새롭게 건축한 이후 점차 2-3층의 서양풍 근대 건축물로 학교나 관청이 들어서게 되었다. 민국 성립 이후, 특히 봉천성내 최대의 번화가였던 四平街에는 4층 건물의 吉順絲房이라는 상점을 시작으로 3-4층의 상점이 건축되었다. 장작림이 봉천의 실권을 장악하고 난 후 1920년대 奉天城內에서 市政公所를 설립하고, 도로정비, 상하수도 건설, 민간건축 관리 등 대규모 도시 개조를 시작했다. 당시 성내는 市公署, 省公署, 1軍管區, 市商會 등 행정기관이 집중적으로 소재하는 동북정권의 핵심공간이었다. 또 백화점, 유력상점, 은행, 회사 등이 들어서 있어 상업도시로의 면목을 잘 보여주었다.

 

다음으로 奉天城 서쪽에는 외국인에게 자유로운 상업 활동 지역으로 개방되어 商埠地라 불리던 지역이 연접해 위치한다. 이 상부지 개방의 역사는 1903년 체결된 中·米<通商行船續訂條約>과 中·日<通商行船續約>에 기초하여 “盛京省의 奉天府와 安東縣 두 곳을 중국 스스로 통상지로 개방한다”는 내용에서 시작된다. 이 조약 체결 이후 봉천은 1909 5월 중국인과 서양인이 잡거하는 공공의 통상장으로 정식 개방되었다. 그러나 개방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며, 정식 개방에 이르는 동안 러일전쟁의 발발, 그리고 개방 조건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일본영사의 의견대립 등으로 인해 6년이란 기간이 소요되었다. 특히 봉천 ‘商埠地’에 대한 의미 해석 문제는 각국과의 개방교섭과정에서 주요한 쟁점 사항 중 하나였다. 중국 측에서 말하는 봉천 상부지는 중국이 별도로 정한 商埠局 관할지역을 의미했다. “城內의 토지는 협소해서 중국측의 행정 각 관청 등에 필요한 토지조차 부족한 상태이므로 외국인이 租用할 만한 토지는 전혀 없다”고 하여 성내를 상부지로 간주하지 않았다. 반면 각국은 봉천개방의 근거가 되는 1903년 체결된 조약과 1905 12월 중일 <會議東三省事宜正約> 附約 第9款에 기초하여 상부지는 조약 성립 당시의 ‘奉天府’를 가리키며, 상부지 구획 및 관리에 각국이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상부지 개방에 관한 수차례의 교섭은 난항을 거듭하다 일시 중지되었는데, 중국은 ‘津滬兩埠外人租地三聯辦法’을 모방하여 1908(광서34) <奉天省城自開商埠總章>을 공포하고 독자적으로 개방하였다. <商埠總章>에서의 상부지 구역은 省城 西郭의 外에 위치하여, 동쪽으로는 邊牆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만철부속지 및 철도에 이르는 구역이다.(2) 즉 외성곽의 小西邊門과 만철부속지의 중간 지역을 가리키며, 성내는 포함되지 않는다. 또 개방지역으로서 상부지의 관리권은 商埠局이 省長公署의 명을 받아 처리하도록 하였다.(4) 이에 대해 미국 등이 삭제, 변경해야 할 몇 가지 의견을 제시했으나, 중국 측에서는 봉천이 이미 개방되었음을 알리고, <外人租地章程16條>를 공포하였다. 결국 ‘상부지’는 이후 재차 그 해석문제를 둘러싸고 쟁점화 할 소지를 남긴 채 개방되었다.

 

중국 측이 설정하여 개방한 상부지는 滿鐵과 그 부속지를 北·東·南 세 방향에서 감싼 초승달 형상으로, 正界(北正界와 正界로 구분), 副界, 豫備界 등 세 지역으로 나누어 구획되었다. 正界(<圖: 商埠地 各界 및 滿鐵附屬地>내 2)는 城內와 滿鐵附屬地의 사이에 있다. 정식 개방된 이후에는 과거 봉천 外城에 중국인 가옥을 구입하거나 임대해 쓰고 있던 각국 영사관이 이곳에 영사관 건물을 신축하였다. 英美煙草公司나 香港上海銀行 등 외국 기업도 진출하여 동북의 독점을 노리던 일본 기업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또한 奉天商埠局이 도로 등 시가지를 정비하면서 관청의 제약이 많았던 城內에서 주거를 옮긴 외국인도 증가했다. 특히 일본인은 부속지의 시가지 정비가 완성되기 전까지 이곳에 주로 거주했다. 중국군벌이나 재지의 유력자들도 경쟁적으로 이곳에 토지를 구입하고 고급주택을 건축함으로써 상부지에도 주택가와 대상점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반면 北正界(正界의 북단, 1)와 副界(3)에는 주로 일반주택가와 중소자본의 상업구역이 위치했다. 특히 1920년대 장작림이 상부지의 토지유실을 막고 만철부속지와 경쟁하려는 목적으로, 상업 자본을 흡수하여 北正界에 北市場을, 副界에 南市場을 세웠다. 북시장은 청대 實勝寺廟會를 기초로 하여 다양한 업종, 예를 들어 식당, 찻집, 극장, 상점, 煙館, 妓館 등이 모여 있어 지방 특유의 소비 공간이 되었다. 남시장도 기능상 북시장과 유사하고 음식점, 서비스업, 오락업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남·북시장의 발전은 상부지 경제를 크게 번영시킨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副界의 서남쪽에 위치한 豫備界(4)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부속지로 편입되어 일본의 식민공간이 되었다.

 

<商埠地 各界 및 滿鐵附屬地>2)

 

상부지 서쪽에 연접하여 위치한 만철부속지는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로부터 東淸鐵道 대련~장춘 구간의 철도경영권과 ‘철도용지’(선로 양측에 설정된 띠 모양의 토지와 각 철도역 앞의 시가지 경영용 토지)를 인계받았던 것에 기초하여 확대발전해 간 공간이었다. ‘철도부속지’라는 기이한 지배형태를 처음으로 연출해 낸 러시아는 동북 지배에 적극 관여하였지만 하얼빈~여순간 철도를 건설할 당시에는 봉천을 중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봉천에 철도역을 건설하기는 했지만 하얼빈과 같은 거대한 철도부속지를 설정하지는 않았다. 러시아와 달리 일본은 봉천을 줄곧 동북의 중심으로 인식하였고, 만철 및 부속지 특권을 이용하여 일본은 봉천에 각종 기구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만철도 ‘철도용지’를 인수받은 이후 그것의 중대한 의미를 즉시 깨달았다. ‘철도용지’였던 명칭도 ‘철도부속지’로 변경하고 봉천을 만철 최대의 ‘철도부속지’로 확대 설정하였다. 그리고 1909년부터 대대적인 시가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市街는 봉천역을 중심지점으로 해서 철도에 평행하는 鐵路大街(이후 宮島町로 개명, 현재 勝利街의 북쪽과 市府大路), 봉천역 정면에서 직선으로 연장된 沈陽大街(이후 千代田通, 현재 中華路), 그리고 이 두 大街가 교차되는 봉천역을 꼭지점으로 하여 동북방향으로 비스듬하게 뻗어있는 昭德大街(이후 浪速通, 현재 中山路) 3대 도로를 축으로 방사형의 대소 도로가 나 있다. 昭德大街의 중심에는 원형광장(현재 中山광장)이 만들어졌고 봉천역전과 함께 시민생활의 중심인 상업중심으로 정비되었다.

 

이상 세 개의 대로(철로, 심양, 소덕대가)는 부속지와 상부지, 봉천성내를 연결하는 도로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만철의 적극적인 시가지 건설을 통해 1920년대 부속지는 거주공간 및 상업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정비해 갔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08년 부속지내 일본인 인구가 981명이었던 것이 1924년에는 16,777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고 한다. 만철에서 1907년 <附屬地居住者規約>을 제정하여 규약을 준수하기만 한다면 국적을 불문하고 부속지에 거주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부속지는 중국인이 합법적으로 거주 및 상업 활동이 가능한 공간이기도 했다. 부속지에 대해 일본은 줄곧 절대적, 배타적 행정권의 행사를 주장해 왔고, 부속지 거주 중국인에 대한 봉천지방정권의 과세권은 부정되었다. 일본은 봉천에 소재했던 ‘만철’ 기구, 영사관, 관동군 등 경제, 정치, 군사가 결합된 식민 통치의 틀을 만들어냈고, 부속지는 이 구조를 통해 통치되는 일본의 식민공간이었다.

 


* 이 글은 『중국근현대사연구』 제60(2013.12)에 게재된 필자의 논문 만주국 수립 이전 봉천의 상업과 중국상인의 동향의 일부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 王鶴·董韋, 中日對峙背景下的自主城市建設-近代沈陽商埠地硏究, 『現代城市硏究』 63(2010), 63(); 塚瀨進, 奉天における日本商人と奉天商業會議所, 波形昭一 編著, 『近代アジアの日本人經濟團體』(同文館, 1997), 118.().

 

2) 王鶴·董韋, 앞의 논문, 64.

 

0 comments
작성자 패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