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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9 /2014.09] 자료소개 _ 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 발굴을 통해 본 ‘인천화교 사화(史話)’ (5)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60

[Vol.49 /2014.09] 자료소개 _ 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 발굴을 통해 본인천화교 사화(史話)’ (5)

Episode 4-1. 인천에도 중화회관이 있었다.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지난 호에 올린 글 말미에 “석학 제현의 지혜를 간절히 빌고 싶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에 대한 첫 번째 답신이 드디어 도착했다. 소중한 지혜를 빌려주신 김희신 교수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1차 사료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고증을 결여한 채 일부 제한된 자료에 근거해 함부로 판단한 죗값을 톡톡히 치르는 느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값진 정보를 얻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전화위복이 따로 없을 게다.

 

김희신 교수는 한국화교 및 근대 한중 외교관계사 연구에 있어 국내 최고 전문가 중의 한 분이다. 김희신 교수의 결론을 한마디로 정하면, 인천에는 중화회관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구구절절이 설명하기보다는 김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을 그대로 싣는 게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아래의 글은 김희신 교수의 글 원문이다.

 

화교들의 모임 장소로 이용되는 중화회관은 전 세계 어디를 가든 볼 수 있으며 중국인들의 단합된 힘과 저력을 느끼게 하는 상징적인 곳이다. 중화회관에서는 화교들의 사업, 교육 등 모든 안건을 협의해 처리하는 민간정부기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화교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중화회관을 세운 것은 1884년 한성에서였다. 얼마 후 1885 12월부터 북방, 남방, 광방 등 지연에 따른 동향조직으로의 분화가 순차적으로 이루어졌고, 이후 한성에는 더 이상 중화회관이란 공식적 이름을 가진 단체나 건축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1904년에 지연을 초월한 연합 단체가 생겨나긴 했지만 한성화상총회란 이름이었고, 중화회관은 아니었다.

한성 이외 지역에서 중화회관이란 명칭은 인천과 원산 두 곳에서 확인된다. 1905년 인천중화회관이, 1889년 원산중화회관이 각각 성립되었다. 특히 인천은 한성과 함께 화교들의 주요 활동거점이었는데, 인천 개항 후 20여년이 지난 1905년에 중화회관이 성립되었으니 원산에 비하면 시기적으로 한참 뒤의 일이다. 인천중화회관은 이후 인천중화상무총회(1914 1), 인천중화총상회(1917 5) 등으로 개조를 거쳤다.(「駐朝鮮使館-民國6:商務01)

인천중화회관에서 현재의 인천화교협회로 이어지는 인천화교단체의 역사과정에 근거해 보면 과거 인천화교자치구 건물 상단에 ‘중화회관’ 현판이 걸리고, 실제 인천화교들이 중화회관을 현 화교협회의 전신이라 인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존하는 외교문서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문건은 그 존재를 더욱 명확하게 해 준다. 아래 문건은 1906년 인천중화회관이 총영사에게 보고한 회관의 수지내역이다.(「駐朝鮮使館-吳其藻:商務03) 문건 내용상 1906년 당시 회관은 건물임대료 및 서보사1) 기부금을 통해 운영되었고, 회관관리업무 외에 학당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 인천중화회관은 청국영사관 지역 내에 있던 옛 전보국 건물을 수리해서 회관 건물로 사용했다. 건물의 수리비용은 당시 인천의 북방·남방·광방 등 동향조직이 모아 둔 공금과 화상의 기부금으로 충당한다고 보고되었다.(「駐朝鮮使館-曾廣銓:商務03) 그런데 인천화교협회에 소장된 ‘1910년 보험증서’내의 ‘중화회관’이 외교문서에서 언급한 1905년에 수리한 청국영사관 경내의 ‘옛 전보국’ 건물인지, 이후 신축된 별도의 건물인지 여기서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지금 ‘중화회관’이란 석비가 옛 청국영사관 회의청 뜨락에서 발견되는 것이 난데없지 않음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한 듯하다. 1956년 인천화교자치구 사진 속 현판이 지하 땅속에 묻혔다 발견된 연유도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본 지면의 한계를 미리 참작하시어 비교적 짧고 간명하게 보내주신 글이다. 보다 상세한 내용을 구하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김희신 교수가 최근에 발표하신 「華僑, 華僑 네트워크와 駐韓使館―청일전쟁 이후, 한성 지역을 중심으로」(中國史硏究, 2014.4)를 참고하셔도 좋을 듯하다. 김 선생님의 의견은 주로 1차 사료인 駐朝鮮使館에 근거한 것이라 비교적 신뢰할만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필자가 애초에 준거로 삼았던 일본 연구자들의 저서와 논문도 함부로 내칠 수만은 없어 이에 대한 보다 치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 같다. 일례로, 인천중화상무총회의 건립연도만 보더라도 김희신은 1914 1월이라 했지만, 왕언메이(王恩美)나 야스이 산기치(安井三吉) 같은 경우에는 1910년 그리고 이정희는 1913년으로 잡는 등 각각 그 시기를 달리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진행 중인 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끝으로 이에 대해 또 다른 지혜를 빌려주실 분들이 계시다면, 적극적인 의견개진을 부탁드리는 바이다.

 

 


1) 書報社는 20세기초 중국동맹회가 동남아 각지에 세웠던 혁명전선기구로, 신문도서를 갖추고 강연 토론의 장을 만들고, 민주혁명사상에 대한 선전활동을 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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