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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9 /2014.09] 기획 _ 중국철도이야기 (9) 세계를 뒤흔든 중국발 열차강도사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80

[Vol.49 /2014.09] 기획 _ 중국철도이야기 (9)    세계를 뒤흔든 중국발 열차강도사건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1923 5 6일 새벽 3시경, 포구를 출발하여 천진으로 향하던 진포철도(津浦鐵道)의 열차가 산동성 임성-사구 구간에서 토비의 습격을 받아 중국인 71명과 외국인 승객 39명이 납치되는 소위 임성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열차는 미국으로부터 막 수입되어 당시 중국에서 최신식 차종으로서 차량 전체가 남색 강철로 만들어져 ‘藍鋼皮’라고 불리웠으며,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을 ‘남강피사건’이라 칭하였다. 임성사건은 중국 전역뿐만 아니라 구미의 신문도 다투어 이를 대서특필하였으며, 세기의 대사건으로 전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열강은 이를 의화단사건 이후 최대의 배외사건으로 규정하고, 중국정부에 이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진포철도 천진역

 

청 광서 초년인 1876-1879년에 화북지역에서는 엄중한 한재가 발생하여 산동, 직예, 하남, 산서, 섬서의 5성을 휩쓸었으며, 사망자가 무려 천만 명에 달하였다. 특히 한재는 1877(丁丑年), 1878(戊寅年)에 최고조에 달하여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정무기황이라고 불렀다. 정무기황 이후 40년만인 1920년에 산동성을 비롯하여 화북 대부분 지역에서 대한재가 발생하였다. 당시 언론의 보도를 살펴보면, 진포철도 연선의 재황이 특히 심하여 농업의 작황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포철도 연선 일대에는 콩의 싹이 3寸에 지나지 않으며, 옥수수 키도 1척 여에 불과하고 1척이 되지 않는 것도 허다하였다. 고량은 낱알이 영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속이 비어 있었다. 한해가 휩쓴 결과였다.

 

심어놓은 고량이 채 익지도 않았으나 사람들은 뿌리채 뽑아 줄기까지 먹어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여 초근목피, (면화), 겨 등으로 연명하였으며, 심지어 식량을 뺏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마저 발생하였다. 식량과 사료가 부족해지자 가축들이 대량으로 도살되고 팔려나갔다. 이러한 현상이 허다하여 평소 50-80원 하던 소 한 마리 가격이 15-20원으로 폭락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재민들은 가지고 있던 작은 밭떼기마저 저당잡히거나 팔아버렸으며, 일상 생활용품도 모두 내다 팔았다. 심지어 자식이나 처를 팔아버리는 일이 빈번하였으며, 특히 여아의 경우가 심하였다. 재민들은 자녀를 겨우 수원의 가격으로 팔아버렸으며, 심지어 1, 2원도 있었다.

 

진포철도 양변에 늘어서 있던 양회나무의 이파리들은 난민들이 모두 따서 분말을 내어 떡으로 만들어 먹었다. 진포철도를 경비하던 철도경찰들도 이들의 처지를 동정하여 이를 방기하였다. 양회나무 이파리도 모두 사라지고, 기아에 지친 사람들은 병들고 사망하여 길가에는 죽은 시체들로 가득하였다.

 

북양군벌 통치시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토비의 숫자가 급속히 증가하였다는 사실이다. 1916 6월 원세개 사후 중국에서는 군벌 할거의 국면이 전개되었다. 북양군벌정부 시기 산동성에는 52종에 달하는 각종 세금이 있어, 성민 한 사람이 부담해야 하는 세금은 민국 초기에 2.2원에서 20여원으로 상승하였으며, 군벌들은 군표 등 채권을 남발하여 이들을 착취하였다.

 

민국 이후 대소군벌들은 산동성에서 병사를 모집하였는데, 예를 들면 강소성의 장훈, 호남성의 장경요, 광동성의 용제광 등이 대표적인 예였다. 임성사건을 주도한 손미요와 토비들은 원래 장경요의 예하 부대였으나 호남전에서 패배한 이후 해산되었다. 산동독군 전중옥의 부관 장건공은 대총통에게 “군대 해산 이후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 토비로 유입되어 연합하니 지역이 소란스럽게 되었다. 직노예(하북성, 산동성, 하남성) 3성 교계지는 토비세력이 창궐하여 소굴이 되었다”라고 보고하였다.

 

토비가 정부와 타협하여 하루아침에 관가의 사람으로 변모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군대와 토비 사이를 엄격하게 구분하기 어려웠으며, 세간에서는 들어오면 군인이 되고 나가면 토비가 된다고 회자되었다. 북양군벌정부 시기에 토비의 군벌화와 군벌의 토비화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중국 각 성 및 각 주현의 교계지에는 특히 토비의 출몰이 빈번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중국에서는 3, 3주현 등의 교계지를 3不管, 4, 4주현 등의 교계지를 4불관이라고 칭하는 속어가 있었다. 즉 인근성, 인근 주현과의 접경지역에서 지방관들이 해당 지역에 대한 통제의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는 모양을 묘사한 것이다. 특히 진포선 일대는 산동, 하남, 강소, 안휘 등 4성 교계에 해당되는 지역으로서 토비의 소탕에 각성의 합작이 곤란한 지역이었다. 더욱이 임성사건을 주도한 토비의 소굴인 抱犢崮는 산세가 높고 지세가 험해 산동성 봉현의 8경 가운데 하나로서, 봉현, 비현, 등현, 임기현의 4, 동서 약 60여리, 남북 약 40리에 걸쳐 있었다. 1920년 화북에 대한재가 들었을 때, 포독고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특히 재난이 심하여 10집 가운데 9집이 비었으며, 도적이 된 자가 20만 명 이상에 달하였다.

 

손미주를 수령으로 하는 토비 무리는 1920년 청명절에 산동성의 봉, , 3현의 교계지인 金銮殿에 모여 스스로를 ‘산동건국자치군’이라 명명하였다. 손미주는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어 손미요와 주천륜을 부총사령으로 추대하고, 손계지를 참모장으로, 정개법을 참모처장으로 임명하였다. 그 아래 5로군이 있어 제1로군 사령은 손미주가 겸하였으며, 2로군 사령에는 곽기재, 3로군 사령에는 주천송, 4로군 사령에는 왕계상, 5로군 사령에는 유청원을 임명하였다.

 

1922 7월 초 ‘산동건국자치군’이 臨沂 傳家庄을 공격하여 지주 조영정 및 기타 부호 수십명으로부터 총 21만원을 약탈하자, 북양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과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1922 7 15일의 전투에서 손미주는 사망하였으며, 이후 그의 아우인 24세의 손미요가 총사령의 직무를 승계하였다. 1922 8월 초 손미요는 1,500명의 토비를 이끌고 포독고 일대에서 정부군인 제6려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북양정부는 산동독군 전중옥을 剿匪司令으로 임명하여 산동 제5, 6혼성여단과 20여단, 5사단 등의 부대를 지휘하여 포독고를 포위하였다. 마침내 1923 4, 포독고의 토비 소굴은 양식과 물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궤멸의 위기에 처했다.

 

대책회의에서 손미요의 숙부인 손계지는 철도를 습격하여 외국인을 납치하고 이를 협상조건으로 관병의 포위로부터 벗어나자는 계략을 제안하였다. 이후 손미요는 임성, 남경, 상해 등에 밀정을 보내 정탐한 결과, 미국의 지원으로 완공된 황하 유역의 댐 준공식이 5 8일에 개최되어 중외인사들과 기자들이 탐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임성에 파견했던 밀정도 5 5일 진포철도 임성경무처장 장문통의 50세 생일을 맞이하여 각 열차역의 경비대장들이 참석할 예정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손미요와 손계지는 5 6일 새벽에 열차를 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임성사건 발생 당시 상황을 표시한 지도

 

이들은 중국인 71, 외국인 39명을 납치하여 분산 수용함으로써 관군들이 쉽게 공격할 수 없도록 하였다. 토비들은 외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물품들을 모두 갈취하였는데, 처음보는 서양의 물건들이 신기한 듯 하나하나 용도를 물어보았다. 토비는 로션을 가리키며 먹는 것이냐고 묻고는 피부에 바르는 것이라 알려주자 이내 버리고 말았다. 이들 중에는 서양인의 옷가지에서 발견된 여성용 브래지어를 허리띠로 여겨 차고 다니는 자도 있었다.

 

손미요는 독일인 천주교선교사에게 “자신들은 예전에 군인이었으나 해산된 이후 생계가 막막하여 약탈로 연명하는 자들로서, 이번 일은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번에 외국인들을 납치한 것은 정부에게 자신들을 정규군으로 다시 편제시켜 줄 것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돈을 탐하여 저지른 행동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손미요는 5 7일 관부에 인질을 보내 협상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첫째, 군대를 파견하여 공격하지 말 것, 둘째, 토비를 정규 관군으로 편성해 줄 것과 1년분의 식량을 제공할 것, 셋째, 군사공격이 시작될 경우 인질을 살해할 것 등을 통보하였다.

 

5 8, 각국 공사는 외교단회의를 개최하여 포르투갈공사 프레타스(J, Batalha de Freitas)를 대표로 임명하여 국무원총리 장소증에게 엄중한 항의를 전달하면서, 기한내 외국인 포로를 안전하게 구출할 것과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장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5 9일 외교부차장 심서린은 각국 공사를 만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외국인을 안전하게 구출한 이후에 비로소 토비의 토벌에 나설 것임을 약속하였다. 따라서 토비에 대한 군사행동은 외국인의 안전을 고려할 경우 선택되기 어려운 정책이었다.

 

5 13일 관방의 정식대표인 미국인 앤더슨(Anderson)과 강소독군 제섭원의 교섭원 온세진이 비구로 들어가 정식 회담에 임하였다. 관방대표는 먼저 서양인들을 석방한 이후 회담을 진행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손미요는 “첫째, 자신들의 본거지인 포독고를 포위하고 있는 관군을 백리 밖으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며, 이것이 실현될 경우 외국인 및 중국인인질 일부의 석방을 약속하였다. 둘째, 군대 철수 이후 자신들을 정규군으로 편제해 줄 것과, 이에 대한 정부 측의 의지를 보이는 차원에서 무기류를 우선 보급해 주도록 요구하며, 이것이 실현될 경우 다시 일부 외국인인질을 석방하기로 약속하였다. 셋째, 정부가 급히 대표를 파견하여 자신들을 관군으로 편제하는 방안에 관해 논의하며, 편제가 완료된 이후 외국인인질을 모두 석방한다”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요구에 관방은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표시하였다.

 

마침내 6 12일 오후 4, 북경정부 미국인고문 앤더슨의 보증 하에 다음과 같은 합의에 도달하였다. 첫째, 총을 가진 3천명을 산동신편려로 편제하고 여장에 손미요를 임명한다. 둘째, 편제를 원치않는 자는 정부가 免死證을 발급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 셋째, 편제 여부를 떠나 모든 사람에게 일인당 現洋 20원을 지급한다. 넷째, 모든 중국인, 외국인 인질을 석방한다. 다섯째, 위의 조항은 앤더슨 및 당지 신사들이 실시를 보증한다. 이러한 결과 양측은 棗庄 부근의 十里河에서 협정에 서명한 이후 인질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소위 ‘산동건국자치군’의 토비 무리들은 마침내 산동신편려로 편제되었으며, 조장에 旅部를 두고 제5사단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손미요는 려장으로, 손홍도는 참모장으로, 곽기재는 제1단 단장으로, 周天松은 제2단 단장으로, 왕수의, 고문성, 유청원, 思振, 왕계상, 손미송 등은 營長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곤이 대총통에 취임한 이후 신임 산동독리 정사기로 하여금 손미요를 살해하도록 지시하였으며, 1923 12 19일 정사기는 곤주진수사 장배영을 시켜 손미요와 일행 11명을 유인하여 살해하였다. 손이 사망한 이후 산동신편려의 병사들이 도망하는 풍조가 생기자 군사령은 이들에게 免死證을 교부하고, 이들의 무기를 관에서 구입하고 원적지로 돌려보내기 위해 정부에 무기구입비 7만원의 지출을 신청하였다.

 

그러면 손미요는 왜 살해되었을까? 임성사건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각지의 토비가 이를 모방하여 외국인의 납치사건과 정규군으로의 편제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일찍이 5 26일 토비 무리가 경한선 열차를 공격하였으나, 철도를 경비하고 있던 14사단에 의해 격퇴되었다. 임성사건 이후 손미요의 토비집단이 정규군으로 편제되자 같은해 8월 중순 현재 산동성 내 101개현 가운데 토비가 창궐하여 군사편제를 요구한 지역이 43개현에 달하였다. 10 12일 오후 10시에는 낙양발 서주행 열차가 서주로부터 120리 떨어진 지점에서 토비들의 습격을 받았다. 이들은 철도교량을 절단하여 열차를 전복시키고 약탈하였는데, 사상자가 무려 129명에 달하였다. 11월에는 산동성 창읍에서 토비가 프랑스신부 및 선교사들을 납치하여 정규군으로의 편제를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관군이 1개월 동안 이를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1 13일 진포철도에서 다시 토비가 출몰하여 부유한 촌민 10명을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하였다.

 

당시 언론은 임성사건이 이후 발생한 토비사건들과 어떠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토비사건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임성사건의 사후처리는 산동, 각지 및 하남, 산서 방면의 토비들에게 다대한 영향을 미친다. 현재 진포선의 서주로부터 하남성 개봉에 이르는 철도 연선 일대의 토비가 동요의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더욱이 경한선 및 진포선의 다른 구간에서도 토비의 출몰이 극성이다. 만몽에서 잠복해있던 마적도 창궐하고 있다.” 이와 같이 토비의 창궐을 예방하기 위해서도 북양정부로서는 이미 손미요를 주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1923 5월 손미요 토비집단이 진포철도를 습격하여 발생한 임성사건은 북경군벌정부의 무능과 중국의 총체적 무질서를 백일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군벌들의 할거로 말미암아 중앙의 정령이 각지에 침투하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공백을 틈타 각지에서는 혼란과 무질서가 극에 달하였다. 따라서 군벌 할거의 정치구도를 혁파하고 중앙집권적인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근대 이래 중국의 주요한 과제였으며, 또한 근대화의 요체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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