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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8 /2014.08] 자료소개 _ 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 발굴을 통해 본 ‘인천화교 사화(史話)’ (4)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57

[Vol.48 /2014.08] 자료소개 _ 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 발굴을 통해 본인천화교 사화(史話)’ (4)

Episode 4. 인천의 ‘중화회관(中華會館)?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인천화교협회 후면에 자리한 옛 청국영사관 회의청 건물을 보노라면 마음이 무겁고 영 개운치 않은 감을 갖게 된다. 이 회의청 건물은 인천차이나타운 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1910년 건립)이다. 어쩌면 인천화교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장소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100년이 넘은 이 건물은 그 어느 누구의 따뜻한 손길도 마다한 채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다. 아니 모두의 눈길을 거부한 채 후미진 그늘 밑에서 자신의 명을 스스로 재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심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회의청 뜨락 한켠에 ‘中華會館’이란 석비가 놓여 있다.

 

좁다란 뜰 하나를 사이에 두고 회의청과 마주하고 있는 현 화교협회가 본래 중화회관의 전신이었다는 점에서 석비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은 가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석비가 원래부터 이곳에 자리했는지는 사실 명확치 않다. 협회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1980년대 화교협회 건물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땅 속에 묻혀있던 것을 캐낸 것이라고 하는데, 왜 수십 년간 지하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발견된 것을 현 위치로 옮겨놓은 것이 아닌 바에는 석비의 본래 위치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추측을 더해본다.

 

문제는 ‘중화회관’이란 명칭이다. 중화회관은 화교가 있는 세계 어느 곳이든 존재한다. 타이완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고 동남아에도 있다. 본시 화교들이 중화회관을 건립하게 된 데에는 자신들의 각종 복리와 후생을 도모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후에는 영사업무의 일정부분을 전담하기까지 하면서 행정기관의 역할을 겸하기도 했다.

 

물론 19세기 말 조선에도 있었다. 1884년 한성에 설립된 중화회관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1899년 한성 중화회관이 ‘중화상회(中華商會)’로 바뀌게 되면서 이후로는 한반도 그 어느 지역에서도 중화회관이란 간판을 내건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1910년 인천에 설치된 것도 ‘인천중화상무총회(仁川中華商務總會)’였지 인천중화회관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앞서 발견된 석비는 난데없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중화회관이란 이름을 명기한 자료 몇 개를 우연히 발견했다. 1910년부터 1911년 사이에 작성된 인천중화회관 명의의 보험증서이다.

 

  

 

우선, 1910년 자료는 ‘保險單(보험증서)’라고 적힌 봉투이고 내용물은 없다. 그러나 다행히 당시 이와 관련된 업무를 맡았던 화교가 자신의 작업 편의를 위해서인지 봉투 뒷면에 일부 내용을 필사해 놓았다. 필사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중화회관이라 불리던 건물에 화재보험을 들었는데, 보험기한은 1910 8 5일부터 1911 8 5 4시까지이며, 약정된 보험금은 3천원임을 알 수 있다. 또 세부항목까지 명기해놓았다. , 앞쪽 건물 1,500, 뒤쪽 건물 800, 왼쪽 건물과 오른쪽 건물 각각 350, 도합 4개의 건물에 총 3,000원의 보험을 든 셈이다. 추측컨대, 여기서 담당 화교가 적어놓은 ‘중화회관’은 엄밀히 말해, ‘인천중화상무총회’였을 것이다.

 

 

 

두 번째 보험증서에서도 중화회관이란 명칭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자료는 보험사인 The North British & Mercantile Insurance Company 명의로 된 보험증서로 구체적인 납입영수증이 포함되어 있다. 봉투 전면에 ‘renewals’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앞의 보험이 기한 만료되어 갱신한 보험증서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도 피보험자로 ‘The Chung Whua Wei Kwang’ 즉 중화회관으로 명기되어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중회회관이란 이름은 1899년 이후 공식적으로 쓰이지 않는 명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에서 중화회관이란 이름이 발견된다. 지금의 인천화교들도 인천화교협회를 중화회관의 전신이라고 하는데 익숙하다. 인천중화상무총회에서 인천화교협회가 되기까지, 인천화상상회, 인천중화상회, 인천화교자치구() 등의 이름은 있었지만 인천중화회관이란 명칭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기에 하나의 사진을 더해본다.

 

이 사진은 1956년 그러니까 인천화교자치구 시절에 당시 구장(區長)이었던 여계직(呂季直) 선생이 자치구 건물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仁川華僑自治區’란 현판 외에도 건물 상단에 ‘中華會館’이란 현판이 엄연히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참으로 혼란스럽고 궁금하기 짝이 없다.

석학제현의 지혜를 간절히 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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