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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9 /2014.09] 연구성과소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35

[Vol.49 /2014.09] 연구성과소개



손승희, 20세기 초 중국 동북의 대두 거래관행과 일본 교역소의 설립」, 『중국근현대사연구』 62, 2014.6, pp.1-41.


 


근대 동북사회는 중국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직접적으로 동북사회를 강타했던 정치적, 군사적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제상품으로 개발되었던 대두는 동북사회의 변화를 견인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며 동북사회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기존연구에서는 이러한 동북사회의 취약성을 중국 내지 혹은 세계 경제에 강한 영향을 받았던 동북의 종속적인 구조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동북사회 내부에서 그 구조적인 취약성을 찾고자 대두의 선물거래 관행에 주목했다. 특히 강한 투기성을 띤 동북 대두의 선물거래에 주목하여 동북사회에 초래된 변화와의 연관성을 찾고자 했다.


 


동북사회는 근대에 와서 급속하게 성장했다. 大豆商品(大豆, 豆油, 豆餠)에 대한 일본과 유럽의 수요 증가에 힘입어 선물거래가 비상하게 발달했다. ‘批賣買’와 ‘期糧’ 등 선물거래 과정에서 유통되었던 ‘飛子’, ‘豆單’, ‘批帖’과 같은 신용증서는 모두 인적 신용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물거래 방식이 성행했던 것은 現銀의 이동 없이 적은 자본으로도 거액의 거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기성이 농후하여 파산하는 자가 속출했다.


 


이러한 동북의 사회경제 조건 하에서 형성된 전통적인 대두의 거래는 糧市(혹은 糧行)에서 이루어졌고 양시에는 양잔이나 대두 관련업종 종사자가 그 조합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합원은 華商에 한했고 日商이 양시 거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화상을 통해야만 했다. 양시는 상당히 번성했고 이를 통제하고 감독했던 것은 각 지역의 자치조직인 公議會 혹은 商務會였다. 公議會/商務會 성립 초기에는 대두 관련 종사자의 同業組織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간에 관련규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동북 고유의 거래관행에서는 투기를 차단하기 위한 규정, 혹은 계약의 위약이나 계약 불이행에 대한 규정은 소극적이거나 규정하고 있지 않았다.


 


화상의 양시가 번성하자 여기서 배제된 일상 중심의 만주중요물산수출상조합은 관동청에 보호를 요청했고 이는 곧 대련에서 관동청 소속의 일본교역소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설립 목적은 투기를 막고 공정거래를 확립한다는 것이었다. 대련을 시작으로 開原, 四平街, 公主嶺, 長春 등의 滿鐵 附屬地에도 관동청 소속의 교역소가 설치되었다. 교역소는 대두 등 특산물의 등락을 방지하고 계약 불이행에 대처하기 위해 각종 保證金 제도를 마련했으며, 信託投資株式會社를 부설하여 청산과 거래의 이행사무를 담당하게 했다. 그러나 교역소가 손해배상 등 완전한 책임에서는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교역소의 설립이 곧 투기성의 차단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 교역소의 설립이 동북사회에 가지고 있었던 더 큰 의미는 日商을 중심으로 동북사회구조를 재편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동북 사회경제는 日商을 배제하는 구조였다. 대두 유통과 매매과정에서 일상은 화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더욱이 선물거래의 투기성으로 인해 동북 사정에 익숙하지 않았던 日商이 華商에 비해 손실을 보는 구조였다. 日本은 이러한 ‘불합리한 구조’를 타파하여 일상을 동북 사회구조 속에 정착시키고, 나아가서 일상이 동북 사회경제의 주도권을 갖는 구조로 재편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상관행을 흡수하고 수용하는 방편으로 화상을 교역소 안으로 편입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화상의 거래 습관을 크게 손상하지 않아야 했다. 교역소 설립 자체도 화상의 상관행을 인정한 위에서 설립되었다. 교역소가 화상의 거래 습관을 수용했던 예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이 은본위제도 하에 있었기 때문에 대련 교역소 성립시기 은본위의 ‘鈔票’를 기준화폐로 채택했다. 둘째, 일본은 내지와의 금융 통일을 위해 대련교역소의 기준화폐를 ‘金票’로 바꾸고자 했지만, 화상의 반대에 부딪혀 몇 년간의 ‘票’와 ‘金票’의 논쟁 끝에 이 양자를 모두 기준화폐로 인정했다. 셋째, 開原, 四平街, 公主嶺, 奉天 등 교역소에서는 동북의 지역화폐인 ‘奉天票’를 기준화폐로 채택했다. 넷째, 화상을 교역소 안으로 끌어들일 방법이 없는 일본은 교역소 밖 현물시장이 왕성했던 개원에서 ‘馬車糧豆現物市場’(華商의 마차 수송 현물시장)을 인정해주고 대신 교역소의 감독을 받게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화상들이 거래상의 불편과 불이익을 피해 관동주나 만철부속지가 아닌 다른 지역의 화상 양시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상의 조치를 통해 일본 관동청은 화상을 교역소 내로 흡수하고자 했다. 이는 화상 중심의 기존 동북사회구조를 일상까지 포함하여 재편하려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 일상이 동북의 주도권을 확대하고 일본 내지와의 경제 일원화를 도모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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