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알림
Information / News

열린게시판

제목 [Vol.50 /2014.10] 기획 _ 중국철도이야기 (10) 소련의 팽창을 저지한 롱해철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84

[Vol.50 /2014.10] 기획 _ 중국철도이야기 (10)    소련의 팽창을 저지한 롱해철도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신강(新疆)은 ‘새로운 강역’이라는 뜻의 지명으로서,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기에 중국에 새롭게 포함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1750년대 말 청조 건륭제가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 군정합일의 행정기구인 軍府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864년 신강 동부에서 발생한 회교도의 봉기로 혼란한 틈을 타 야쿱벡이 카시카르를 거점으로 국가 성립을 천명하였다. 이들은 천산산맥을 넘어 우루무치 부근까지 침입하여 1871년에 이리를 제외한 천산북로 일부 및 천산남로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영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야쿱벡이 러시아의 남하를 방해하고 청조와의 무역을 차단시킬 것을 우려하여 1871년 이리를 점령하였다.

 

신강을 평정한 이후 청조는 이리의 반환을 요구하기 위해 1879년 좌도어사 숭후를 전권대사로 러시아에 파견하였다. 8개월 간의 협상 끝에 숭후는 9월에 리바디아에서 러시아로부터 이리를 반환받았지만, 이 지역의 70%를 러시아에 조차하기로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러시아에 점령비 5백만 루블을 지불하고, 요충지 7곳에 영사관을 설치할 수 있는 권리와 송화강의 항행권을 인정해 주었다. 또한 러시아상인에게는 신강과 몽고 전 지역에서 무역에 대한 면세특권과 중국 기타지역에서 운반, 판매되는 차에 대한 감세 혜택이 부여되었다.

 

신강성을 중심으로 한 중소 간의 국경 획정에도 불구하고 중화민국 수립 이후 신강성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장은 간단없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제정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비에트연방이 성립되고 난 이후 소련정부는 신강에 특사를 파견하여 통상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였다. 이후 신강성정부는 표면적으로 중국국민정부의 주권에 복속하였지만 사실상 소련에 대한 정치, 군사적 종속 관계가 현저히 진행되었다.

 

특히, 소련이 부설한 토서철도는 남쪽으로 일하 하류 카자흐스탄의 수도인 알마티를 지나 타시칸철도에 도달하여 중국의 변경을 따라 운행되었다. 토서철도의 종점은 신강성의 塔城으로부터 불과 600여 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신강성 성도인 우루무치는 중국 平綏鐵道의 종단역 包頭로부터 무려 2,688킬로미터나 되었다. 토서철도가 완공되고 난 이후 중국인이 신강에 가려고 할 경우 매번 감숙성을 따라 가지 않고 바꾸어 먼저 블라디보스톡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다시 토서철도로 갈아 탄 후 다시 도로를 통해 탑성에서 신강으로 들어오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중국 측에서도 종래 북경에서 산서, 감숙을 거쳐 적화(우루무치)에 이르기 위해서는 2-3개월이 소요되었으나 시베리아철도를 경유하여 토서철도를 이용할 경우 13일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었다.

 

신강성과 소련은 국경선을 무려 1,500킬로미터나 마주하였는데, 특히 만주에서 소련이 일본에게 중동철도를 양도한 이후 극동에서의 지반을 크게 상실하자, 이에 대신하여 신강성의 개발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이다. 소련은 토서철도를 완공한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신강 각 민족을 부추겨 변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하였으며, 이러한 혼란 속에서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1928년 가을, 국민정부는 신해혁명 이래의 숙원인 철도 부설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철도부를 설립하고, 이를 위한 정책의 입안과 실천에 착수하였다. 철도부는 전국의 철도를 통일적으로 관리하고 업무를 개선하였다. 1928 11월 국민당 제162차 정치회의는 철도부장 손과가 제출한 <철로건설대강>을 통과시키고 10년 내에 철로 32,000킬로미터를 부설하고, 이를 위해 매년 3,200킬로미터를 부설하는 대계획을 마련하였다. 여기서 롱해철도를 1934년까지 완공한다는 계획을 수립하는 동시에, 이를 더욱 연장하여 섬서, 감숙, 신강, 청해의 제성을 연결시키는 명실상부한 횡단철도의 부설 계획을 발표하였다.

 

철도부장 손과

 

롱해철도는 중국 간선철도 가운데 매우 중요한 노선으로서, 본래 명칭은 隴秦豫海鐵路이며, 이를 간략히 롱해철로라 부른다. 이 노선은 감숙, 섬서, 하남, 강소의 4성을 거치는데, 강소의 해주에서 시작하여 감숙의 난주에 이르는 총 연장 약 1,70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동서횡단철도이다. 롱해철로는 강소성 해안의 해주, 해문을 출발하여 서주로 나아가 이로부터 하남성으로 들어가서 개봉, 낙양을 거쳐 관음당에 이르고, 섬서성 동관, 서안을 거쳐 감숙성 난주에 이르는 대횡단철도라고 할 수 있다.

 

롱해철도의 시초는 1905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개통된 낙양(하남) 개봉(汴梁) 간의 변락철도이다. 이후 1915년에는 동단의 개봉-서주 구간과 서단의 낙양-관음당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1925년에 서주-해주 구간이 개통되었다. 롱해철도 가운데 남경국민정부 성립 이전까지 완성된 노선은 동단인 개봉-해주 구간이 470킬로미터, 그리고 서단인 낙양-영보 구간이 170킬로미터였으며, 철도부가 성립된 이후 롱해철도의 연장과 부설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932 8월에는 영보-동관 사이의 72킬로미터가 개통되었으며, 동관 서쪽으로도 1931년 동관 쪽에서 착공하기 시작하여 1934년에 서안까지 개통되었다. 국민정부 철도부는 이 구간이 완성된 이후에 서안 이서의 보계까지 연장하기로 결정하고, 서안-함양, 함양-보계의 두 구간으로 나누어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를 위해 중국은행으로부터 500만원을 차입하여 1935 7월에는 서안-함양 구간을, 11월에는 함양-보계 구간의 노선을 완공하고, 12 20일 전 구간의 개통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서안사변으로 개통이 지체되어 1936 11월에 이르러서야 보계까지 준공할 수 있었다. 한편 동쪽으로는 1921년 서주-해주 구간을 기공하여 1923 2월에 운하까지 약 72킬로미터를 준공하였다. 1925 7월에는 운하-대포 구간 114킬로미터를 준공하였다. 1932-1937년 동안에는 영동, 동서, 서보의 각 구간이 완성되었다.

 

국민정부는 롱해철도를 연장하여 서안에까지 도달하였으며, 다시 1935년 섬서와 감숙 양성의 간선도로인 서란선을 정식으로 개통하여 롱해철도와 연결시켰다. 이와함께 서북 공로 운수를 관리하기 위해 서북국영공로관리국을 설립하였다. 이와같은 일련의 계획은 모두 국민정부 철도부의 적극적인 정책 입안과 추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서북개발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 바로 롱해철도였다.

 

국민정부가 롱해철도를 부설한 목적은 서북지역의 개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기에는 서북을 중요한 전략기지로 구축하려는 목적이 내재해 있었다. 지방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관철시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수립하는 일은 중국 근대화를 위한 우선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나아가 서북 각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일은 서북 변경인 신강성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제고함으로써 러시아 세력의 확장을 억제하기 위한 기초였다.

 

롱해철도 노선이 서안까지 완성되었을 때 중국에서는 노선 변경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계획대로 계속 서진하여 난주에 도달하는 방안과 서안으로부터 한중으로 나아가 다시 남하하여 사천성의 성도에 이르는 두 가지 노선이 제기되었다. 난주에 이르는 노선은 지리적으로 험준하여 철도 부설에 더욱 많은 경비가 소요될 수밖에 없었으며, 사천성 성도로의 연장은 경제적 선진 지역을 통과함으로써 경제적인 측면에서 많은 기대 효과를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되었다. 경제적으로 보면 후자가 유력하였으나 국방상의 견지로부터 본다면 전자가 불가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북지역의 안전과 국방이라는 측면을 고려하여 국민정부는 더욱 많은 경비가 소요되는 난주노선을 선택하였다. 이와 같이 서안-난주 노선은 국방상의 견지로부터 부설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철도의 부설은 1927년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화북, 동북에 치우쳐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남북 경제발전의 불균형은 물론, 정치, 군사상 모두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국민정부 철도부는 성립 이후 서북, 서남과 중남지역으로까지 철도의 부설을 적극 확대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롱해철도의 부설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롱해철도의 부설은 의심할 바 없이 서북 지역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경제교류의 확대와 전국시장의 형성, 그리고 중앙정부의 지방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신강 등 변경지역의 중국화를 가속화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에 서북지역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미개척의 땅이었으나, 개발이 진행되면서 서북지역의 사회현상, 면적, 인구, 기후, 교통, 개간, 임업, 목축, 광산 및 풍속이 중국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북개발 이후 여러 조치가 취해져 경제발전을 위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예를 들면, 도량형의 통일과 토지 단위의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금융이 정돈되고 가혹한 잡세가 폐지되었으며, 조림의 형성과 농업이 발전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한 개발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더욱이 롱해철도는 서북지방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예를 들면, 섬서성은 매장량이 전국에서 수위를 차지할 정도로 석유의 생산이 풍부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통시설의 미비로 말미암아 생산된 석유는 대부분 현지에서 소비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섬서 이외의 지역으로 운송할 경우에는 낙타나 수레를 동원하였는데, 운임이 한 통을 실어 나를 경우 백리당 3 5분이나 되었기 때문에 운반이 쉽지 않았다. 감숙성 서북지역도 석유 매장량이 풍부하였으나 현지 지역민들이 지상으로 분출되어 나오는 석유를 자가에서 사용하는데 불과하였다. 감숙성 난주 등에는 석탄 매장량이 풍부하였으나 교통이 불편하고 채굴 수준이 유치하여 사장되는 형편이었다. 감숙 서북지역 및 영하 각지에는 천연 소금 호수가 많아 양질의 소금이 생산되었으나 교통이 마땅치 않아 감숙과 섬서지역에서만 소비될 뿐이었다. 롱해철도의 부설은 이와 같이 서북지역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던 지하자원의 개발과 연안 대도시로의 운송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결과 열강의 경제 침략 속에서 곤경에 빠져있던 민족공상업의 구체책으로서 공업화에 필요한 철, 석유, 석탄과 기타 공업자원을 이들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롱해철도의 완성은 바로 서북지방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중국 각지로 운송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함으로써 지역경제와 함께 중국경제의 발전을 촉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성정부의 입장에서도 중앙화의 진전에 따라 지역이 전반적으로 발전하자 경제발전에 유리한 제반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함으로써 발전을 더욱 촉진하였다. 예를 들면 도량형을 통일하고, 토지를 구획하여 통일하고, 금융을 통일하였으며, 기존의 가혹한 지방세를 폐지하고 정리하였으며, 조림공사에 적극 나서자 이에 따라 자연히 농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국민정부는 이와 같은 발전을 더욱 조장하기 위해 교통 및 수리시설의 발전에 노력을 경주하여 발전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계획은 모두 국민정부 철도부의 적극적인 정책 입안과 추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롱해철도는 서북개발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철도의 부설과 서북개발은 신강과 같은 변경지역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안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국민정부는 이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제고함으로써 대내적으로 군벌의 발호를 억제하고 나아가 중앙집권적 근대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토서철도를 통한 소련 세력의 확대를 차단함으로써 변경지역에 대한 정치, 군사적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이와 같은 서북개발의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 바로 국민정부 철도부의 주도 아래 부설된 롱해철도였음을 생각할 때,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0 comments
작성자 패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