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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51 /2014.11] 기획 _ 중국철도이야기 (11) 중일전쟁의 단서가 된 만주철도문제 : 일본의 만주침략과 동북교통위원회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147

[Vol.51 /2014.11] 기획 _ 중국철도이야기 (11)  중일전쟁의 단서가 된 만주철도문제 : 일본의 만주침략과 동북교통위원회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은 종종 철도분쟁을 고의로 조장하였으며, 이를 침략을 확대하기 위한 구실로 적극 이용하였다. 이와같이 남만주철도는 일본이 중국 동북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하여 중국은 스스로의 역량으로 철도를 부설함으로써 만철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주도한 주체가 바로 동북군벌인 장작림, 장학량이 설립한 동북교통위원회라고 할 수 있다.

 

러일전쟁 직후 청조는 일본이 남만주철도 부설에 매진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법고문철도를 부설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신민둔에서 법고문에 이르는 철도가 비록 짧은 노선이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만철과 병행선이었으며, 장래 북쪽의 치치하얼 등으로 연장될 경우 만철의 영향력을 크게 감소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일본공사 아베 모리타로(阿部守太郞)는 중국외무부에 만철의 병행선 및 그 이익을 해치는 철도의 부설 금지조항에 의거하여 법고문철도의 부설을 승인할 수 없다는 뜻을 통보하였다. 9 16일 일본외상 하야시 다다스(林董) 역시 법고문철도가 명확하게 만철의 병행선으로서 만철과의 사이에 이해가 충돌하므로 일본으로서는 철도의 부설을 결코 승인할 수 없다는 뜻을 통보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일차대전은 일본이 철도를 통해 중국에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일차대전이 발발한 이후 중국으로부터 구미세력이 후퇴하면서 그 공백을 일본이 메우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종래 구미로부터의 공산품 수입을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철도에서도 구미세력을 대신하여 지배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1913 10월 일본공사 야마자 엔지로(山座圓次郞)는 원세개와 비밀협정을 체결하고, 일본이 차관을 제공하여 만몽오로철도, 즉 만철의 사평-조남 노선, 조남-열하와 북녕로 평행선, 개원-해룡, 해룡-길림, 길장의 장춘-조남의 노선을 부설하기로 합의하였다. 1915 1월 일본은 帝制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원세개에게 21개 조항의 요구를 제출하였다. 그 요지는 동북지역에서 중국이 철도를 부설할 경우 우선적으로 일본의 자본을 차입해야 하며, 만철의 회수 기간도 99년간으로 연장하여 2007년도에 회수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더욱이 1917 1월 일본은 단기서정부와 비밀협정인 <서원차관협정>을 체결하고, 철도에 관한 제반 권리를 획득하는 대가로 중국정부에 막대한 차관을 제공하였다.

 

일차대전이 종결된 이후 파리강화회의는 산동에서 철도를 비롯한 독일의 이권을 일본이 승계하도록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중국에서 전국적인 범위의 5·4운동을 촉발시켰으며, 이러한 결과 산동의 조차권과 철도 부설권을 일본으로부터 회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중국 동북지방에서도 철도의 이권을 회수하려는 철도자판운동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남만주철도의 이해와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길림, 봉천, 하얼빈 등에서는 여순, 대련 조차지의 반환과 불평등조약을 철폐해야 한다는 요구가 비등하였다.

 

이와같은 열기 속에서 1924 5월 동북교통위원회(초기명 동삼성교통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동북지역에서의 철도 부설 및 일체의 유관업무를 동북교통위원회로 일원화되었다. 동북교통위원회의 활동은 강한 배일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1921년부터 1931년까지 약 10년간, 국유, 성유, 민유의 각종 형식을 통해 중국관민이 스스로 부설한 철도는 錦朝, 打通, 開豊, 沈海, 呼海, 鶴鳳, 吉海, 昻齊, 齊克, 洮索 등 10개 노선으로, 총 연장 1521.7킬로미터에 달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관민은 동북에서 만철과 대련항에 맞서 물자의 운송권리를 적극 회수하고자 하였다. 장작림은 동북에서의 만철 병행선 부설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일본은 동북에서 부설되는 타통철도, 심해철도, 길해철도, 호해철도 등을 모두 만철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에서 부설되는 병행선으로 인식하였다. 1927 9월 봉해선 개통, 10월 타통선 개통 이후에도 신설 호해철도, 길해철도, 앙제철도의 부설이 연이어 추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배일운동도 점차 격화되어 1927 9 4일 봉천에서는 20만 명의 주민들이 대대적인 배일시위를 전개하여 마침내 11월 일본과 동북주민과의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1928년에 들어 배일운동이 점차 격화되자 일본수상은 일본공사 요시자와 겐기치(芳澤謙吉) 및 상해총영사 야다 시치타로(矢田七太郞) 앞으로 훈령을 내려 1928 5 18일 각각 북경의 장작림과 남경국민정부 외교부장 황부 앞으로 일종의 경고라고 할 수 있는 각서를 발송하도록 지시하였다. 각서는 장개석의 북벌이 진행되면서 전란이 동북지역에 미칠 경우 이 지역의 치안유지를 위해 일본으로서는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만철 병행선의 부설에 대해 일본이 항의하자 장작림은 “이 철도계획은 봉천성 개발이라는 맥락에서 주민들이 먼저 제기한 것이며, 따라서 본 사업은 내정과 관계되는 사안이므로 귀총영사는 관여할 필요가 없다”라고 회답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28 6 4일 오전 5시반, 북경에서 봉천으로 귀환하는 열차가 폭파되었으며, 장작림은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같은달 12일 일본육군성은 오히려 중국내 남방 편의대원의 소행으로 의심된다는 뜻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대련 본사

 

만주사변 직후 만주와 대만을 집어 삼키는 개로 묘사된 일본제국주의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우려할만한 문제는 동북교통위원회가 동북의 연안에 위치한 호로도에 항구를 축조하여 이를 동북의 철도망과 연계시키려는 시도였다. 동북교통위원회는 장개석의 북벌 완성과 중국 통일 이후 호로도 축항을 통해 동북에서 철도망 부설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동북에서의 철도망계획은 호로도 항구의 건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30 7 2, 장학량은 호로도 항구의 기공식에 참가하여 이를 기점으로 하는 동북철도망의 완성을 강조하였다. 1930 10월 동북교통위원회가 결정한 대철도망계획은 모두 호로도를 기점으로 하고 있어, 호로도 축항이 얼마나 핵심적인 문제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대간선 : 호로도 - 봉천 - 해룡 - 길림, 해림 - 의란 - 동강 - 무원

서대간선 : 호로도 - 대호산 - 통요 - 조남 - 치치하얼 - 영년 - 란강- 흑하

남대간선 : 호로도 - 조양 - 적봉 - 다륜

 

일본외무성과 척무성은 협의회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에 합의하였다. 첫째, 만주에서 중국이 부설을 계획하고 있는 철도는 대부분 중일협약에 저촉되는 것으로서 단호한 조치로 이를 저지해야 한다. 둘째, 수비대를 증파하여 일본의 기존 이익을 수호한다. 셋째, 일본상인에 대한 중국철도의 차별대우는 이들에게 심대한 타격일 뿐만 아니라 조약 위반에 속한다. 넷째, 장학량이 남경의 장개석을 만나 만주에서의 철도 부설 및 일본자본의 진출을 저지하기로 합의하였다는 전언이 있는데, 여기에 실력으로 대항한다. 다섯째, 장학량은 일본과의 접촉을 계속 회피하고 있다. 소위 경제주의외교를 지양하고 무력주의외교로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1931 5 24, 일본정부의 선동 하에 대련, 심양 및 남만주철도, 안봉철도 연선의 각지 일본교민 58명이 심양 남만주철도역에서 이른바 ‘전만일본인자주동맹’의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대중국 강경정책을 제창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본국 정부에 송부하였다. 만주사변 직전 일본육군성이 작성한 문서에는 동북에서의 배일운동이 사변 발발의 주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즉 육군성은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만주에서 일본은 구축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하였으며....이러한 가운데 봉천의 중국군대가 만철의 지선을 폭파하였다”라는 이유를 들고 있다. 이와 같이 동북 철도문제는 바로 일본의 동북침략 및 대륙침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1931 3 29일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조사과는 봉천에 주둔한 일본주둔군이 야간연습 중에 중국의 순경에게 발포하여 중일 군경 사이에 충돌을 야기할 것이라고 풍문이 있음을 자국에 보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보고는 만주사변의 전조가 1931년에 들어 이미 출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4 2일에는 국민당 길림성당부가 성립되고 4 6일에는 하얼빈에 국민당당부가 성립되는 등 국민정부의 동북지역에 대한 장악력이 속속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6 4일에는 일본군인이 중국순경에게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만주사변의 전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주사변에서 철도문제가 얼마나 민감하고 계기적 사건이었는가는 일본에서 출판된 서적 가운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19319 18일 오후 10 30분경, 2-3개 중대의 중국정규군(봉천제7여장 왕이철의 부대)이 북대영 서남 측의 남만주철도 노선을 파괴하고 때마침 이 지역을 순찰중이던 일본경비병에게 발포하였으며, 더욱이 유조구 파견대를 향해 돌진해 왔다. 마침내 은인자중하던 일본 측의 포화가 작렬하였다.....1933년에 이르러 기성의 만주 국유철도는 모두 만철에 위탁 경영됨으로써 중일외교의 화근이었던 철도문제도 만주에 관한한 모두 해결되었다.

 

발포가 어느 측에서 먼저 있었는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행위라고 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왜냐하면 이미 1931년 들어 양국 군대 사이에 국지적인 발포사건이 있었으며, 따라서 설사 중국 측의 발포가 선행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만주사변 발발의 계기로 적극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뿐만 아니라 일본 측의 기록은 철도의 문제가 사변의 발발과 나아가 일본의 대중국 침략의 주요한 명분으로 부각되었다는 점은 철도 문제의 중요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일본군부의 태도였다. 1931 1 31일 봉천의 일본총영사는 오히려 일본의 일부 특정 세력이 의도적으로 긴장 국면을 조성하고 있다고 우려하였다. 일본총영사에 따르면 “일본신문들이 봉천발 기사로서 보도한 내용은 첫째, 장개석과 장학량이 배일에 입각한 철도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는 사실과 둘째, 봉천에 영국과 중국이 합작으로 3천 만원에 달하는 은행을 설립한다는 것 등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정보의 출처가 바로 일본군부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즉 봉천의 일본총영사는 이와 같은 상황이 군부 등 일부 세력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는 우려를 표명한 셈이다.

 

1931년에 들어 중일 간에는 이미 수차례에 걸친 발포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일본은 이와 같은 상황을 만주사변의 계기적 사건으로 적극 이용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만주사변이 발발하기 직전 세간에는 일본군부가 장학량에게 군사적으로 타격을 가할 것이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만주사변과 철도와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철도의 문제를 동북 침략의 빌미로 이용한 일본군부의 의도가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침내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성립으로 일본은 동북에서의 철도 부설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동북에서의 철도 노선 부설에 일층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외무성은 1932 1 6, 육군성, 해군성과 함께 <중국문제처리방침요강>을 작성하여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板桓征四郞) 대좌에게 건네주었는데, 여기서 “만몽을 시급히 중국 중앙정권으로부터 분리, 독립시켜 독립국가의 형태를 갖추도록 유도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즉 일본은 만주국의 수립을 통해 본격적으로 만몽의 경제를 일본에 부속시킴으로써 만주, 조선, 일본으로 이어지는 경제블럭을 형성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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