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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52 /2014.12] 기획 _ 중국동북이야기 (1) 근대 동북을 배경으로 되살아난종교비밀결사 - 黃天敎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82

[Vol.52 /2014.12] 기획 _ 중국동북이야기 (1)    근대 동북을 배경으로 되살아난 종교비밀결사 - 黃天敎

인천대 HK사업단에서는 HK사업 2단계 기간 동안 중국의 동북지역을 중점연구 권역으로 설정하여 민간질서, 상업, 기업 관행에 대한 연구조사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동북지역에 대한 연구가 중국은 물론 한국 모두에게 학술적 가치와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공통적 인식에 기초하여, 『중국관행웹진』에서는 HK사업단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2014 12월부터 <중국동북이야기> 시리즈를 기획하여 연재합니다. 관련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근대 동북을 배경으로 되살아난 종교비밀결사 - 黃天敎

박경석 _ 인천대학교 HK 교수

 

동북지역의 민간종교결사를 보면, 대개 內地에서 이미 일정한 세력을 갖고 있던 결사가 동북지역으로 유입된 경우가 많았다. 근대 동북사회 자체가 1860년대에 본격화된 대규모 이주민의 유입과 함께 내지에서 이식된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요소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민간종교결사의 유입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중에 黃天敎는 동북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비밀종교결사 중의 하나였다.

 

黃天敎는 黃天道, 黃天道敎라고도 했는데, 明代 嘉靖年間에 河北省 萬全縣 사람 李賓에 의해 창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李賓은 군대에 갔다가 전쟁 중에 눈을 잃고 明末의 여러 秘密敎門을 떠돌다가 黃天道敎를 창립했다고 한다. 淸代 初期에 그의 후예들이 계속 傳道에 나서 화북지방에 널리 퍼졌고, 당시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민간종교결사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乾隆 28(1763) 4월에 이르러, 黃天敎의 오랜 거점이었던 碧天寺(河北省 萬全縣 膳房堡 소재)에서 회동하고 있던 지도부가 대거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후에도 다수의 黃天敎徒가 체포되는 일이 몇 차례 이어지면서 淸末에 이르러 교세가 상당히 침체되어 있던 터였다.

 

그런데, 거의 소멸되어 가고 있던 黃天敎가 민국시기에 들어 동북지역에서 갑작스럽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1914 6월과 8월에 『盛京時報』에는 黃天敎의 내용, 蔓延함, 최근의 거동을 알리는 장문의 기사들이 실리는데, “雙陽縣의 저명한 黃天敎 敎主 蔡國山이 체포되어 黃天敎의 내용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 동북지역의 대표 신문인 『盛京日報』가 비밀에 싸여있는 종교결사에 대해 이처럼 상세하게 보도한 적은 거의 없다. 비밀종교결사는 애초에 잘 알려지지 않아 장문의 기사를 쓸 만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黃天敎가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으니, 黃天敎가 당시 얼마나 많은 세간의 관심을 끌었는지를 알 수 있다.

 

黃天敎를 비롯해 민간종교가 흥기하는 배경에는 대개 인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난이 도사리고 있었다. 『盛京時報』의 관련 기사는 1910~12년간 동북지역에 크게 유행했던 콜레라 전염병이 黃天敎의 흥기에 일정한 계기를 제공했다고 한다. 1912년 콜레라가 유행했는데, 黃天敎는 木板을 만들어, ‘콜레라의 발생을 인민이 黃天敎를 믿지 않아 하늘이 재앙을 내릴 징조라고’ 선전하였고, 전염병에 대한 인민의 공포심을 부추겨 입교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콜레라를 피할 수 있는 符籍을 인쇄해서 판매하였고 그 돈으로 각지에 靈岩閣과 같은 시설을 건축하자 다수의 인민이 앞 다투어 입교했다고 한다.

 

콜레라의 유행이 黃天敎의 확산에 좋은 밑거름이 되었던 것은 黃天敎가 설파한 敎義를 보아도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입교를 권유하는 敎義의 골격은 비교적 단순하다. 머지않은 장래에 반드시 대재앙이 있을 터인데, ‘입교하지 않은 자는 이를 피할 수 없고, 입교한 자는 樂土로 들어가 일하지 않아도 金銀과 토지, 먹거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기부금을 포함한 기여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는데, 衆生, 天恩, 保恩, 正恩, 丁行이라는 다섯 등급이 있었고, 그나마 여성은 正恩까지만 올라 갈 수 있었다. 주지하듯이 白蓮敎 이래 비밀결사종교가 갖는 勸敎의 기본 골격과 맥락을 같이 한다.

 

전도 방법으로는 單度法(남자는 남자를, 여자는 여자를 전도) 또는 齊度法(남녀가 상호 전도)이라 하여 ‘맨투맨’으로 전도하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또한, 明正學堂과 같은 ‘宣講堂’을 빌려 宣講을 통해 전도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乩壇을 세우고 砂盤과 木筆 등을 마련해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扶乩를 시행했다고 하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점술의 일종이다. 扶乩는 일반적으로 비밀종교결사가 조직을 운영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 기초를 제공했다.

 

이밖에도 청조의 붕괴, 중화민국의 수립, 북양군벌통치의 형성 등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 각종 戰禍와 자연재해, 이주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 이민자들로 하여금 비밀종교결사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같은 맥락에서 당시 비밀종교결사가 급증했는데 동북지역에서는 在理敎, 家里敎, 白蓮敎, 黃羊敎, 紅燈敎, 混元門敎, 玄雲門敎, 鋼盤敎 등이 상당한 세력을 갖추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黃天敎는 동북지역에서 활동했던 민간종교결사 가운데에 가장 널리 펴졌던 것으로 보인다. 奉天, 哈爾濱, 呼蘭, 遼陽, 錦西, 興城, 西豊, 本溪, 雙陽, 北鎭, 黑山, 蓋平, 開原 等 거의 전역에서 黃天敎가 연루된 사건이 발생했거나, 黃天敎徒가 적발되었다.

 

黃天敎가 흥기하면 할수록 북경정부와 동북의 지방당국은 불안감을 느꼈고, 여러 차례 黃天敎를 진압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신도들은 靈岩閣에서 집회를 열고, ‘升壇扶乩’를 통해 吉林省 지방정부의 진압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진압이 계속되면서 지하로 더 깊숙이 숨을 수밖에 없었고 이후 쇠퇴해 갔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tieba.baidu.com/p/1960418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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