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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50 /2014.10] 자료소개 _ 인천화교협회소장 자료 발굴을 통해 본 ‘인천화교 사화(史話)’ (6)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61

[Vol.50 /2014.10]  자료소개 _ 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 발굴을 통해 본인천화교 사화(史話)’ (6)

Episode 5. 세 가지 헛된 공상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인천화교협회에 소장된 자료를 검토하다보면, 액수가 기입된 장부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개중에는 장부 겉면에 책명이 붙어있어 장부의 성격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제자(題字)가 유실되어 이것이 어떤 장부인지 알 수 없는 것들도 다수 있다. 오늘은 그 중의 하나에 대해 상상을 벗 삼아 몇 자 끄적거려보고자 한다.

 

         

 

파란색 봉면(封面)에 빨간 속표지를 가진 이 장부는 제자가 떨어져나가 누가 작성했는지 소재가 명확치 않다. 화교협회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과 장부 내 대강의 내용을 기초로 추론컨대, 필시 중화회관의 업무와 관련된 장부가 아닐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장부가 처음 작성된 연대가 공교롭게도 인천에 중화회관이 설립된 1905(光緖31)이다. 근거가 턱없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를 토대로 공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로 하겠다.

 

이 장부책은 한마디로 말하면, 월급장부이다. 광서 31년부터 선통(宣統)을 거쳐 중화민국에 이르는 시기까지 월별로 봉급(新水)을 지급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매해 빠짐없이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이 장부에 기록된 것은 1905, 1906, 1911, 1912, 1914, 1915년의 것이 전부이다. 게다가 1905년의 기록은 월별로 지출내역을 밝힌 것도 아니고 연말에 일괄적으로 지급된 봉급의 총액만을 산출해 기입해 놓았다. 나머지 연도에는 모두 월별로 봉급액과 수급자가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 몇 가지를 발견했다.


(사진)

 

첫째, 봉급을 수령한 이들의 직종이다. 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淸道夫, 掃地夫), 야간에 일종의 방범활동을 벌이는 야경꾼(更夫). 각종 분뇨를 퍼서 실어 나르는 똥거름장수(拉糞夫) 그리고 사환(廳差)과 수레꾼(司車) 등이다. 일의 성격상으로 볼 때, 이들은 중화회관의 정식 직원이라기보다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고용되어 일하는 임시직인 듯 보인다. 따라서 이들에게 지급되는 봉급은 중화회관의 경상비가 아닌 특별비 내지 임시비에서 지출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래서 별도로 작성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중화회관이 이들을 특별히 고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언뜻 보면, 이들의 업무는 중화회관 업무와는 딱히 관련이 없어 보인다. 행정업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상들의 상업적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도 아니겠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드는 첫 번째 생각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고 이후에도 청국영사관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른바 청국조계가 폐지(1914)될 시점 무렵까지는 사실상, 중화회관(이후, 中華商務總會)이 자체적으로 청국거류지 내 치안과 위생까지 도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둘째, 위에서 언급한 이들 외에도 중화회관이 특별히 봉급을 지급했던 이들이 또 있다. 그건 바로 중국어 교육(華文敎習)을 담당했던 선생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봉급을 지급했다는 기록은 공교롭게도 1914년부터 나타난다. 그 이전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여기에서 두 번째 상상을 해본다. 1911년 중화민국이 성립된 이후, 중국에선 언어와 지연의 장애를 제거하고 방언과 지역을 넘어선다는 모토 하에 이른바 국어(國語)가 성립되면서 이는 화교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913년 중화민국 정부는 베이징에서 이른바 ‘중국독음통일회(中國讀音統一會)’를 개최하여 베이징 말을 기초로 한 독음체계를 정립했던 일이 있었다. 그동안 화교사회는 각기 언어가 다른 광동출신, 남방출신, 북방출신이 한데 모여 있었던 탓에 심지어는 화교학교 내에서조차 언어가 통일되지 않아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중화회관이 중화민국정부의 시책에 호응해 화교들 대상으로 일종의 표준어 교육을 시행하고자 했었던 것은 아닐까? 마침 그 시기가 공교로운 데에서 촉발된 단상이다.

 

셋째, 장부에 연호를 표기함에 있어 한 가지 의문점을 발견했다. 장부책에는 어김없이 첫머리에 연호가 기재되어 있다. 가령, 광서 3, 선통 3, 중화민국 4년 등이다. 그런데 유독 중화민국 원년이라 할 수 있는 1912년은 연호 대신에 임자년(壬子年)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해 12월 기록에는 신력(新曆)이란 말이 등장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에서 세 번째 공상을 해본다.

 

      

 

임자년 혹은 신력이란 말로 연호를 대신한 데에는 혹시 화교사회가 청()과 중화민국 사이에서 아직 정치적으로 입장정리가 채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화교사회 내에서 여전히 정권교체에 대해 이견이 표출되는 일종의 과도기는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런 개연성은 ‘신력’이란 표기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화교사회가 명확하게 중화민국에 대한 통일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면, 중화민국 원년이란 연호를 쓰는 대신에 굳이 가치중립적이라 할 수 있는 신력이란 표현을 고집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물론, 이 역시 근거 없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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