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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3/2010.11] 논단 _ 중국 근대 토지소유권과 관행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2 조회수 135

[Vol.3/2010.11]논단 _ 중국 근대 토지소유권과 관행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교수

 

토지는 인간의 삶에서 불가결한 것으로서, 인간은 그 위에 건물을 짓고, 농경과 목축을 영위하며, 공장을 짓고 기업을 경영한다. 토지소유자는 타인으로 하여금 이를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비로소 가치를 발생시킨다. 전통적으로 농경사회였던 중국에서 토지소유권과 사용권의 관계는 중국사회의 기저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매개체임에 틀림없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토지소유권과 사용권에 대한 오랜 경제관행이 존재해 왔는데, 그것은 바로 송대 이후 출현하여 명청시대에 광범위하게 시행된 一田兩主制의 관행이다. 여기서 토지사용권은 물권적 성격을 지닌 上地(田面)소유권으로 확립되어 底地(田骨)소유권과 명확히 구별되어 왔다. 소유권은 田底, 田骨, 田根, 糧田, 糧業, 糧租, 皮業 등으로 불리며 지주의 소유가 되고, 사용권은 田面, 田皮, 質田, 質業, 小租, 骨業, 大業 등으로 불리어 소작인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근대적 토지소유권은 지상, 지하를 전면적이고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물권으로서, 토지소유자는 토지를 자유롭게 사용, 수익, 처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전양주제는 하나의 토지가 상하 양층으로 나뉘어 각각 소유되는 일종의 이중소유권 혹은 분할소유권의 관행적 권리관계를 의미한다. 상지의 권리가 저지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영속되는 독립적 물권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저지소유자는 토지의 사용수익권자인 상지소유자로부터 토지사용의 대가인 租를 징수하는 권리를 보유하지만, 조의 체납이 해약의 원인은 될 수 없다. 상지의 양도, 임대는 저지권리자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상지, 저지소유자의 변경도 다른 일방의 권리를 변경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上地(田面)의 사용권이 소유권에 가깝게 구성되어 지주의 제약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완전히 물권적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일전양주제라 불리는 경제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

 

전면권의 출현 시기에 대해서는 송대와 명대 후반으로 의견이 갈리며, 명말 청초에 급격히 쇠퇴하여 민국시기에 소멸된다는 주장과 민국시기 전면권이 영전권이라는 명칭으로 국가 실정법 체제에 편입, 강화되었다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이것이 중세 공동체적 규제가 희박해지면서 근세적 권리 대 권리의 대립 관계가 형성되며, 각각 목적물의 자유처분권이 있음에 근거하여 전호의 위상 강화의 가장 극명한 지표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지주의 봉건적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토지소유권을 집중시키는 도구로 활용하려는 기생지주제의 일 측면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일전양주제의 관행이 지주 수탈을 유지,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전주가 전면권에 대한 전호의 소유를 승인한 후 租額을 제고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전면으로부터의 이탈을 차단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만청과 민국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토지소유권에는 커다란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청조가 몰락하면서 둔전, 삼림을 비롯하여 旗田, 廟田, 族田 등 국유지, 공유지가 매매나 전당 등을 통해 소유권이 변경되면서 민전이 크게 증가하자 자연히 소유권이 첨예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각종 관전과 둔전이 전국의 경지 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887년의 18.8%에서 1929-1933년의 3.3%로 크게 감소한 것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민국시기에는 소유권 개념과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각종 법률도 소유권을 명확하게 규정하면서 이에 조응하였다. 1912년 남경임시정부의 <內務部通飾保護人民財産令>은 일체의 개인 재산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규정하였으며, 1914 <중화민국약법>은 재산소유권과 영업의 자유를 명시하였다. 또한 1923년의 <중화민국헌법>도 배타적 재산소유권을 강조하였다.

 

아편전쟁 이후 독립 자주의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일은 중국의 시급한 과제가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각 분야의 근대성은 서구로부터 차용된 것이 많았다. 소유권은 근대 법률의 전제이자 핵심으로서, 개인소유권의 관념과 보호 없이 근대적 법제의 수립은 불가능하였다. 각 시기 중앙정부는 서구적 표준 및 사상의 기초 위에서 근대적 법률체계를 확립해 나갔다. 대상물에 대한 소유권의 절대적인 개념을 확립한 서구적 표준에서 볼 때,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 및 사용권의 물권화는 상호 양립되기 어려운 개념이었을 것이다. 근대화와 관행이 반드시 이상적인 것과 변해야 할 당위성 사이의 관계로 규정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로 출현한 경제정책과 법률체계는 반드시 서구의 근대적 제도와 궤를 같이할 리 없는 중국적 특수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만청 이래 공상업의 발전과 토지소유 집중의 경향 속에서 토지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는 자본가들에게 적지 않은 장애가 되었다. 이러한 결과 만청 이래 서구적 표준에 근거한 법률체계의 근대화는 기본적으로 토지소유권과 사용권의 통일을 지향했다. 청조 말기의 <大淸民律草案>은 토지소유권의 범위를 토지의 표면뿐만 아니라 지상, 지하를 포괄하며, 점유와 사용, 수익과 처분 등 소유권의 모든 기능을 포괄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전통적 관행을 부정하였다. 최고사법기관인 大理院도 전조의 체납은 조전관계 철회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판결하였으며, 佃戶의 田皮 매매 및 양도를 금지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토지소유권의 일반적 혹은 전면적 지배권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전면권과 전저권을 모두 물권적 소유권으로 인정하는 전통적 관행과 대립되며, 근대적 소유권의 확립을 지향하는 시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소유권 개념의 도입 및 확립의 과정에서도 현실 사회에서는 여전히 토지소유권과 관련된 전통적 관행이 관철되고 있었으며, 결국 법안도 이러한 현실의 사회경제적 관행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에 반포된 중화민국의 <민법물권편시행법>은 “민권물권편 시행 이전에 발생한 물권은 본 법안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토지에 관한 관행적 관계의 효력을 인정함으로써 경작권은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고 관행으로서 지속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전근대시기 중국의 경제정책과 제도는 경제관행과 밀접한 소통 속에서 운용되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출현한 정책은 나름대로의 합리성과 특수성을 충분히 반영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전양주제와 같은 이중소유 관행은 전호의 경작권이 강화되어 물권의 단계에 이른 것으로서 전농의 권리 강화를 의미하며, 동시에 전산 수익에 대한 일종의 보장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행은 전농의 토지 경영에 대한 자주권을 보장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산에 대한 동기와 적극성을 부여하는 긍정적 작용이 있었다.

 

만청 이래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더불어 토지사용권의 상대적 기회가 감소되면서 전농에 대한 지주의 압박이 강화되었으며, 이는 소비에트운동의 주요한 빌미를 제공하여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였다.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雇農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사용권의 안정은 국가의 재정적 건전성 및 정치적 안정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토지사용권의 장기화 및 안정은 농업생산력의 제고에 유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급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서도 불가결한 요소였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명청대 관행적으로 지속되어 왔던 영소작 및 일전양주제의 사회적 기능이 새롭게 부각되게 된 것이다.

 

남경국민정부의 <중화민국민법>은 “제3자가 토지소유자의 소유권을 침해할 수 없다(970), “지상권자는 불가항력에 의해 토지의 사용이 제한될 경우를 제외하고 지대의 면제 혹은 감액을 청구할 수 없다(837), “영소작자가 체납한 소작료가 2년분의 총액에 도달할 경우 특별한 관행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토지소유자는 영소작권을 취소할 수 있다(846), “典權 설정자가 기간 만료 이후 2년을 경과해도 典物을 상환하지 않을 경우 전권자는 바로 전물의 소유권을 취득하도록 한다(923)”라고 명시함으로써 토지소유자의 권리를 강화함과 동시에 사적 토지 취득의 편의성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중화민국민법>은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임대물을 인도한 이후, 그 소유권을 제3자에게 양도할 경우 임대계약은 양수인에게도 효력을 지속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토지사용권의 보호를 법제화하였다. 더욱이 남경국민정부는 <佃農保護法> <租田暫行條例法案>을 반포하여 전농이 납부해야 할 지조가 최고 수확량의 40%를 초과할 수 없으며, 지주는 임의로 소작관계를 철회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더욱이 자경을 위해 소작관계를 회수할 경우에는 전호가 토지를 개량한 비용으로 상당액을 배상해야 하며, 지주가 자경을 위해 회수한 이후 다시 소작관계를 체결하거나 전당 등으로 매각할 경우 원래 소작농이 우선적으로 승계할 권리를 갖도록 명시하였다.

 

이와 같이 토지소유권과 관련된 법률은 국민정부의 감조감식과 경자유기전의 정책에서 보여지듯이 특수한 중국적 기반의 중층적 요구에 부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화의 보편성과 관행의 특수성이라는 양자를 포용하면서, 소작관계로 상징되는 전근대적 제관계의 해체(근대화)와 사회적 약자의 보호(현대화)의 과제에 직면하여, 전자를 보편적 일반법으로 규정해 나가면서 후자는 특별법에 의해 임차권의 대항력을 인정하는 형태로 이를 처리하였다는 점에서 평가의 여지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와 같이 토지소유권과 관련된 중국 근대의 법률, 제도, 정책은 중국적 특수성을 반영하였으며, 서구의 근대적 제도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서구적 표준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그대로 관철될 수는 없었으며, 합리성과 특수성의 산물인 관행은 근대화의 과정에서도 여전히 생명력과 연속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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