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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56/2015.04] 논단_한·중·일 근대 지폐양식에서 동아시아 정체성 찾기 (3)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306

논단_한·중·일 근대 지폐양식에서 동아시아 정체성 찾기 (3)



지역주의가 은폐된 현대 한국의 지폐양식


김판수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이은지 _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석사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서 구성한 지폐양식은 일본 패망 이후에도 다양한 경로를 거쳐 한국 지폐양식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즉 일본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의 시간 동안 어떻게 자국에 적합한 지폐양식을 구성할 것인가를 두고 지폐형태, 언어배치, 문자와 도안 간의 비율 등 측면에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쳤고, 이 과정의 부산물들이 식민지 조선의 지폐양식에 이식되었으며,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현대 한국 지폐양식의 토대로 탈바꿈했다. 한국에서 식민지적 지폐양식을 떨쳐버리기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승만 정부는 대한제국 시기 사용된 화폐단위인 환(?)을 도입하고 일본식 화폐단위인 원(圓)을 폐지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다시 원 화폐단위를 복구했다.


본 편에서는 현대 한국 지폐양식의 형성 과정과 그 정치사회적 의미를 기술한다. 특히 한국 지폐양식 연구를 통해 지폐도안 연구들의 영토화폐와 민족주의적 통합 등 시각의 한계를 비판하고 지역주의와 그 배타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기존의 논의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이 부차적이거나 표면적인 의도에 불과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은 ‘6-25’ 이후 분단 상황에서 국가가 재건되었고, 이러한 조건에서 박정희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해 지역주의 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이는 현대 한국 지폐양식에 여전히 각인되어 있다. 지역주의에 기반한 영토국가 내부의 통합과 배제는 어쩌면 6·25 이후 전개된 분단국가 체제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상상하고 실천했던 역사적 제약의 산물로 접근할 수도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남한에서는 일정 기간 동안 식민지 시기 발행된 조선은행권이 여전히 법화로 사용되었는데, 다만 1946년 7월 발행된 정(丁) 백원권을 시작으로 일본어 문구 삭제와 일본 정부 문양의 무궁화 꽃으로의 교체 등 식민지 지폐양식에서 탈피하여 주권국가 지폐양식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특히 이승만 정권 수립 이후인 1949년 9월 새로 발행된 조선은행권 오원 및 십원 지폐 전면에는 식민지 시기의 도안을 제거하고 ‘독립문’ 도안을 각인했다.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 설립 13일 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한국은행 및 이승만 정부가 어떤 지폐양식을 고려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전쟁 상황이었기에 한국은행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도움을 받아 임시로 일본 대장성인쇄국에서 최초의 한국은행권을 넘겨받아 제조 및 유통시킬 수 있었다(<그림 1> 참조). 


<그림 1> 1950년 7월 22일 일본에서 제작된 최초 한국은행권

  

6·25 초기인 1950년 7월 22일 일본에서 제작된 최초 한국은행권 지폐양식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째, 미국적 세계질서로의 포섭이다. 일본에서 제조된 1950년 한국은행권에서 최초로 우->좌 문자기술방식이 좌→우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둘째, 전통적 국가질서의 재현이다. 이승만은 한복을 입은 자신을 천원권 지폐에 각인했고, 조선시대 왕의 거처이자 불가침의 통치 상징인 광화문과 북악산도 백원권 지폐에 등장했다. 특히, 광화문과 북악산 도안은 대한제국 시기 기획되었지만 일제 초기 1911년 8월 11일에 발행된 도안을 거의 동일하게 차용한 것이다(2015년 3월 관행웹진 참조).


이승만 정권은 6·25가 교착된 1952년 10월 10일 한국조폐공사를 통해 새로운 천원권과 오백원권을 발행하여 일본 제작 지폐를 교체했는데, 천원권과 오백원권 지폐의 전면 도안은 이승만 도안이었고 배면에는 3·1운동이 발생했던 탑골공원이 각인되었다. 또 화폐 도안에 ‘독립’의 상징을 각인한 것 이외에 화폐단위를 변경하여 식민지 지폐양식으로부터 탈피를 시도했다. 즉 이승만 정권은 1953년 2월 및 3월에 2차 화폐개혁을 실시,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변경했다(<그림 2> 참조).


<그림 2> 1953년 3월 오백환 지폐


다만, 환 화폐단위의 복권은 근대적 한국 지폐양식의 토대를 대한제국에서 찾으려 한 것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이승만은 실제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전통적 ‘군왕’으로서 면모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예를 들어, 1953년 3월 지폐는 약 1년 동안만 사용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승만 얼굴이 중앙에 있었기에 지폐가 접힐 때마다 대통령의 얼굴도 반으로 접히는 ‘불경’이 행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 이승만은 1956년 3월 26일 및 1957년 3월 26일 2년 동안 동일한 날짜에 자신의 얼굴을 인쇄한 지폐를 발행했는데, 그 날은 이승만의 ‘생일’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4·19 혁명 이후 잠시 정권을 획득한 민주당이 이승만 도안 제거한 자리에 ‘세종대왕’을 채워 넣었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이유를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1957년 천환권 지폐에서 이승만은 한복을 벗어던지고 양복 도안을 각인했다(<그림 3> 참조). 흥미로운 것은 지폐 전면에 각인된 영어(ONE THOUSAND HWAN)이다. 일본이 약 100년 간 시행착오 과정에서 영어를 지폐 전면에 각인한 것은 유일하게 1885년 은본위제 채택으로 영국 중심의 세계경제 질서 편입을 기념하는 태환권을 발행했을 때였다.

 

<그림 3> 1957년 천환 지폐



현대 한국 지폐양식의 형성은 박정희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박정희 시기 형성된 한국 지폐양식은 엄밀히 말해서 국가 통합의 성격보다 지역 배제적 성격이 매우 강했다. 다만,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 정부와 달리 은근한 화폐표상의 정치를 시도했다. 이는 아래 <표 1>에서 1953년 3월에 확립된 이승만 정권의 화폐도안 체계 확립과 1972년 이후 확립된 박정희 정권의 화폐도안 체계 확립 비교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표 1> 한국은행권의 변화

 

1차 화폐개혁

2차 화폐개혁

4.19

민주당

정부

3차 화폐개혁

1962년 6월

1962년 9월 - 1969년 3월

고액권 

지폐 발행

1972년-1975년

1950년 7월

1952년

10월

미국

제조권

1953. 2

국내

제조권

1953. 3.

면 

광화문

(100원)

이승만

(1000원)

이승만

(500원)

이승만

(1000원)

거북선

(10환

100환

1000환)

숭례문

(10환)

독립문

(50환)

이승만

(100환

500환

1000환

모자상

(100환)

한국은행휘장

(1·5·10원)

해금강총석정

(50원)

독립문(100원)

남대문(500원)

첨성대

(10원)

파고다공원

(50원)

독립문

(100원)

세종대왕

(100원)

남대문

(500원)

세종대왕1)

(100원)

이순신

(500원)

이황

(1000원)

이이

(5000원)

세종대왕

(10000원)

세종대왕

(500환

1000환)


당시 박정희 정부가 의도한 지폐 도안 인물의 위계적 배열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폐도안 체계인 세종대왕(만)-이이(오천)-이황(천)-이순신(오백)이 아니었다. 당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지폐는 백원권이었고 그 지폐 도안은 세종대왕이었으며 원래 박정희가 의도한 만원권 지폐 도안은 석굴암이었다(<그림 4> 참조). 그러나 당시 기독교계의 반발로 이 지폐 도안은 발행 직전 철회되었다.


<그림 4> 석굴암 지폐 도안(1972년 4월 4일 박정희 서명)


즉 박정희가 원래 의도한 지폐 도안 체계는 세종대왕(백원)-이순신(오백원)-이황(천원)-이이(오천원)-석굴암(만원)이었다. 이는 당시 오천원권과 만원권의 경우 매우 큰 돈이었기에 실제로 일반적으로 시중에서 자주 볼 수 없었고, 백원, 오백원, 천원 등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지폐였다. 즉 박정희는 자신이 스스로 동일시하고자 했던 세종대왕과 이순신 등을 주요한 지폐 표상으로 강조했고, 나아가 다른 지폐 도안 또한 매우 의도적으로 배열했다. 이는 <표 2>에서 알 수 있듯이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즉 박정희 정권에서 원래 의도한 지폐도안체계는 특정 지역 중심의 국가 통합과 배제였다. 그러나 석굴암 만원권 지폐 도안이 철회되고 세종대왕이 만원권 지폐 도안으로 다시 활용되면서, 그 의도는 오늘날까지‘의도치 않게’ 은폐될 수 있었다.


<표 2> 박정희 정권 시기 화폐 도안에 정치적 지위·지역 위계

최초 고액권 화폐 도안 계획

도안

지위

지역

세종대왕

(100원)

 

이순신

(500원)

군인

서울

이황

(1,000원)

관료

경북

이이

(5,000원)

관료

경기

석굴암

(10,000원)

경상도민

영남

  

박정희 정부의 지역주의적 화폐양식 체계는 다른 측면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 8월 15일에 비밀리에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국 최초의 기념주화인 《대한민국 반만년 영광사 기념주화》를 발행하였는데2), 이 때 자신의 얼굴을 기념주화에 ‘각인’했고, 그런 이유인지 몰라도 이 기념주화는 1급 비밀로 분류되었으며, 해외에서 전량 생산·판매되었기에 당시 한국은행 조차 이 기념주화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표 3> 《대한민국 반만년 영광사 기념주화》

금  화

액 면

25,000

20,000

10,000

5,000

2,500

1,000

도 안

세종대왕/

국장

신라금관/

국장

박정희/

대통령 문장

거북선/

국장

선덕여왕/

국장

남대문/

국장

가 격

14,000,000

10,000,000

6,500,000

3,500,000

1,200,000

800,000

합계금액

36,000,000원

은  화

액 면

1,000

500

250

200

100

50

도 안

U.N 참전국 용사/국장

석굴암보살상/국장

박정희/

대통령 문장

고려청자/

국장

이순신/

국장

유관순/

국장

가 격

650,000

350,000

450,000

200,000

400,000

100,000

합계금액

2,100,000원

   (김인식, 2007: 258)


은화에 비해 가치가 월등히 높은 ‘금화’ 도안의 인물 도안이 모두 왕과 박정희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또 정식 명칭인 《대한민국 반만년 영광사 기념주화》에서 강조된 ‘반만년’의 영광은 신라를 기점으로 박정희로 수렴되고 완성된다.


<그림 5> 《대한민국 반만년 영광사 기념주화》


문화적 정체성은 그 의도 또는 기원과 달리 역사적 흐름에 따라 새로운 텍스트로 변화될 수도 있기에, 오늘날 한국 지폐양식 그 자체가 여전히 지역주의적 텍스트로만 해석될 수만은 없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지폐양식은 21세기 한국, 통일 한국, 중국의 재부상과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라는 새로운 시공간적 맥락에서 재구성될 필요는 있다.



* 참고문헌


김인식, 2007. 『한국화폐가격도록』, 오성K&C.

한국은행, 2004,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The Bank of Korea.

_______, 2015. 『우리나라의 화폐 - 화폐사, 화폐도감』, 한국은행.




1) 1962년-1969년 시기에 발행된 지폐들이 1975년 5월 10일 까지 점차 발행 중지된 것과 다르게, 세종대왕 100원권 지폐만 유일하게 1979년 10·26 이후인 1980년 12월 1일까지 발행되었다.




2) 한국은행은 대한민국 최초의 기념주화를 1975년 8월 14일에 발행된 ‘광복 30주년’ 주화로 규정했는데(한국은행, 2004: 143), 최근 새롭게 발행한 우리나라 화폐 도록에는 <대한민국 반만년 영광사 기념주화>를 최초의 기념주화로 기록했다(한국은행,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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