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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8 /2014.08] 기획 _ 중국철도이야기 (8) 청조를 몰락으로 이끈 철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150

[Vol.48 /2014.08] 기획 _ 중국철도이야기 (8)    청조를 몰락으로 이끈 철도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철도와 은행을 통한 정복(Conquest by Railway and Bank)”이라고 비유할 정도로 철도는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철도부설권은 단순히 교통상의 권리뿐만 아니라 철도가 지나는 연선에 대한 수비권, 철도 부속지 수용권, 면세 특권, 부속지에서의 행정권, 광산 채굴권 및 삼림 벌채권 등을 획득함으로써 사실상 해당 지역에 대한 세력권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철도부설권의 획득에 비추어 각 지역 간에 분포된 열강의 세력 범위를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철도를 통해 중국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열강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을 주도함으로써 요동반도를 일본으로부터 회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를 통해 만주지역을 관통하는 동청철도의 부설권을 획득하고, 철도의 관리와 경영에 대한 권리를 바탕으로 만주에서 배타적인 세력권을 확대해 나갔다.

 

프랑스는 청프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1885년의 천진조약에서 이미 중국 남부지역에 대한 이권과 철도 부설권을 확보하였으며, 더욱이 1895년에는 운남, 광동, 광서 등 각지에서 광산 채굴권과 안남으로부터 중국 내지에 이르는 철도 부설권을 보장받았다. 이에 근거하여 다음해에는 중국정부와 광서-용주 간의 철도 부설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이후 다시 용주-남녕, 용주-백색, 안남-운남철도 구간의 부설권도 획득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에 참여했던 독일은 1897년 산동성 곤주현에서 두 명의 독일 선교사가 살해된 사건을 빌미로 교주만을 점령하고 이곳에 조차권을 강요하였다. 이와 함께 이 지역의 철도 및 광산에 대한 이권을 획득하여 중국에서의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독일은 <독청교주만조약>을 체결하여 교주만으로부터 유현, 청주, 박산, 치천, 추평 등을 거쳐 제남에 이르는 산동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으며, 이와 함께 석탄의 채굴권과 기업 운영권을 획득하였다. 이어서 1904년에는 청도-제남 간의 노선 및 장점-박산 사이의 철도 지선을 부설하였다.

 

한편 영국은 독일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영미신디게이트를 조직하여 550만원의 차관계약을 체결하여 진포철도를 부설하고, 이를 통해 철도 연선지역에 대한 이익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독일은 산동에서의 배타적 지배권을 주장하면서 이 노선이 산동을 통과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결국 1899년 영국은 산동에서 독일의 배타적 지위를 인정한 위에서 영국과 독일이 공동으로 차관계약을 체결하도록 조항을 개정하였다. 이러한 결과 천진으로부터 산동, 남경에 이르는 전 노선 가운데 3분의 2를 독일이, 나머지 3분의 1을 영국이 부설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밖에도 영국은 천진-진강 노선, 산서-하남 노선, 구룡-광동 노선, 포구-신양 노선, 소주-항주 노선 등 총 다섯 노선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1899년 철도 부설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이해가 충돌하자 상호 협상 결과 만주에서 러시아의 권익 및 장강 유역에서 영국의 권익을 상호 승인하기로 합의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으며, 곧이어 길장철도의 부설권도 획득하였다. 이러한 결과 러시아가 북만주철도를, 일본이 남만주철도를 장악함으로써 만주에서의 세력권을 양분하였다.

 

미국의 경우, 기타 열강에 비해 늦은 1899년 국무장관 죤 헤이가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 대해 ‘기회 균등, 문호 개방’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으며, 경한철도와 월한철도의 부설권을 주장하였다. 1898년 미국은 주미 중국공사 오정방과 중국에 대한 투자기관으로서 中美啓興公司를 설립하기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이 회사의 주도 하에 월한철도 계약을 성립시키고, 다음해 철도를 부설하기 위한 실측을 마쳤다.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권으로 나눠진 중국

 

철도를 통한 열강의 세력 확대와 이에 따른 이권의 유출이 심화되자 중국관민들 사이에서는 열강으로부터 철도의 이권을 회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하였다. 진천화는 「警世鐘(세상을 일깨우는 종소리)」이라는 문장을 발표하여 열강에 철도 권익을 매도하는 청조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관민들은 열강으로부터 철도의 부설권과 경영권을 회수함으로써 중국의 자주,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야말로 근대화의 요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청조에 철도를 시급히 부설해야 한다고 건의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홍장의 외교고문인 미국인 포스터(John W. Foster)였다. 그에 따르면 중국의 가장 시급한 현안은 군대를 서양식으로 편제하여 훈련시키는 것이고, 그 다음이 바로 철도를 부설하는 일이라 역설하였다. 더욱이 1895 5 2, 강유위 등 603명은 조정에 公車上書를 올려 철도를 부설해야 한다는 뜻을 상주하였다.

 

이와 같은 요구에 부응하여 1895년 청조는 상해에 중국철로총공사를 설립하고 성선회를 철로대신으로 임명하여 전국의 철도 관련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청일전쟁 이후 진노철도, 노한철도, 호녕철도, 변락철도, 월한철도 등을 부설하였으며, 1903년에는 경장철도(북경-장가구)를 부설하였다. 이와 같이 1895년 이후 철도 부설은 청조의 핵심적인 사업이 되었다.

 

이와 함께 1903년 청조는 상부를 설립하는 동시에 철도의 발전을 위해 <철로간명장정> 24조를 반포하였다. 장정의 주요한 내용은 철도의 경영을 희망하는 자가 주식을 모집하여 철도공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부로부터 철도 경영을 허가받은 자는 6개월 이내에 철도의 부설에 착공해야 하며, 50만량 이상의 자금을 모집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를 통해 예정 철도 노선의 부설을 완료할 경우 상부가 정한 12등급의 장려정책에 따라 이를 포상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철로간명장정>은 철도를 차관의 담보로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철도 이권의 유출을 방지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명확히 철도의 부설에 중국민간의 자본을 흡수하여 열강의 철도 부설권을 회수하기 위한 목적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1906년에 조산철도가 중국의 자본을 모집하여 부설된 것을 계기로 철도의 이권회수열이 발흥되었다. 이에 일찍이 미국에 부여한 월한철도의 부설권을 회수하여 3개 성의 자영으로 한 것을 비롯하여 도청철도, 월한철도의 三水支線 및 진포철도, 경한철도의 부설권 및 경영권 등을 회수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국이 스스로의 역량을 통해 철도를 부설하자는 철도자판운동이 흥기하여, 안휘성에서는 안휘철도, 산서성에서는 동포철도, 절강성에서는 절강철도, 광동성에서는 신녕철도, 복건성에서는 장하철도, 광서성에서는 계전철도의 부설 계획을 수립하면서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열기에도 불구하고 1906년에 준공된 潮仙鐵道와 1909년에 완성된 경장철도를 제외하고는 당초의 목표대로 완성된 철도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금이 부족하여 공사에 착공조차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수많은 철도공사들은 중앙정부의 배경이나 보증없이 오로지 그 지역 출신들로만 발기인을 구성하였으며, 이러한 결과 민간자본의 자발적인 호응이 매우 적어 무엇보다도 자본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각 철도의 민간주는 浙路, 蘇路, 川路, 粤路의 경우 수백만량에 달했을 뿐 나머지 철도공사는 모두 수십만 량을 모으는데 불과하였다.

 

자금의 강제적 할당에도 불구하고 천한철도를 비롯하여 이권회수운동의 대상이 된 지역에서 철도 부설을 위한 자금은 계획대로 모집되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철도의 부설은 계속 지연되었다. 철도의 부설이 지연되자 청조는 외채를 차입하여 철도를 부설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 1908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3개국과 철도차관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러한 결과 마침내 1909 6월에 550만 파운드의 차관을 도입하기로 합의하고, 이 가운데 250만 파운드를 천한철도를 부설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에 미국도 여기에 참가하여 4개국은행단을 조직하였다.

 

1911년 급사중 석장신은 전국 철도의 국유화를 주장하며, 이를 통해 철도자판운동으로 자금의 모집이 부진하여 부설이 지체되고 있던 사천 등의 철도를 조속히 부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볼 때, 농민의 수중으로부터 모집된 자금만으로 운영되던 상판철도공사의 경영 부진이 국유화를 추진하도록 만든 주요한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조정부는 상판철도의 부설이 부진하자 외채를 도입하여 철도를 부설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한 선행조치로서 철도국유화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청조는 1911 5 9일 철도국유화의 칙령을 반포하였는데, 국유화의 과정에서 그 동안 각지 상판철도공사에 모집된 자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주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특히 국유화의 직접적인 대상이었던 월한철도와 천한철도가 통과하는 광동성, 호북성, 호남성, 사천성 등 4개 성민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철도국유화가 선포되자 각지의 주주들은 격렬하게 반대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철도국유화의 소식이 사천성에 전해지자 주주들은 모임을 갖고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회의에서 동맹회 관계 인사들은 청조에 강력하게 투쟁할 것을 주창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여지없이 노정된 청조의 무능함과 매판성을 목도한 성민들은 철도의 이권회수운동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해를 침해하는 정권에 큰 불만을 품었으며, 이는 결국 보로운동으로 비화되어 청조의 멸망으로 연결되고 말았다.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된 보로운동이 호북, 호남, 광동, 사천성 등 4개성에서 진행되었지만, 가장 격렬한 지역은 역시 사천성이었다. 사천보로운동은 최초 경제적인 요인에 비중을 두고 전개되었으나 이후 경제문제가 점차 청조 타도의 반청투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1911 6 16, 주주 20여 명은 보로동지회를 결성하여 공개적으로 청조에 선전할 것을 결정하고 행동 방침을 설정하였다. 마침내 다음날인 6 17일 成都에서 정식으로 사천보로동지회가 결성되었는데, 여기에 사천성민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후 이 열기는 사천 각지로 확산되어 9 7일까지는 64개 현에서 동지회분회가 조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조는 8 19일 여전히 공사의 자금으로 철도를 계속 부설하도록 명령하였으며, 이에 보로동지회는 24일 긴급특별주주총회를 개최하고 청조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와 함께 오후 4시가 되자 사천의 상점들은 항의의 뜻으로 일제히 문을 닫았다. 분노한 사천성민들은 보로동지회를 중심으로 무장항거의 반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보로운동이 확산되자 9 7일 청조는 군대를 철도공사에 보내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감금하였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군중들이 총독 관아로 몰려가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자 이 과정에서 관병이 청원 군중에 발포하여 26명이 사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成都血案이다. 성도혈안을 계기로 보로운동은 본격적인 반청의 무장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어 9월 하순 민군의 수는 이미 10만 명을 넘어섰다. 이어 현 단위의 독립이 줄을 잇고, 나아가 사천성을 비롯한 전국 각 성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청조는 스스로 퇴위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이천년에 걸친 황제정치가 몰락하고 공화정이 수립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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