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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9 /2014.09] 연구성과소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41

[Vol.49 /2014.09] 연구성과소개



김희신, 「중국 동북지역의 상업자본과 상점 네트워크」, 『中國近現代史硏究』 제62, 2014.06, pp.43-93.


 


흔히 만주라 불리던 동북의 사회경제 변화의 추동력은 모두 외부에서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인류역사상 최대의 인구이동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청ㆍ민국시기 한족의 대규모 인구 이동이며, 다른 하나는 19세기 개항이라는 외국의 충격이었다. 동북사회경제 변화의 성격에 관한 기왕의 평가가 ‘중국화(內地化)’ 혹은 ‘식민주의’로 이해되거나 ‘중국화’ 그 이면에 식민주의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내부 식민’ 혹은 ‘외부 식민’이라 표현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물론 동북사회경제의 변화과정은 넓은 의미에서 중국화에 기반한 식민지적 요소들을 내포하면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중국화’라는 의미에서건, ‘내부 식민’이라는 의미에서건 현실적으로 한족의 대규모 이동이 동북사회경제 변화의 주요 동력을 제공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주요한 관심은 한족의 이민 그 자체가 아니다. 사람은 문화,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이고, 사람의 이동으로 문화가 전달된다. 사람의 이동이 지역 간의 경계를 깨고, 사회경제문화의 전파, 교류 융합을 촉진한다는 의미에서 인구 이동으로서의 이민, 특히 한족상인의 이민이 동북지역의 사회경제문화 구조를 형성하는데 큰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본 논문은 1930년대 초반 도시 봉천의 사례를 중심으로, 중국동북지역의 상업자본 구성과 상점 내·외부조직의 존재양태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이로부터 동북지역의 상업과 상점조직의 경영형태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그 구조를 안정적으로 지탱하는 문화요소로서 다양한 사회관계의 작동 실태를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청대 초기 동북이민은 대부분 화북지역에서의 한족 농업이민이었고, 동북 개발의 진전과 함께 한족 상인의 활동도 활성화되었다. 특히 산동·河北 지역은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동북지역과 가깝고, 역사적으로도 동북에서의 상업경영은 경제적 성공의 기회를 찾는 하나의 습속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산서상인의 경우는 票號처럼 투자한 업종의 상품경쟁력의 측면에서 전통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우세한 측면이 있었다. 청대 동북에서 경제적 기반을 선점함으로써 그들보다 뒤에 진출한 他지역 출신 이민자들에 비해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동북은 신개척지였고 관내 한족상인은 국가의 보호 없이 동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애초 혈연·지연 관계를 기초로 해서 동북의 상업발달을 이끌었다. 동향네트워크의 거점으로 동향회관을 세우고, 상인단체를 조직해서 그들에게 익숙한 상업조직과 상거래 방식을 바탕으로 영업규칙을 정하고 시장 질서를 규제하는 등 관내의 상거래 관행이나 제도를 동북에도 적용해갔다. 이는 동북지역이 중국 관내의 경제행위 방식을 공유하는 구조로 재편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관내 이주상인들은 친인척 혹은 동향관계를 이용해서 자금을 모집하여 상점을 조직했고, 이것이 바로 합자경영형태로서의 合股조직이었다. 또 동북 시장의 환경에 맞추어 서로 관련 있는 업종들을 연계한 상업망을 통해 이익의 극대화와 사업의 지속적 안정을 꾀할 필요가 있었고, 이러한 필요에 따라 형성된 상점조직이 바로 聯號였다. 가장 전통적인 인적관계에 의한 구성원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시장의 위험성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익의 극대화를 공통의 이해관계로 하는 경영 활동에서 실제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가 작동되었다. 그런데 동향관계가 중첩되어 나타나는 경향이 강해서, 상점 경영상 여전히 동향관계가 여전히 가장 강고한 연결망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에는 ‘지역’ 단위로 상업행위를 해 왔던 商幇이라 일컫던 거대한 상인집단들이 존재한다. 동북지역을 거점으로 한 商幇은 청대 한족들이 대거 동북으로 이주하고 山西, 山東, 河北 등 3幇을 중심으로 동북경제가 활성화되는 가운데 동북에도 지역단위의 상인집단이 형성될 조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관내 한족의 동북으로의 인구이동에 의해 봉천경제가 급속히 발전하였고, 이러한 경제력에 힘입어 성장한 것이 바로 장작림 정권이었다. 그리고 동북지방정권의 정책적 지지를 배경으로 봉천재지자본이 ‘토착화’된 3幇 자본과 함께 봉천의 상공업발달을 이끌어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봉천재지자본의 약진이다. 봉천재지자본가 집단은 중첩되는 면모를 보이지만 대체로 4개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다. 우선 일찍이 상공업에 종사하여 자본을 축적해 갔던 상업·금융계의 자본가, 둘째 동북의 전·현직 省의원·관료·군벌과 그 자손, 셋째 舊만주귀족과 旗人 출신, 마지막으로 東三省官銀號와 같은 성정부 출자의 금융기관 등이다. 대체로 그들은 동북지역에서 특권지도 그룹에 속했고, 과거 혹은 당시의 각종 이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관계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동북지역경제의 규모 확대와 안정에 힘을 쏟고 있던 지방정권과 적극적 관계형성을 통해 상점 경영의 유지 확대를 도모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동북지방정권은 奉天票라는 불환지폐로 자본을 만들어 내고, 관영사업을 통해 상인으로서 거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가능했다. 東三省官銀號가 관영사업으로 粮棧(곡물거래점)을 개설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거대한 자본력, 시장에서의 강고한 신용, 봉천성정부의 정책적 지지에 기반하여 성장한 상점의 사례는 1920년대 장작림 정권과의 관계 속에서 일부 봉천재지자본이 급속하게 성장해 갔음을 확인하게 된다. 봉천재지자본은 성장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외국상인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이라는 排外 운동의 거대한 흐름을 따라,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소위 ‘國貨提唱’ 운동에서 ‘排貨’ 운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지역주의’로까지 호소되면서 경쟁력을 형성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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