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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3/2010.11] 논단 _ 천주교 신앙과 쌍위춘의 분할과 합병(天主教信仰与桑峪村的分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2 조회수 62

[Vol.3/2010.11] 논단 _ 천주교 신앙과 쌍위춘의 분할과 합병(天主信仰村的分合)

왕위안저우(王元周) _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씀

박경석 _ 인천대학교 HK교수 옮김

 

1 _ 쌍위춘()

 

쌍위()는 현재 베이징 먼터우거우취(門頭溝區) 자이탕전(齋堂鎭)에 위치해 있는 오래된 촌락이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칭수이허(水河) 골짜기 분지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이 마을은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칭수이허 골짜기는 자이탕촨(齋堂川)이라고도 부르는데, 먼터우거우취는 바로 자이탕촨과 먼터우거우, 다타이거우(大台) 3개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으로는 자이탕촨이 가장 넓다.

 

자이탕촨은 몽골고원에서 화베이(華北)평원으로 통하는 통로 중에 하나로서, “동쪽으로는 도읍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변경으로 달려 커다란 사막으로 통한다”고 하여, 자고로 군사 전략가들이 요충지로 여기던 곳이다. 명대(明代)에 이르러 자이탕촨 북쪽 산 위에 장성을 쌓고, 자이탕촨 안쪽에 자이탕청(齋堂城)을 쌓자, 적잖은 사람들이 자이탕촨 일대로 이주해 살게 되었고, 이 일대가 크게 발전하였다. 더욱이 명조(明朝)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후, 이 일대는 베이징에 석탄과 건축자재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로써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쌍위는 원래 이름이 싼위춘()이었는데, 싼위커우춘(口村)이라고도 했다. 베이산거우(北山溝), 시판거우(西範溝)와 링수이거우(靈水溝) 3곳의 산골짜기 물이 마을 앞쪽으로 교차하며 흘렀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었다. 명대 후기에 뽕나무(桑樹)가 많아져 오디를 많이 생산하게 되자 이름이 바뀌었다. 마을의 뒷부분은 산간 평지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데, 구멍이 하나 있어 마을 앞부분과 통한다. 그래서 관습적으로 이곳을 뒷 골짜기()라고 부르고, 마을 앞부분을 앞 골짜기()이라고 부른다. 앞 골짜기의 바깥쪽에는 비옥한 경작지가 넓게 펼쳐 있다. 이런 지리 조건의 우월함으로 쌍위는 자고로 자이탕촨 동부의 부유한 동네였는데, 명대 초기에 이미 660호가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463호에 887인이 살고 있다.

 

2 _ 천주교와 쌍위 촌락의 분할

 

원나라 때 서방 선교사가 전도를 하면서, 천주교가 자이탕촨에 들어왔다. 대략 1334년에 쌍위춘에 교회당이 생겼다. 명청(明淸) 시기에도 천주교가 계속 발전했다. 1543년에 신도가 200여 명에 이르러 교회당을 확장 건축했다. 18세기말 프랑스 신부가 자이탕촨 일대에서 전도했는데, 쌍위춘을 중심으로 자이탕(齋堂), 마란(馬欄), 시아칭수이(), 황링시(黃嶺西), 장자푸(張家鋪) 등의 촌락에서 다수의 신도가 생겨났다. 1896년에 이르러 쌍위춘에는 신도가 300여 명에 달했고, 주위의 각지에도 200여 명의 신도가 있었다. 이에 교회당을 재차 확장했고 프랑스 풍격을 갖춘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자이탕촨 일대는 한당(漢唐) 이래 불교가 성행해 불교사원이 많았고, 전진파(全眞派) 도교 또한 비교적 흥성하였다. 각 마을에는 모두 불교와 도교 건축물이 있다. 쌍위춘에는 광후이쓰(廣慧寺), 위린쓰(魚臨寺), 야오왕먀오(藥王廟), 시판쓰(西範寺), 시안먀오(西庵廟), 우다오먀오(五道廟), 룽왕먀오(龍王廟) 등 이외에도, 궈제러우(過街樓), 중러우(鍾樓), 구타(古塔) 등과 같은 종교적 의미를 가진 건축물이 있다.

 

쌍위춘에 천주교 신도가 날로 늘어나자, 신도와 비신도 사이의 갈등 또한 날로 격화되었다. 1825년을 예로 들면, 천주교도들이 위린쓰와 룽왕먀오를 때려 부수었고, 룽왕먀오의 목각 용왕상을 칭수이허(水河)에 집어 던졌다. 마을의 다른 사람들이 물살에 칭바이커우(白口)까지 떠내려 간 용왕상을 쫓아가 건져 왔다. 이 일이 있은 후, 신도와 비신도 사이에 협의가 이루어져, 신도들은 뒷 골짜기로 이사해 살기로 하고, 비신도는 앞 골짜기에 모여 살기로 했다. 이로써 쌍위춘은 뒷 쌍위(後桑)와 앞 쌍위(前桑)로 나뉘었고, 뒷 쌍위는 이때부터 순수한 천주교 촌락이 되었다.

 

3 _ 의화단운동과 뒷 쌍위의 성모산(聖母山)

 

마을이 나뉜 후, 앞 쌍위와 뒷 쌍위는 겉으로는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듯 했으나, 분쟁과 소송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난 후, 자이탕촨(齋堂川)에도 의화단이 생겨, 남의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무뢰배와 천주교도에 반대했다. 1900년 음력 7 13, 자이탕촨 58개 촌락의 의화단 연합이 뒷 쌍위의 교회당을 공격했다. 프랑스 신부가 천주교도를 지휘하여 방어막을 치고 수비에 들어갔다. 천주교도들이 비교적 선진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의화단은 이틀 내내 뒷 쌍위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14일 밤에 뒷 쌍위에서 철수하여 공격 방향을 장제푸(張家鋪)의 교회당으로 돌렸다.

 

이후,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도는 성모가 마을을 보호해 주었다고 여기게 되었고, 성모가 영()으로 나타났다는 전설이 생겼다. 뒷 쌍위 촌민과 천주교 측에서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 전설을 강조하곤 한다. 성모의 보살핌에 감사하기 위해, 1902년 교회는 뒷 쌍위 뒷산에 성모산(聖母山)을 세웠다.

 

의화단운동 이후, 뒷 쌍위 성당이 다시 세워지고, 프랑스 신부와 벨기에 신부가 이곳에 머물렀다. 북양정부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담임 신부가 중국인으로 바뀌었다. 또한 요셉수녀원이 세워지고, 수녀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양자핑(楊家坪)에서는 수련회를 개최하였는데, 항전시기에는 이곳에서 뒷 쌍위 촌민들이 전란을 피했다. 항전시기, 자오이탕(趙義堂) 신부가 신도들을 이끌고 항일전을 지원했다. 1940년 겨울 일본괴뢰군()이 뒷 쌍위 성당을 불살랐고, 항전 승리 후에 새로 건축되었다.

 

1947년 자이탕촨 일대에서 토지개혁이 진행되었을 때, 뒷 쌍위 성당이 매우 많은 토지와 산림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오이탕 신부가 지주로 몰렸으나, 앞 쌍위와 뒷 쌍위 촌민이 모두 그를 보호했다. 1948년 토지개혁 재조사 때에 자오이탕 신부는 민주인사로 인정되었고, 1949년 촌민들은 베이징의 천주교 북당(北堂)에 귀속되었다.

 

해방 후, 사청운동(運動)과 문화대혁명 벌어지던 시절, 뒷 쌍위의 천주교 활동이 영향을 받아 성당이 창고로 바뀌었고, 촌민들의 종교 활동은 지하로 숨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1983년 이후 집단 종교 활동이 회복되기 시작하고, 1987년 종교정책이 시행되자, 1988년 이후 쌍위 천주교 성당이 재건될 수 있었고, 베이징 교구에서 파견한 신부가 이곳에 부임하여 교무(敎務)를 맡게 되었다. 1993년 성모산을 복구하고 노천 제단을 만듦으로써, 이곳은 다시 이 일대의 천주교 성지가 되었다. 뒷 쌍위 촌민들은 아직도 이곳으로 성모를 찾아와 마음속의 소망을 간구하고 있다. 그들은 이를 일러 “자오마마(找媽媽, 엄마를 찾아)”라고 한다. 1996년 요셉수녀원을 재건하여 상즈수위안(智書院)으로 개명하였는데, 지금 뒷 쌍위 촌민 문화 활동의 중심이 되어 있다.

 

4 _ 촌락의 합병

 

합작화(合作化) 시기, 앞 쌍위와 뒷 쌍위는 처음에 인민공사 쥔샹(軍響) 대대(大隊)에 소속되었으나, 1961년에는 쥔샹 인민공사 쌍위 대대에 속하게 되었다. 쌍위 대대의 사무실이 앞 쌍위에 있었고, 앞 쌍위와 뒷 쌍위는 4개의 생산대(生産隊)로 나뉘었다. 1979년 생산대가 해체되고, 앞 쌍위와 뒷 쌍위를 하나로 합쳐 관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앞 쌍위와 뒷 쌍위가 다시 한 마을로 합쳐졌고, 원래의 촌명(村名)을 회복해 쌍위춘()으로 불리게 되었다.

 

쌍위춘이 합쳐진 1979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미 30년이 넘게 흘렀지만, 앞 쌍위와 뒷 쌍위의 촌민들은 여전히 앞 쌍위와 뒷 쌍위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마을이 하나가 되었다는 인식은 아직 매우 미약하다. 비록 화목하게 지내고는 있지만 일상적으로 왕래하는 일은 많지 않다. 촌락의 간부는 대부분 앞 쌍위 사람이 담당하고 있지만, 뒷 쌍위에서 신부는 여전히 매우 높은 위엄과 명망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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