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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57/2015.05] 논단 _ 중국은행업의 근대화와 상해은행공회, 그리고 국가권력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5 조회수 62

[Vol.57/2015.05] 논단 _ 중국은행업의 근대화와 상해은행공회, 그리고 국가권력

왕징(王晶) _ 중국 하문대학

김지환 옮김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상해은행공회는 1918년 상해에서 은행업에 종사하는 화상자본가들이 자율적으로 조직한 동업조직으로서, 근대 중국의 동업조직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단체라 할 수 있다. 상해은행공회는 북경정부, 남경국민정부 시기에 걸쳐 30여 년 동안 존속하였으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상해전업공회, 상해신탁업공회와 함께 상해시금융업동업공회로 병합되었다. 상해은행공회는 중국금융업의 발전을 추동하고 근대화를 진전시킨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1927-37년의 10년 간은 상해의 화상은행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성취한 시기로서, 같은 기간 동안 상해은행공회의 회원은 이전의 24家로부터 45家로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10년 간의 급속한 성장을 통해 공회의 조직관리 및 대외협조 능력도 제고되었으며, 이에 따라 영향력도 크게 증대되었다. 상해은행공회는 은행업계의 이해를 대변하여 은행 관련 제반 업무의 근대화를 달성하는 등 전국 은행업에서 영도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또한 은행업무의 공공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정부의 경제정책에 참여하고 협조하였으며, 금융 입법에 관한 자문과 폐제개혁 등 경제입법의 영역에서도 동업의 이익을 수호하고 정부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 상해은행공회는 동업의 발전과 단결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수호하고, 은행업의 근대적 발전을 추구함으로써 적지 않은 성과를 일구어 내었다. 이러한 결과 상해은행공회는 그 영향력이 이미 상해 한 지역을 넘어서 전국은행동업공회의 핵심적인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상해은행공회의 수뇌부는 은행업에 종사하는 대자본가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중국은행의 張公權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은행업계의 인물 이외에도 상업계 출신의 王延松과 정계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宋子良 등이 특수한 배경을 바탕으로 역시 수뇌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상해은행공회의 위원 가운데에는 강소성과 절강성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예를 들면 1931년 제1계 집행위원회의 상무위원 15명 가운데 강소성, 절강성 양성 출신이 12명이었으며, 그밖에 상해, 안휘 출신도 있었다. 이와같은 지역성은 지리환경 등 객관적 요소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으며, 강절지역에서 근대 공상업 발전과 경제의식의 성숙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상해은행가 집단은 크게 다섯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은행업의 경영에서 뛰어난 업적을 가지고 중앙정부의 재정부 등 고위관료들과 비교적 양호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자들로서, 예를 들면 상해상업저축은행 총경리 陳光甫, 절강지방실업은행 李馥蓀, 교통은행 총경리 唐壽民, 중남은행 총경리 胡筆江, 상해중국은행 경리 貝淞蓀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주로 은행의 경영에 몰두하면서 정부 상층과의 관계는 비교적 소원하거나 심지어 사이가 좋지 못한 경우로서, 예를 들면 절강흥업은행의 徐寄廎, 徐新六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처음에는 은행업으로 시작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은행업계를 벗어나 정계로 진출한 자들로서, 예를 들면 염업은행 총경리 吳鼎昌, 상해염엽은행 경리 陳蔗青 등이 있었다. 넷째, 은행업계에 상당한 명성과 성과를 가지고 있었으나, 정부와의 관계가 그다지 원만하지 않은 경우로서, 중국은행의 張公權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다섯째, 기술 및 관리능력을 갖춘 일군의 젊은 은행가들로서, 王志莘, 瞿季剛, 章乃器 등을 들 수 있다.

상해상업저축은행
총경리 陳光甫

 

상해은행공회는 특히 대외적인 업무와 관련해서는 매우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으며, 주로 본업인 은행업무에 온 힘을 기울였다. 상해은행공회는 정치적 색채가 있거나 혹은 사회활동과 관련된 업무에 대해서는 비교적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따라서 특정 정파나 주장에 쉽게 부합하거나 반대하지 않았으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견지하였다. 이것은 상해은행가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거나 혹은 은행가는 정치 영역에 진입하려는 야심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아니라, 당시 정세에서 볼 때 그들이 정치분야에서 쉽게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인식하고 자신의 역량을 은행업의 발전에 쏟아 부음으로서 이를 통해 자신들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이들이 매우 실무적이고 현실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해은행가들이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상해항일구국회 등이 일본과 상거래에 종사하는 상공업자들에게 자금을 대출해 주지 말도록 요청하는 서신에 대해, 한편으로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로 이를 실행하기 용이하지 않다는 점도 호소하였다. 이후 개최된 내부회의에서 이를 실행하기는 사실상 쉽지 않다는 논의가 진전되었다. 이러한 대목은 상해은행가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정치문제와 연루된 사안에 대해서는 가능한한 회피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공리 공론을 하지 않고, 사실에 입각하여 시비 득실을 논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상해은행가들은 중국의 근대적 은행업의 발전을 이끌고 선도한 실천가였다. 이들은 중국 금융업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외상은행의 관리경험을 학습하여 신용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은행업과 교역소를 설립하는 등 역할과 공헌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해은행공회는 은행업에 종사하는 회원들의 이익을 대변하여 낙후된 중국의 금융현상과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쉼없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상해은행공회는 이와 같은 이해와 공동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해은행공회의 대외업무 가운데에서도 남경국민정부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시기 상해은행공회와 정부와의 관계는 주로 내채 및 법률 지위의 확정, 경제입법에의 참여 및 수정 등 몇 개 방면에서 체현되었으며, 이들 문제와 관련된 활동을 통해 양자의 관계가 보다 긴밀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1927년 상해은행공회는 내채의 수용을 통해 남경국민정부에 대한 재정적 지지를 표시하였는데, 이것이 국가권력에 대한 상해은행공회 최초의 정치적 선택이었던 셈이다. 이를 계기로 상해은행공회는 내채문제를 중심으로 남경국민정부와 상호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남경국민정부는 현실적인 재정적 필요에 근거하여 내채를 발행하였으며, 상해은행공회를 대표로 하는 상해은행업계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정권을 선택하고 지지하는 의사를 표시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상해은행공회는 내채를 일종의 투기나 투자행위로 간주하여 은행업을 경영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내채는 은행업계와 정부 쌍방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매개였으며, 상해은행공회와 정부 사이를 연결하는 매우 독특한 연결고리였다. 이러한 이유로 양자는 다른 어떠한 단체, 조직과 비교할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상업조직이 어떻게 자신의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상업조직의 기본적인 주지는 상업 이익을 보존하는데 있으며, 정치에 대한 참여는 결코 조직의 직능과 목표가 아니었다. 상해은행공회의 기본적인 목표는 바로 은행업의 발전과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남경국민정부의 수립 이후 상해은행공회는 자치적인 전통이 위협받게 되었으며, 구속되지 않는 독립적 지위 역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국민정부는 수립 직후 각 동업조직에 대한 개조를 통해 이들에 대한 정부의 관리와 통제를 강화하려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각종 동업조직의 회원대회에서도 잘 드러났다. 회원대회에서는 으레 상해시당부, 상해시사회국 대표의 훈사가 포함되었으며, 개회 전에 시당기에 대한 목례, 총리유훈의 선독, 묵념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각종 동업조직은 다방면의 노력을 통해 자신들의 독립성과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정부에 대한 상해은행공회의 일반적인 대응과 태도는 협조와 합작이었다. 정치환경의 변화에 따라 상해은행공회는 더욱 많은 역량을 자신의 본업에 투여함으로써 자신의 정치관념을 희석하거나 감출 수밖에 없었다.

 

1927-1937년 사이에 상해은행공회는 금융법규 및 경제정책을 둘러싸고 여러 차례 재정부, 입법원과 교섭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정부의 입법활동을 존중한다는 취지를 내포하고 있으며, 설사 이러한 과정에서 반대의견이 제기되었더라도 그것은 법령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불합리한 부분에 대한 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중국 금융업에서는 부단히 위기상황이 출현하였으며, 한 두 은행의 도산은 통상적으로 전체 금융업의 안정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상해은행공회는 정부가 금융업과 관련된 법규를 제정하는 일에 대해 환영의 뜻을 표명하였으며, 은행업에 대한 규정의 설치와 관리는 전체 금융업의 발전에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국민정부 입법원이든 재정부이든 상해은행공회 측이 제기한 의견을 매우 중요시하였으며, 입법원이 저축은행법, 소득세, 유산세 등 관련 법규를 입안, 제정할 때에도 상해은행공회의 의견을 매우 중시하여 자문을 구하였다. 중국금융업의 체계적인 발전과 안정은 상해은행공회와 국민정부 모두에게 매우 절실한 과제였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양자의 협조와 협력은 불가결하였다. 상해사변이 폭발한 직후 및 1935년 상해 경제위기 등 특수한 시기에 상해은행공회는 사회경제 질서의 유지를 위해 헌신하였으며, 공상업을 구제하기 위한 책임을 다하였다. 이러한 헌신과 노력은 여타 동업조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는 금융업 동업조직이 사회경제 질서의 안정과 협조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상해는 중국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역으로서, 상해금융업은 업무영역을 기타 각지의 시장으로 확장함으로써 가능한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공간을 확대해야만 했다. 상해은행의 수량이 증가하고 각지에서 분행과 지점이 설립되면서 일종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상해은행공회는 각지 동업 사이에 독특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기타  동업조직과 비교하여 더욱 긴밀한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부 역시 은행업이 건립한 이와같은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하여 경제정책을 관철할 수 있었으며, 이와 함께 금융업의 발전을 선도하였다. 상해는 국민정부 시기에 이미 중요한 경제정책 혹은 화폐개혁의 시발지역이었다. 예를 들면, 폐량개원, 소득세정책이 모두 상해에서 먼저 시행된 이후 비로소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정부는 무엇보다도 먼저 상해은행공회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으며, 이들의 협조를 바라 마지 않았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상해은행공회와 정부는 일종의 긴밀한 상생 협력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내채를 연결고리로 재정경제정책의 제정과 시행에 적극 협조하였으며, 이를 통해 사회경제 질서를 수호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image.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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