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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54/2015.02] 기획_중국동북이야기 (3) 전통적 국가제사와 민국시기 遼寧地域의 지방통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126

기획_중국동북이야기 (3)    전통적 국가제사와 민국시기 遼寧地域의 지방통사


박경석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제사는 전통적으로 중국 문명을 핵심적으로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양식이다. 제사는 중국인을 중국인이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였다. 그래서 전통시기 중국에는 신령과 조상에 제사 지내는 다양한 壇이나 祠廟가 어느 곳에나 존재했고 일상적으로 제사가 이루어졌다. 민간에서도 다양한 제사 활동이 이루어졌지만, 지방정부를 포함한 국가권력도 예외가 아니어서 祭祀 典禮를 통해 제국을 통합하고 통치 권력의 권위를 높였다.


국가제사는 매우 일찍부터 시작되었는데, 제도적으로는 隋唐代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明代에 이르러 일정한 완결성을 보이고 淸代에 크게 확대되는 양상이다. 국가제사는 중앙에서 황제가 직접 주도하는 제사와 전국적으로 지방관이 지내는 제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앙의 제사는 大祀, 中祀, 小祀(群祀)로 등급이 나뉘었고, 그 전반적인 내용이 祀典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대사는 天地(郊祀), 宗廟, 社稷 등을, 중사는 先農, 山川, 孔子 등을, 소사는 기타 여러 신령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각 등급의 숭배 대상은 시기별로 다소간의 변화가 있었다.


지방에도 지방관이 제도적으로 지내야 하는 제사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전국이 일률적으로 지내야 하는 제사가 있었는데, 이를 ‘通祀’라고 불렀다. 唐代와 宋代에 전국의 州縣에서 거국적으로 거행되는 지방제사는 社稷과 공자(釋奠) 그리고 雨師, 風伯, 雷神으로 구성되는 여러 신령 제사 등 세 종류였다. 元代에 三皇이 추가되었고, 明代에는 三皇이 폐지되고 山川과 公厲(귀신), 공자 從祀와 城隍이 추가되었다. 淸代에는 더욱 확대되어 先農, 關羽, 文昌帝君이 추가되었다.


地方通祀가 거행되는 장소는 壇과 祠廟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壇은 흙과 돌로 쌓은 노천의 제단이고, 祠廟는 가옥의 형태로서 그 안에 神像이나 木主를 모셔 놓는다. 祠는 대개 숭배대상이 인물이고, 廟는 신령인 경우가 많다. 원리적으로 보면 노천의 壇에서 지내는 제사는 대개 ‘자연신’을 대상으로 하고, 祠廟에서 신령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것은 ‘인격신’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전자로는 社稷壇, 風雲雷雨山川壇, 厲壇, 先農壇이 있고, 후자로는 孔廟 및 啓聖祠와 崇聖祠, 忠義孝悌祠, 節孝祠, 城隍廟, 關帝廟, 文昌廟가 있다. 壇은 대개 縣城 밖에 위치하고 祠廟는 城內에 위치하였다.


지방관이 지내야 하는 지방제사에 ‘通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명확히 通祀로 규정되어 있지 않고 전국에서 일률적으로 거행하지도 않지만, 지역 특성에 따라 실제로는 지방관이 제사를 지내고 있고 민간에서도 널리 숭배하는 대상이 있었다. 예컨대 泰山(東嶽廟)과 같은 해당 지역의 名山大川이 대상이 되었고, 해안 지역은 ?祖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국가에 공이 크거나 백성을 특별히 이롭게 한 聖帝名王이나 忠臣烈士가 그 대상이 되었다.


이상과 같이 祀典에 기록된 正祀 이외에는 모두 淫祀로 취급되었다. 항상 적극적으로 단속한 것은 아니지만 淫祀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관념적으로 제사에도 위계질서가 있어, 계층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정해져 있었는데, 天子는 天地에 제사 지내고, 諸侯는 山川에 제사 지내며, 大夫와 士庶는 마땅히 여러 正祀에 제사 지내고, 백성은 조상과 부엌신(竈神)에 제사 지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향촌에서는 토지와 곡신의 신에 기원하고, 里社를 결성해 지역의 신령(鄕厲, 邑厲, 郡厲)에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이런 위계질서 밖의 淫祀는 금지되었고 扶鸞(점술의 일종), 書符(부적) 등의 주술도 금지되었다. 이처럼 국가제사제도(祀典)의 수립을 통해 민간의 신앙 활동까지 통제하려고 하였다. 祭天에 있어 황제의 독점적 권위를 천명하고 백성의 본분에 맞는 祭祀와 신앙 활동의 범위를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遼寧省을 중심으로 볼 때 동북지역에서는 ‘通祀’가 어떻게 수행되었을까? 더욱이 淸朝의 멸망으로 전통시기 국가제사를 지탱하던 황제지배체제가 종식된 이후 民國時期에 이르러 전통적인 帝國의 통합성을 상징하던 ‘天下 通祀’가 어떻게 되었을까? 淸代 및 民國時期에 발행된 여러 地方縣志에서 대략적인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지방지에는 일반적으로 祀典, 祠祀, 壇廟, 祠廟, 廟宇, 廟祠, 神道 등의 항목을 두어 지방제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遼寧省에 속한 대부분의 州縣은 앞에서 서술한 ‘通祀’를 거의 모두 실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縣志에 社稷壇, 風雲雷雨山川壇, 厲壇, 先農壇, 文廟(孔廟), 城隍廟, 關帝廟, 文昌廟의 위치 및 연혁이 소개되어 있다. 본고에서 이를 상세히 소개할 여력은 없지만 遼寧省의 경우 대개 明初 洪武年間과 淸代 雍正年間에 通祀의 골격이 갖추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지방제사라는 제국 통합의 문화코드로 볼 때 遼寧 지역은 明代에 이르러 ‘중국’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淸朝의 멸망에 따른 황제지배체제의 종식이 전통적인 국가제사에 큰 타격을 가했던 것은 분명하다. 민국 수립 직후 국가제사는 전면적으로 중단되었고, 이후 民國 3年(1914)에 회복되는 양상을 보이나 형식과 내용이 모두 간소화되었다. 하지만 국가제사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뚜렷한 의지와 힘, 현실적 필요도 엿볼 수 있다. 이런 양상은 遼寧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대개의 通祀가 유명무실해졌지만 文廟와 武廟의 제사는 강고하게 지속되었다. 社稷壇, 風雲雷雨山川壇, ?壇, 先農壇, 城隍廟, 文昌廟 등의 壇廟가 지방지에 소개되고는 있으나, 제사의 진행과 관련된 내용은 없고, 상당수의 縣에서는 이미 壇廟가 무너져 버렸다거나 祀典이 폐지되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일부 민간에 친숙한 先農, 城隍, 文昌에 대한 숭배는 민간에서 대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文廟와 武廟의 제사는 상당히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실행되었다. 文廟에는 공자뿐만 아니라 역대 先賢, 先儒 등의 從祀, 공자의 5대 조상을 모신 崇聖祠, 節孝祠 등이 포함되었다. 1914년 關帝를 岳飛와 合祀하면서 關帝廟를 武廟로 개칭해 부르게 되었는데, 규모는 文廟에 미치지 못했지만 祭物이나 儀禮는 文廟와 동일하게 하였다.


다만, 제물, 제기, 축문, 순서 등은 기본적으로 淸代의 전통적인 양식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 간소화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첫째 齋戒 절차가 간소화되었고, 둘째, 엎드려 절하는 鞠拜禮에서 허리를 숙여 절하는 鞠躬禮로 바뀌었으며, 셋째 절차가 끝난 후에 축문 등을 태우는 望燎를 없앴다. 전체적으로는 매월 음력 보름과 초하루(朔望)에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고, 봄가을 仲月(음력 2월과 8월) 上丁日(첫번째 丁자가 들어가는 날)에 드리는 丁祭만 남겨 간소화하기도 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image.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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