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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51 /2014.11] 논단 _ 홍콩 화상의 민간자본활동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60

[Vol.51 /2014.11] 논단 _ 홍콩 화상의 민간자본활동

리페이더(李培德) _ 홍콩대학 경제·공상관리학원

김희신 옮김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홍콩은 세계적인 화상 상업, 무역 중심으로서 두 가지 측면에서 우세를 유지해왔다. 우선 홍콩은 중국내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금과 상품이 수출입 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지역이었다.1) 또 홍콩은 중국인과 서양인이 잡거하는 사회로, 서양의 상업제도와 지식이 내지에 비해 뿌리내리는 것이 비교적 용이했다. 1841년 홍콩이 개항됨에 따라 광동, 마카오, 화남지역, 심지어 동남아 상인들이 대거 홍콩에 들어와 상업에 종사했다. 홍콩 華人은 170년 상업경영의 역사과정속에서 풍부한 상업경험을 축적해 갔다. 홍콩 화상은 어떻게 성공한 것일까.

 

과거 학계에서는 화상이 법률보다 인간관계를 중시한다고 여겼다. 홍콩은 중국보다 40년이나 앞선 1865년에 회사법(公司法)을 시행했다. 그런데 화인의 자본 모집은 회사법이 아니라 혈연, 지연, 업연 관계에 의지하였고 ‘合會’, ‘合股’ 등의 방법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1939년 홍콩에 등록한 회사는 1,134개였는데, 그 중 301개는 외자기업이며, 130개는 내지에 설립된 외자기업이었다. 화인자본 기업은 703개로 30년 전에 비해 단 2배 증가했을 뿐이다.2)

 

1 _ 홍콩 화상 장부와 회계의 특색

 

홍콩과 관련된 민간상업문헌이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가치가 있는 자료도 적지 않다. 그 중 金山莊, 匯兌莊, 도·소매점, 중소형 제조상 등에서 나온 상업 장부, 연말결산서, 서신이 가장 특색이 있다. 상업 유통과정 각 단계의 내용뿐만 아니라 관련 부분마다의 상업 영수증을 조사하여 화상간 교역 과정에 영향을 미친 신용이나 관계를 밝혀내는 것도 가능하다. 이 역사문헌은 정부가 보존한 당안에 비해 홍콩의 민간경제와 사회생활을 더욱 여실히 반영한다.3)

 

홍콩이 중서문화가 합류하는 국제사회지만 홍콩 화상은 관습상 중국식 장부를 사용했다. 중국과 서양 회계의 가장 다른 점은 중국이 단식부기를 사용하고, 복식부기의 대차 항목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식 장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1)내용에 근거하여 화상 투자, 공사 조직, 이윤, 파산 등 개념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 개념들은 서양과는 확연히 다르다. 2)화상이 장부를 만든 목적은 손익 계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품, 고객, 分號 등이 착종되어 이루어진 상업네트워크를 관리하기 위한 것이다. 3)장부는 고객, 상품, 분호의 활동 기록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화상의 자본형태는 유통이며, 축적이 아니다. 서양 상인에게 계약은 담판의 완료이며, 상업의 새로운 시작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화상의 입장에서 보면 계약은 담판과 관계의 시작을 나타내므로 완전히 반대이다. 화상은 聯號나 분호 관계를 평행 관계로 간주하며, 서양 상인이 수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중국식 회계가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인식했고, 1930년대 초 중국 회계업계에서는 중국식 회계의 개량, 폐기 논쟁이 있었다. 중국식 회계에 대한 비판자는 중국식 회계가 금전의 흐름을 중시할 뿐, 비현금거래에 대해서는 통상 기재하지 않기 때문에 서양식 회계가 중시하는 재고나 감가상각을 반영하기 곤란하다고 여겼다. 또 중국식 장부가 악성부채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낙후하다고 여겼다. 그 외에 가정과 상점의 지출을 분별해내기 어렵고, 공과 사의 구분이 없다는 점도 중국식 회계가 비판받는 주요 부분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서양식 회계가 중국식 장부를 대체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식 장부가 대표하는 것은 화상의 독특한 문화이다. 화상이 관계를 중시하며 이는 자본 조달의 출처, 교역신용의 형성 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화상이 장부를 사용한 원인과 목적은 단지 회계상의 필요에만 있지 않으며, 오히려 교역상품, 고객, 분호가 만들어낸 평행의 상업네트워크에 있다.

 

현재 살펴볼 수 있는 홍콩의 중국식 장부를 예로 들면 비판자가 언급하듯 조직과 계통이 없는 것이 아니다. 余仁生의 장부는 고객기록, 화물기록, 분호 활동기록 등 각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분류가 상당히 명확하며 장부기재도 매우 계통적이다. 분명한 것은 서양 상인이 서면계약을 중시하듯 화상은 장부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2 _ 화상자본의 흐름 방식 - , , , ,

 

영국 식민지인 홍콩에서 화상자본과 영국자본은 분명하게 구별된다. 화상의 자본규모는 영국 상인에 비해 작고, 자본의 대부분이 개인 저축과 저당에서 나오며 축적과정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홍콩은 고유한 경제 환경으로부터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사람, 재화, 상품, 정보 유통의 중추가 되었고,4) 화상은 자본의 흐름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방법으로 자본의 가치를 최대화하고자 했다. 특히 주식(), 채권(), 이자(), 환율() 방면에서 가장 탁월함을 드러냈다.

 

가장 원시적이며 오래된 민간의 자본모집방법으로 合會의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고, 그중 표회(標會, 속칭 作會)가 광동에서 가장 유행했다. 표회의 최대 특징은 최고 이자를 지불하는데 동의한 경우 會의 자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표회가 완전히 사람에 대한 신용에 의거하고 있어서 會首의 책임이 매우 중요했다. 合會의 문서에 기술되었듯이 會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義로 시작해서 信으로써 끝맺기”를 희망했다.5)

 

화상은 홍콩에서 사업할 때 대부분 合股형식을 취했다. 대부분의 會가 합고 문서에 출자자 성명, 출자 금액, 소유 지분의 수, 출자자 책임 등을 분명하게 규정했는데, 파산과 청산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서양습관과는 달리 화상의 합고에서는 官利와 紅利를 얻을 수 있다. 또 노력출자도 지분()이 될 수 있으며, ‘身股’, ‘力股’, 혹은 ‘人股’라 부른다. 官利는 영업의 이익 혹은 손실을 불문하고 얻을 수 있는 이자이다. 紅利는 출자자의 동의에 따라 해당 결산기의 이익을 분배하는데 결산기는 통상 3년 혹은 그 이상이다. 예를 들어 廣生行은 화장품을 생산하는 상점이지만, 동시에 예금·대출업무를 개설했다. 당시 ‘저금증서(貯款單)’에서 보면 지급이자, 예금기간, 인출조건 등을 포함하는데, 모두 시장의 변화에 따라 융통성 있게 변통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장부자료로부터 보면 홍콩 화상은 내지정부가 발행한 공채에도 투자하였는데, 그 중 철도 채권이 가장 많다. 예를 들어 粵漢鐵道와 台山 상인의 지지를 받았던 新寧鐵道 등이다. 신영철도는 1905년 건설되었고, 1930년대 초 결손이 나기 시작하여 1935년에는 거의 파산 직전에 빠졌다. 일반적으로 철도 채권은 모두 5厘 혹은 그 이상의 수익이 있었다. 더구나 철도 채권은 모두 내지정부의 지지가 있었고, 홍콩 화상이 내지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고, 공채에 투자하려 했던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주의할 것은 엄격한 규정과 법례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廣生行, 聯益行, 余仁生, 乾泰隆, 華英昌을 포함한 홍콩의 많은 字號가 모두 예금·대출업무를 개설하여 자금흡수를 중시했다는 점이다. 이런 ‘부대 금융’의 경영방식은 戰後까지 줄곧 유지되다가 60년대에서야 비로소 금지되었다. 송금 업무에서 화상은 통상 송금으로부터 2%의 수속비로 이익을 얻었지만 진정한 이익은 수속비가 아니라 환 차액에 있었다. 수집된 외국환은 적당한 시기에 매각되었다.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세계 은가가 크게 변동하였고, 투기적 상인은 이로부터 거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6) 이외에 적립된 송금은 단기융자에 도움이 되었으며, 동시에 송금과 수출입 업무를 개설한 상인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들의 자본능력을 더욱 확대할 수 있었다. 余仁生號의 余東璇처럼 홍콩화상은 송금으로 얻은 이익을 토지나 부동산에 투자하여 임대만으로도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모두 余仁生 장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호기업이었던 乾泰隆은 曼谷의 陳黌利棧이 제공하는 외환 업무를 이용하여 연호 네트워크내에서 자금을 회전했다. <자료1>은 曼谷의 진횡리잔이 발행한 어음인데 수취인은 대부분 송금인의 홍콩 혹은 汕頭에 있는 연호이다. 예를 들어 1928년 만곡의 和合祥이 산두의 和合祥에게 4,000원을 송금했고, 陳黌利棧은 수속비를 수취한 것 외에도 환율부분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이를 통해 구역 내에서 거액의 자금이 유동하는 방향을 관찰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자료2>를 보면 만곡의 泰萬昌이 홍콩의 泰怡昌에 3,000원을 송금했는데, 해당 票 위에 “이 票는 汕[汕頭] 泰豊昌이 香[香港] 炳隆昌에게 넘겨주기로 하였으니 다른 號를 취해서 [돈을]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다. 이는 해당 표가 이미 산두로 유입되었지만 최후에는 홍콩에서 청산되며, 송금된 자금이 결산 전에 이용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7)

 

자료 1

자료 2

 

홍콩은 1841년에 개항했지만 화상자본의 축적은 20세기초 비로소 성취되었다. 영국 상인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주도한 금융자본주의도 홍콩에 점차 뿌리내리게 되고, 홍콩 화상은 비교적 오랫동안 자본축적과정을 거쳐 20세기 초 은행, 보험공사, 무역행, 창고 등을 개설하고 무역, 토지부동산, 백화 등 서로 다른 사업을 경영했다. 1920년대는 홍콩 화상의 황금 시기라 할 수 있다. 화상자본이 홍콩에 기반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국 내지 및 해외 각 화인 사회로까지 뻗어나갔다. 홍콩 화상이 중국 내지를 위해 조달한 자금은 거액에 달하며 해외 화교가 송금한 돈은 대부분 우선 홍콩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갔다. 주요한 원인은 홍콩이 완전한 금융시설, 외환시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금이 홍콩에 들어와 투기, 평가절상이 가능한데 있었다. 1930년대 세계경제구조가 전환됨에 따라 화상 중에는 지나친 투기로 인해 도산한 경우도 많았다. 반면 난관을 극복하고 다원화 경영을 실행할 수 있었다면 자본의 규모를 더욱 증대시킬 수 있었다. 홍콩 화상이 걸어온 험난한 길은 홍콩경제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며, 민간상업문헌은 종종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 Lee Pui-tak, Chinese Merchants in Hong Kong Colonial Context, 1850-1910, in Wong Siu-lun and Toyojiro Maruya (eds.), Hong Kong Economy and Society : Challenges in the New Era(Hong Kong : Centre of Asian Studies, University of Hong Kong; Tokyo : Institute of Developing Economies, Tokyo, 1998), pp.61-86.

 

2) 科大衛 著, 『近代中國的商業發展』, 杭州:浙江大學出版社,2010.

 

3) James Hayes, "Collecting shop and business papers in Hong Kong," in Alan Birch, Y.C. Jao and Elizabeth Sinn(eds.), Research Materials for Hong Kong Studies(Hong Kong: Centre of Asian Studies, University of Hong Kong, 1984), pp.47-55.

 

4) Takeshi Hamashita, Overseas Chinese Remittance and Asian Banking History, in Olive Checkland, Shizuya Nishimura, and Norio Tamaki(eds.), Pacific Banking, 1859-1959 : East Meets West(Basingstoke: Macmillan, 1994), pp.52-60.

 

5) 濱下武志,統社會與庶民金融──新加坡、馬來西亞華人社會的‘合會’與‘銀信匯兌’,『一九八五年華僑華人歷史國際討會論文集』(廣州:中山大學東南亞究所,1985)pp.64-73.

 

6) David Faure & Lee Pui-tak(eds.), A Documentary History of Hong Kong: Economy(Hong Kong: Hong Kong University Press, 2004.

 

7) 濱下武志, 移民商業ネットワ:潮州グルプのタイ移民送金,『東洋文化究所紀要』 第116(1992 3)pp.6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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