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알림
Information / News

열린게시판

제목 [Vol.55/2015.03] 논단_한·중·일 근대 지폐양식에서 동아시아 정체성 찾기 (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100

논단_한·중·일 근대 지폐양식에서 동아시아 정체성 찾기 (2)



식민지 조선 지폐양식에서 국가적 상징의 주변화


김판수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본 편에서는 오늘날 한국 지폐양식을 구성하는 다소 어두운 역사적 토대인 식민지 조선 지폐양식의 변화를 기술한다. 식민지기는 ‘내선일체론’이라는 개념으로 드러내듯, 일본이 조선에 대해 강력한 위계적 통합을 전개했던 시대로 인식된다. 그러나 식민지기 일본이 조선에서 발행한 지폐양식을 통해 접근할 때, 그 사회문화적 통합 방식은 균질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근대화폐사에서 전통 화폐단위였던 “양(兩)-전(錢)-푼(文)”체계가 공식적으로 사라지고 오늘날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근대적 화폐 단위인 일본 화폐단위인 원(圓: 일본의 円)으로 변화된 것은 1900년대 초반부터 전개된 일본의 식민화 전략 때문이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자국 중심의 화폐금융 체계로 통합하려 했기에 화폐단위 통합은 필수적이었다.

  

19세기 말 조선은 정치경제적 관리 능력이 취약한 상황에서도 당백전과 백동화 등을 남발하였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던 민중들은 당국의 경제 관리능력을 크게 불신했고, 이틈에 중국의 마제은과 멕시코 은화 등이 조선으로 더욱 활발하게 유입·유통될 수 있었다. 특히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상인이 대거 조선으로 건너옴에 따라 일본 본위 화폐인 1엔 은화가 우리나라 개항장에서 대량 유통되었고, 그 범위는 점차 대도시로까지 확대되었다.

  

1902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허가 없이 제일은행권 지폐를 발행했다. 한국 영토 내에서 역사상 최초로 발행된 근대지폐였던 제일은행권 지폐양식은 당시 대한제국의 취약한 통치구조를 여실히 재현하고 있다. 첫째, 한국에서 발행되었지만 일본 화폐와 교환 가능한 식민지 법폐처럼 발행된 제일은행권 전면에는 일본어와 영어 및 제일은행 휘장인 ‘이중성(二重星)’이 각인되었다. 둘째, 지폐 전면의 우측에는 제일은행장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양복을 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자리하고 있다. 셋째, 전면 중심부에 각인된 일본어 태환 문구 및 배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어 태환 문구에 비하여, 배면 우측 가장자리에 한글 태환 문구가 왜소하게 삽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 지식인, 민중들은 제일은행권 사용과 유통에 대한 견제와 저항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림 1> 1902년 발행된 (구)제일은행권


일본은 러일전쟁 시기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경제적 식민화를 추구했다. 러일전쟁 진행 중 일본의 총리대신·외무대신·대장대신 3인은 1904년 5월 30일 ‘장차 일한간(日韓間) 화폐의 공통사용이라는 궁극적 목적 달성을 위해 제일은행에게 일본은행권과 동일한 화폐를 발행케 한다’는 일본 정부 지침을 결정했다. 즉 원(圓) 화폐단위는 일본의 대한제국 주권침탈 계획의 중요한 일부였다. 또 1904년 8월 22일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메가다를 대한제국 재정고문으로 세워 개혁을 추진하는 내용을 담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했고, 그에 따라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고업무와 발권업무마저 장악했으며, 나아가 1905년부터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했다. 이로써 조선의 전통적 화폐단위였던 양(兩)-전(錢)-푼(文) 체계가 공식적으로 사라지고 원(圓)이 지배적 화폐단위로 등장했다.


화폐정리사업으로 인해 당시 많은 대한제국 민중들은 소유한 화폐 자산을 수탈당해야 했다. 화폐정리 과정에서 기존의 백동화 등을 소지한 민중들은 가치 절하의 피해를 당하거나 심지어 교환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처했고, 나아가 기존의 화폐 시장에서 빠르게 퇴거됨에 따라 금융공황이 발생하여 추가적인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제국 내 화폐 유통은 일본에 의해 잠식되어갔다(<표 1> 참조).


<표 1> 화폐정리사업 시기 ‘한-일’ 통화량 추

년도

제일은행권

신화폐발행액

구백동화

엽전

일본화폐

1904

3,371,817

-

11,500,000

6,500,000

1,300,000

22,671,817

1905

8,125,267

367,680

6,530,000

6,993,000

1,300,000

22,715,947

1906

8,245,377

2,137,543

5,000,000

5,823,000

1,300,000

22,505,349

1907

11,807,174

4,100,175

3,285,000

4,704,000

959,000

24,855,349

1908

9,648,378

3,214,515

1,800,000

4,406,000

537,000

19,606,689

1909

12,340,378

5,696,265

1,970,138

2,463,933

848,000

23,318,708

  * 오두환, 『한국화폐사』, 1991(재인용, 한국은행, 『우리나라의 화폐』, 2015).


일본은 화폐정리사업이 마무리되자 식민지 중앙은행을 설립하기 위해 1908년 11월 [한국은행조례]를 제정했고, 1909년 7월 26일 공포했으며,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은 (구)한국은행 중역으로 일본인들을 임명한다는 안에 동의했다. 이처럼 대한제국 병탄 이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구)한국은행은 식민지 중앙은행의 성격으로 탄생했다.

  

(구)한국은행 설립 직전, 일본은 본격적인 대한제국 병탄 과정에서 발생될 사회 내부의 반감을 고려한 듯 1908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 기존의 지폐양식을 탈피한 새로운 제일은행권을 발행했다. 이 때 주요 도안들은 화홍문·주합루·광화문과 같은 조선의 사회문화적 상징을 활용했는데, 전면의 언어로는 한국어를 중심으로 일본어·영어를 함께 병기했다(<그림 2> 참고).

  

흥미로운 것은 병탄 직후 민중의 반발을 고려하여 임시로 발행한 (구)한국은행의 지폐양식이다. 첫째, 비록 한글로 ‘원’ 화폐단위를 표기하긴 했지만 전면의 한자는 ‘환(?)’ 화폐단위로 변경했고 배면의 한자만 원‘으로 표기했다. 둘째, 메이지 제조년도를 제거했다. 셋째, 배면 하단의 한글 태환 문구를 일본어로 변경했다. 넷째, 지폐 배면의 영어 태환 문구를 ‘Promises to pay the bearer on demand ONE YEN in Gold or Nippon Ginko Note’로 변경했는데(<표 2> 참조), 이는 대한제국이 일본을 매개하여 공식적으로 금본위제 세계경제체계로 편입되었음을 상징한다. 이처럼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첫 지폐양식 전면에서 일본적 상징을 모두 제거했고, 배면에서도 매우 주변적 형태로만 재현되었다. 이처럼 (구)한국은행권의 지폐양식은 비록 일본의 식민화 지배전략 하에서 탄생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공식 법령을 통해 제작된 최초의 지폐임을 상징하듯 형식적으로는 가장 선구적인 ‘한국적 지폐양식’을 갖추었다. 따라서, 이 지폐양식은 광복 이후 이승만 정부가 도입한 새로운 지폐양식에 실질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고, 이 때문에 (구)한국은행 명칭은 오늘의 한국은행으로 다소 자연스럽게 복원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림 2> 1909년 7월 발행된 제일은행권(좌)와 1911년 8월 발행된 (구)한국은행권(우)


<표 2> 일본이 조선 식민화 과정에서 발행한 지폐에 각인된 언어 표상 변화


 

발행

전면 언어

배면 언어

배면의 태환·환전 문구

(구)제일은행권

1902년

일본어, 영어

한국어, 영어

Promises to pay the bearer on demand at any of its Branches in Corea

(신)제일은행권

1908년

한국어, 일본어, 영어

한국어, 영어

상  동

(구)한국은행권

1910년

한국어

일본어, 영어

Promises to pay the bearer on demand in Gold or Nippon Ginko Note

조선은행권

1914년

일본어, 영어

일본어, 영어

상  동

 

(구)한국은행은 1911년 8월 15일 조선은행으로 개편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근대국가를 지향한 대한제국이 아니라 전통적 국가 ‘조선’을 식민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후 조선은행권에는 일반적으로 일본정부 문장(혹은 조선총독부 문장)인 ‘오동장(梧桐章)’이 각인되었고, 이러한 식민지 지폐양식을 담은 조선은행 지폐들은 1931년 일본의 중국 침략과 더불어 만주 및 중국 본토에까지 유통되었다.


<그림 3> 조선은행권 영업소 소재도


1914년 새롭게 발행한 조선은행권들은 다시 일본 화폐단위인 ‘원’을 되살렸고 그 주요 도안도 1885년 일본 최초 태환은행권에 사용된 대흑천상을 사용했다(2015년 2월 웹진 참고). 1914년 조선은행권 전면에서 일본 지폐양식은 일본어, 우측 상단의 일본정부 문장, 그리고 원 화폐단위인데, 그마저도 두드러지지 않은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그림 4> 참조).


<그림 4> 1914년 9월 발행된 조선은행권(좌)와 1915년 11월 발행된 조선은행권(우)

  

흥미로운 점은 1915년부터 일본 패망 시기까지 모든 주요 지폐의 도안으로 사용된 ‘수노인상’에 있다(<그림 4> 참조).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남극성 화신인 수노인상의 얼굴 모델은 (다소 논란이 있지만) 조선 말 김홍집 내각의 외무대신이자 병탄 후 자작 지위를 받은 김윤식이었다. 물론 이 시기부터 일본정부 문장이 지폐 중앙상단에 두드러지게 각인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 지폐의 좌측에는 ‘조선은행’ 문구가 우측에는 ‘수노인상’이 각각 동등한 부피를 차지하고 있다. 또 1915년 지폐의 중앙 하단의 ‘발행 근거’는 자세히 살펴봐야 읽을 수 있는 작은 글씨로 ‘明治 44年...’이 각인되었다.

 

즉 1914년 지폐양식 및 1915년 이후의 지폐양식은 1911년 8월의 지폐양식에 비해 일본의 국가적 정체성이 좀 더 강조되긴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는 여전히 주변적 형태에 머물고 있었다. 이는 당시 일본 본토에서 발행된 지폐양식들의 표상들이 역사인물·신사·천황가 문장 등으로 채워졌던 것과 비교할 때, 일본은 조선은행권 지폐양식에 자국의 국가 정체성 이식을 상당히 주저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조선 식민화를 위한 사회문화적 통합 전략은 균질적이지 않았는데, 특히 그 ‘도구’의 민감한 성격에 따라 매우 세심하고 유연한 전략을 취하기도 했다. 이는 지폐양식을 통해 잘 드러난다. 즉 지폐양식은 통합된 영토 내에서 핵심적인 상징들로 식민지 민중 전체를 ‘매우 빈번하게’ 동일한 객체로 상상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일본은 지역·시간·특정 공간에서 개별적으로 전개되는 사회문화적 일체화 전략(예를 들어, 교육)과 달리 지폐양식을 통해서는 다소 조심스러운 통치 전략을 입안하고 관철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 결과 일본 식민지 조선의 지폐양식들에서는 일본의 국가적 상징들이 매우 주변적이고 모호하게 각인되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서 은근하지만 매우 ‘의도적’으로 화폐표상의 정치를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 참고문헌

김판수, 2009. 「근대 일본 화폐 양식의 서양화」, 『사회와 역사』81호.

장상진, 1997. 『한국의 화폐』, 대원사.

차현진, 2007.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율곡출판사.

한국은행, 2004,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The Bank of Korea.

_______, 2015. 『우리나라의 화폐 - 화폐사, 화폐도감』, 한국은행.

朝鮮銀行史硏究會 編, 1987. 『朝鮮銀行史』, 東洋經濟.

0 comments
작성자 패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